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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Mar 05. 2023

[리뷰] 카우보이 비밥

제멋대로 굴 거라면 제대로

우주를 누비며 현상금 수배범을 잡는 유쾌한 SF 활극 [카우보이 비밥]


  장르 취향을 많이 타는 사람만큼 까다로운 건 없다. 다행히 SF 장르는 마니아층이 두터워서, 새로이 나오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이 없더라도 과거의 작품만으로도 얼마쯤 연명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SF 장르가 갖는 특성이 SF 고전 명작에 대한 진입 장벽을 높이기도 한다. 20년 전의 사람들이 상상한 2023년의 모습과 실제 2023년에 사는 우리가 경험하는 과학 및 기술 수준의 차이가 크다면, 과거의 명작이 여전한 명작이라 단언할 수 없다. 옛날에는 무지막지한 크기의 벽돌 모양 슈퍼 핸드폰이 기발한 상상이었을지는 몰라도, 핸드폰을 접을 수도 있고 두루마리처럼 돌돌 말 수도 있는 현대 사람들이 보았을 땐 시대착오적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SF 추천작들 사이에서 1998년도 작품인 [카우보이 비밥]을 발견하고 나서 주저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우주선을 타고 현상 수배범을 잡으러 다니는 액션극이라니, 너무나도 취향 저격인 작품인데 화면이나 서사가 올드한 느낌이 든다면 정말 아쉬울 것 같았다.


  그렇게 첫 화를 반신반의하며 틀었는데 순식간에 20분이 증발했다. 인물들이 가진 저마다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수려한 그림체와 부드러운 액션 동작, 그리고 편안한 색감의 화면은, 최근 들어 자주 보이는 양산형 작품들 - 공장에서 뽑아낸 듯 획일화된 그림체와 화려하기만 하고 실속 없는 화면이 뒤엉킨 - 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미래 기술에 대한 상상력 또한 현대에 뒤처지지 않아 앞서 한 걱정도 금세 사그라들었다. 작품이 갖는 SF의 특성이 보다 우주 액션에 집중되어, 과학적 설정이나 신기술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어 그럴지도(다행이다). '카우보이'라는 단어에서 기대한 서부극의 느낌은 크게 찾아볼 수 없었지만 매 화 펼쳐지는 시원시원한 총격전과 근접 액션은 속이 뻥 뚫릴 만큼 근사했다. 중간중간 서사와 어우러지는 비밥만의 다양한 음악 덕분에 가벼움과 묵직함을 넘나드는 감정선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던 것은 덤. 총 26부작이라면 느긋하게 즐길 수 있겠다 싶었는데, 너무 재미있어 순식간에 해치우고 지금에서야 아껴볼 걸 후회 중이다.




  '비밥(bebop)'은 재즈 연주스타일 중 하나로, 복잡한 화음과 멜로디, 그리고 빠른 템포라는 특성을 갖는다. 처음 들을 때는 갈피를 전혀 못 잡지만, 계속해서 듣다 보면 그 예측할 수 없는 화음에 빠져들게 된다. [카우보이 비밥]을 보다 보면 '제목 참 잘 지었다'며 감탄을 하게 되는 이유다. 비밥호에 모이게 된 다섯 명의 주인공은 성격이나 가치관이 전부 달라 전혀 화합할 수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회차가 거듭되며 요란하고 정신없던 동행은 점점 화음을 이루어 간다. 자주 삐걱거리지만 결국엔 매끄러운 하나의 팀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비밥의 유쾌함에 빠져드는 과정은 즐겁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주인공들이 갖는 개성과 매력은 전혀 뭉개지지 않는데, 그래서인지 꼭 살아 있는 세계를 탐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비밥의 세계는 톡톡 튀는 캐릭터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비밥만의 독특한 분위기 덕에 한층 더 매력적이다. 함께 두면 한쪽이 다른 한쪽을 잡아먹을 것만 같은 상반되는 분위기 - 개그와 시리어스 - 를 절묘하게 잘 섞어낸 것을 보면 감탄만 나온다.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과 묵직이 가라앉은 침묵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고유한 역할을 잘 수행해 내니 신기할 수밖에. 어쩌면 비극적이라 할 수 있을 결말도 지루하게 늘어뜨리지 않아 그동안 비축해 둔 웃음만으로도 개운한 작별 인사를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심야의 헤비 록'이 남긴 웃음은 꽤 길게 남아서 끝까지 나를 간질였다.


  [카우보이 비밥]은 2021년 넷플릭스 드라마로 실사화가 되었는데, 해당 작품에 대한 평은 대체로 좋지 않다(안타깝다!). 이유를 찾아보니 캐릭터에 대한 싱크로율 문제와 진부하고 느린 액션씬이 손에 꼽힌다. 원작의  수려한 액션 장면을 여러 번 돌려 보니 실사화에 대한 이와 같은 부정적인 평은 예견된 비극이었을 수밖에 없겠더라. 그만큼 원작의 총격전이나 근접전은 동작이 매끄럽고 우아한 와중에 속도마저 장난 아니라 몰입감이 엄청나다. SF 장르답게 가끔 등장하는 우주 비행 격투씬도 무척 깔끔하다. 절제된 화려함이라고 해야 하나. 오죽하면 작품을 감상하는 도중 단 한 컷의 액션씬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에 의식적으로 눈을 깜박이지 않았을 정도.




  1998년도 작품이기 때문에 당연히 시대착오적인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건 이해한다. 여자 주인공의 난해한 복장이나 가끔 등장하는 성차별적인 발언 등은 시대의 한계라고 생각하자(하지만 동시대에 나온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에선 그런 발언을 찾아볼 수 없긴 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시대의 한계일까, 제작자의 한계일까). 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니까. 특히 하나의 작품에서 '페이'와 '줄리아'라는 캐릭터가 함께 나왔기에 더욱 그렇다. 페이는 냉동수면 기술의 부작용으로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 헤매며 알 수 없는 허무감의 근원을 좇는다. 스스로가 원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능동적으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입체적인 인물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줄리아는 단순히 스파이크의 운명을 결정짓는 수동적 대상으로서만 나타난다.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인 영화 [호빗]에서도 이와 비슷한 안타까움을 접한 적이 있다. 드워프 '킬리'와 엘프 '타우리엘'은 호빗 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 친밀한 관계를 착실히 쌓아간다. 문제는 이런 관계의 발전에 따라 타우리엘의 캐릭터가 평면적으로 변해갔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 등장한 장면에서 엘프족의 전사로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지만, 킬리와의 러브라인이 생기고 나서는 오직 사랑만을 외치는 모습을 보인다. 입체적인 면모를 지닌 하나의 캐릭터에서 '누군가의 연인'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킬리의 결말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재료로 전락한 것이다. 지금껏 그렇게 잡히고 죽고 버려져 온 여성 캐릭터가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 보면 놀랄 것은 없다. 하지만 이제는 '여자와 사랑'이라는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더 넓은 세상을 봐야 하는 시대다.




  깔끔한 결말을 보고 나면 속이 시원해질 줄 알았는데, 질질 끄는 것 없이 너무나 단호하게 끝난 바람에 오히려 여운이 더 깊다. 변해버린 현재의 애니메이션 흐름 속에서 [카우보이 비밥] 2부를 내달라고 하는 것은 좋지 않은 선택이겠지만, 그만큼 아쉬움이 크다는 말씀. 매력적인 캐릭터, 시원시원한 액션, 그리고 환상적인 배경까지 뭐 하나 나무랄 것 없는 완벽한 합주였기에 왜 명작으로 거론되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아직 [카우보이 비밥]을 안 본 SF 덕후가 있다면 당장 앉혀놓고 눈앞에 첫 화를 틀어주고 싶을 정도다.


  지금은 Tank! 노래를 틀어놓고 이 글을 적고 있다. 옛날,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즈음 어느 해의 여름방학에 영화 [스타트랙] 리부트 시리즈를 보고는 푹 빠졌더랬다. 매일같이 침대에 누워 스타트랙의 메인 테마곡을 머릿속으로 재생하며 엔터프라이즈호에 탑승해 우주를 개척하는 나날을 상상하곤 했다. 이제는 내 머릿속에 유쾌한 재즈곡 하나와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목소리가 계속 맴돈다. 한동안은 비밥호에 올라 제트의 고추잡채를 먹거나 드넓은 우주를 휘젓고 다니는 스파이크와 소드피시를 따라다니겠지. 오랜만에 이런 순수한 즐거움을 느낀 것 같아 가능한 만큼 마음껏 즐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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