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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시와 Feb 19. 2020

눈의 온기로 사람을 품다 - <윤희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전하는 사려 깊은 태도에 반하다

모처럼 서울에 함박눈이 쏟아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바이러스와 이에 뒤따라 구획 짓기로 안온함을 확보하려는 분위기에 휩쓸려 덩달아 불안한 시국이다. 잠시라도 심란한 기류를 덮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유난히 눈발이 그리웠던 차에, 서울을 감싸 안듯 소복이 내려앉은 눈은 적잖은 위안과 즐거움, 설렘마저 안겨줬다.


<윤희에게>는 서울에서 눈이 희귀했던 이번 겨울에, 설경을 시야 가득 채우고 싶어 선택했던 영화이다. 사실 눈발이 그리울 때면 자동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무수히 많은 이들에게 오겡끼데스까를 각인시켜준 그 작품. 역시 <러브레터>이다.


영화 <러브레터>의 포스터

<러브레터>는 일본 영화의 수입이 금지되었던 시절에 조악한 화질로 처음 만나보았다. 정식 개봉 후에 여러 번 다시 보았는데, 볼 때마다 여지없이 아련한 잔상을 남긴다. 뽀샤시한 미장센과 여릿여릿한 감수성을 담지한 것은 물론, 매력적인 캐릭터와 흡입력 강한 이야기가 어우러진, 그야말로 완성도 높은 영화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설원의 일본 호타루, 손편지, 10대의 사랑 등 <윤희에게>와 <러브레터>는 핵심적인 키워드가 겹친다. 그렇지만 <윤희에게>는 이미 명작의 반열에 들어선 <러브레터>와는 분명 또 다른 매력을 갖춘, 기대 이상의 놀라운 영화였다.


<윤희에게>의 스틸사진

영화는 일본의 호타루에서 대한민국의 소도시로 편지 한 통이 날아들면서 시작된다. 편지의 발신자는 쥰(나카무라 유코), 수신자는 윤희(김희애)이다. 쥰의  동거인인 고모 마사코(키노 하나)가 쥰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봉투를 발견하고, 이를 우체통에 넣는다. 한국에서 윤희의 딸 새봄(김소혜)이 윤희 몰래 편지를 받아보고는 능청스럽게 윤희에게 호타루 여행을 제안한다. 윤희는 덥석 새봄의 제안을 받아들여, 하얀 눈으로 뒤덮인 호타루로 향한다.

 

       <윤희에게>의 윤희와 쥰              

남편과 이혼한 후, 딸 새봄을 키우며 성실하게 식당 노동자로 살아가던 윤희. 무덤덤하게 일상을 보내는 것 같지만 더없이 메마른 언행에서, 그녀가 실은 버티고 있음을 알아채기란 어렵지 않다. 쥰 역시 호타루에서 고모 마사코와 동고동락하며 수의사로서 안정적으로 생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주변에서는 묘한 허무함이 배어 나온다.


윤희와 쥰은 각자 한국과 일본에서,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을 무난히 살아내지만, 어쩐지 부족해 보인다. 사실 둘은 십 대 시절 마음을 나누었던 사이이다. 불가피하게 이별하고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간간히 꿈에서만 만나왔다. 켜켜이 시간이 쌓일수록 선뜻 앞서지 못했던 서로를 향한 발걸음이, 마침내 편지 한 장을 통해 성큼 내딛게 된 셈이다.


<윤희에게>의 새봄

윤희와 쥰의 곁에는 든든한 지원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윤희의 딸 새봄은 생기발랄하고 영특하다. 천연덕스럽게 윤희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반면, 오롯이 웅크리고 있는 윤희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엄마에게 힘을 준다. <윤희에게>에서 새봄은 단순히 윤희의 조력자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녀는 어찌 보면 흐뭇한 소동극의 주인공이다. 윤희에게 온 쥰의 편지를 접한 후, 새삼 엄마의 과거를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호타루로의 여행을 추진, 결국 오랜 인연을 성사시키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새봄의 독립적이면서 귀여운 오지랖은 자칫 가라앉을 수 있는 극 전반에 활기를 불어넣는 데에 크게 기여한다.


쥰의 동거인이자 고모인 마사코는 카페를 운영하고 SF 소설을 좋아한다. 쥰과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도 때론 따뜻하게 보듬는다. 자신만의 일과 취향을 견지하면서도 위트 있고 무르익은 삶의 태도를 견지한 노년의 그녀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윤희에게>의 인호와 경수

또한 윤희와 이혼했지만, 아직 그녀를 잊지 못하는 전남편 인호(유재명) 역시 인상적이었다. 더 이상 윤희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그녀를 향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다가 끝내 거둘 수밖에 없었던 인호. 사무치게 그리움을 품은 그의 눈빛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뿐만 아니라 새봄과 사귀고 있는 경수(성유빈) 역시 새봄과 비밀스러운 여정을 함께하며  훈훈한 웃음을 제공하는 데에 일조한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제자리인 듯 새봄의 곁에 서있는 그는 충분히 스스로 빛났다.


이처럼 <윤희에게>는 주조연의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자신만의 개성과 매력을 품은 캐릭터들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또한 그들의 앙상블은 훈훈하면서 성숙하다.  배우들의 호연이 더해져 감동과 재미가 배가된 것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관계에 대한 통찰력 있는 시선이 전제된 캐릭터 맞춤형 대사와 미묘한 공기의 흐름까지 잡아낸 상황 연출 역시 뛰어나다. 부조리하고 냉정한 현실을 손쉽게 봉합하지 않으면서도, 온기가 감도는 작품으로 다가왔다.


<윤희에게>의 스틸사진. 윤희는 호타루에서 웃는다.

기대했던 바처럼 <윤희에게>에서 실컷 눈을 볼 수 있다. 영화 속 폭신하게 쌓인 눈을 밟고 만지고 싶다는 마음이 자주 일었다. 이제 눈이 오면 <윤희에게>가 떠오를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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