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차 Feb 15. 2023

감정 전당포(9)

운다고 달라지는 거 없다고, 엄마가 그랬는데.

아빠의 증세가 심해졌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아빠는 중심을 잡는 일도 운전대를 잡는 일도 어려워졌다고 한다. 뇌출혈로 운전 중에 큰일을 당할 뻔한 일이 있고 나서 아빠의 뇌는 느리지만 명확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물컵에 물을 받던 나는 잠시 세상과 멀어지고 싶었다. 정확히는 도망치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아빠와 나는 친밀한 부녀 사이는 아니다. 대학교 때엔 미움과 증오가 극에 달했으나 무시로 일관했다. 아빤 무서운 존재였으므로 무시가 아닌 도망에 가까웠지만.


사회인이 돼서도 아빠와 나는 여전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날이 드물었다. 적어도 나는 아빠가 언제 나가고 언제 들어오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아빠는 달라졌다. 집요하게 질문의 꼬리를 잡고 놓지 않았다. 답답함이 밀려왔다. 신경질도 났다. 난 이제 성인이고, 일도 하고, 돈도 버는 존재인데 변함없이 울타리 안에 두려는 행동에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나를 믿지 못하냐로 시작한 얘기가 결국 나의 눈물로 끝이 났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아빠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



전날의 기분은 다음 날이 되어도 변하지 않았다. 삐뚜름한 마음으로 맞이한 아침은 상쾌함과 거리가 멀었다. 거실에선 왁자지껄한 티비 소리가 들렸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아빠가 집에 나가면 집에 들어올 요량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아빠는 내게 몇 번 말을 걸었으나 퉁명스러운 대답이 나갔다. 원래라면 이런 내 태도에 다시금 열이 오른 말이 나오기 마련인데,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이상함에 아빠를 힐끔 쳐다봤다. 그리고 뾰족한 심지가 가슴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아빠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의 의미를 아는 이유는, 어릴 적 엄마와 싸운 아빠가 현관문을 나설 때면 짓던 내 눈빛이기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아빠의 차림새는 후줄근한 나시였다. 앙상한 팔꿈치와 뼈가 보이는 어깨에 입이 다물렸다. 독재자였던 아빠는 어디 가고 세월을 고스란히 받아 든 모습이 여기 있는 건가.



애틋한 부녀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면, 아빠의 소중함을 깨달은 딸이 달라진 태도를 보였을 거다. 하지만 난 효녀보단 효년에 가깝다. 몇 년의 세월에 걸쳐 영글어진 감정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자꾸만 틈이 생긴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자꾸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되어 간다.

상대를 이해한다는 건, 상대의 입장에 서 본다는 의미다. 행동의 원인과 계기를 파악하며 서로의 거리를 가깝게 한다는 뜻이다.


나는 계속해서 연약해져만 가는 아빠를 보며 운다. 운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고 말하는 엄마의 음성에도 조각조각 난 눈물을 흘린다. 슬픔이 빠져나간 틈으로 아빠가 들어온다. 아빠가 안 아팠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감정 전당포(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