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파타고니아 8박 9일 서킷 트래킹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걸쳐 있는 광활한 파타고니아 국립공원을 짧게는 3박 4일, 길게는 7박 8일 동안 도는 W 혹은 O 트레킹은 우리 계획의 꽃이었다. 파타고니아 트레킹을 하려면 국립공원 내에 있는 산장이나 캠핑장을 반년 전부터 미리 예약해두어야 하기에, 그만큼 예약에 가장 공을 들이기도 했다. 예약된 숙박증이 없다면 국립공원 내에 입장조차 할 수 없고,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탓에 티켓을 사기도 무척 힘들다. 제대로 된 남미 여행 일정이 정해지지 않았음에도 파타고니아 트래킹 숙박 예약부터 확정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W 트레킹을 하려고 했다. 파타고니아의 아름다운 풍경을 충분히 볼 수 있으면서 짧고 빠른 대중적인 루트라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저것 정보를 찾다가 덜컥 O 트레킹의 존재도 알게 된 후로 큰 고민에 빠졌다. O 트레킹은 국립공원을 원을 그리며 쭉 도는 루트라 최소 7박 8일의 캠핑을 해야 하며 체력적으로도 힘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W 트레킹 루트에서는 볼 수 없는, 거대한 빙하를 포함한 웅장한 규모의 자연 풍경이 아름답다는 후기가 호기심을 끌었다.
전에 트레킹을 해본 적 없고 캠핑도 취사도 경험이 없던 우리는 주변에 조언을 구했다. 우리의 사정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W 트레킹을 권했다. 다들 한국에서 트레킹을 해본 적도 없는데 남미에 가서 몇 박 며칠의 본격적인 트레킹을 하면 실패할 것이 뻔하다며 걱정했다. 어떤 사람은 나와 안면이 없는 사람임에도 전화를 걸어 한 시간 동안 나를 설득했다. 굳이 무리를 해서 O 트레킹을 갈 필요는 없다고, 딸 같아서 걱정이 되어 그런다고 꼬옥 당부했다. 하지만 우리는 대책 없고 무모한 초짜 여행자들이었고, 긴 고민 끝에 O 트레킹을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안전하게 W 트레킹을 가자는 입장이었고, 친구는 대담하게 O 트레킹을 해보자는 입장이었다. 콜롬비아 타강가에서 시간이 남아돌아 O 트레킹 후기를 열심히 찾아볼 때, 8일간의 O 트레킹 기록을 생생히 남겨둔 블로그 하나가 내 이목을 끌었다. 루트와 날씨, 그리고 캠핑장에서의 저녁 등 세세한 이야기까지 전부 적어둔 그 글에는 작성자의 두려움과 당혹감도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길이 좁은데 한쪽은 절벽이라 매 순간 떨어져 죽는 상상을 하며 지나야 했다느니, 다른 사람들보다 속도가 느려 좌절감을 겪었다느니 하는 등의 글은 내 용기를 갉아먹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친구는 완고한 입장이었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면서도 이왕이면 더 멋진 풍경을 보는 게 좋지 않냐며 파이팅을 외치던 친구를 보니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캠핑하는 법은 배우면 되고, 밥도 어찌어찌 만들어 먹으면 될 거고, 걷다가 힘이 들면 천천히 쉬었다 가면 된다. 다행히 남미 여행을 이어가며 조금씩 길러온 체력과 자신감 덕에 잃어버렸던 용기도 얼마쯤 되찾았다. 예정된 12월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두려움은 어느 정도 털어낼 수 있었다. 점점 자연이 그려낸 길과 숲내음을 빨리 만나고 싶은 기대감이 몽글몽글 부풀었다.
칠레의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저렴한 트레킹 스틱과 버너, 그리고 가스를 챙겨 오전 일찍 버스를 타고 파타고니아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국립공원 웰컴센터에는 우리처럼 기대 반 걱정 반 첫출발을 떠나는 사람도, 트레킹을 완주하고 휴식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심각한 길치였지만 길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방향을 모르면 함께 걷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서 함께 나아갔다. 날씨는 청명했고 완만한 오르막은 걸을 만했다. 어느 순간 우리는 함께 출발한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제일 앞서 걷고 있었다.
아쉽게도 둘째 날은 날이 좋지 않았다. 내내 얇은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려 방수 바람막이를 입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진흙밭을 걸어야 했다. 바지는 흙탕물로 지저분해졌고 앞은 구름이 자욱해 산등성이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겨우 도착한 캠핑장에서 맥주를 한 병씩 사 먹고 떨어진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바로 누웠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짐을 정리하고 아침 먹을 준비를 하는데, 어제는 본 적 없던 파아란 하늘 아래 쭉 펼쳐진 설산이 보였다. 날이 확 개니 캠핑장 풍경이 어제와는 너무 달라 놀랐다. 한순간 꿈을 꾸나 생각까지 들 정도로 180도 다른 화사한 풍경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빙하까지 올라가야 했던 셋째 날이었다. 그레이 빙하로 향하는 길은 계속되는 오르막인데, 오르막이 깔끔한 길이 아니라 돌무더기로 뒤덮인 야생의 산 그 자체라 스틱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며칠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걸으며 내심 정이 든 외국인 친구들과 서로를 응원하며 열심히 올랐다. 녹색 벌판이 끝나고 눈이 얕게 내린 돌산을 올라 정상에 섰을 때, 그 앞에 보이는 건 엄청난 규모의 푸른색 빙하였다. 그날은 장장 9시간을 걸어야 했던 고된 날이었지만, 빙하의 풍경을 눈에 담은 채로 걸어 내려가니 기운이 펄펄 솟았다.
결국 우리는 8박 9일 동안의 파타고니아의 서킷 트래킹을 성공적으로 완주했다. 라이터 없이 버너만 믿고 시작했는데 버너가 고장 나 매번 주변 사람들한테 성냥을 빌리다가 그들과 친해져서 음식을 나눠먹기도 했다. 고된 산행을 마치고 도착한 캠핑장에서 맥주 한 병으로 피로를 풀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난 뒤의 행복감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중간에 야생여우가 우리의 유일한 점심인 식빵을 훔쳐간 덕에 마지막 3일은 점심을 쫄쫄 굶으며 걸어야 했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파타고니아의 아름다운 풍경 덕에 눈만은 굶주릴 틈이 없었다.
만약 겁을 집어먹은 채로 O 트레킹 대신 W 트레킹을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O 트레킹을 무사히 끝내고 난 뒤 생각해 보니 아찔했다. 순간의 주저로 인해 평생을 추억해도 좋을 멋진 대자연의 풍경을 전부 놓치게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만큼 O 트레킹을 돌면서 만난 파타고니아의 얼굴은 이제껏 본 적 없고, 어디서 또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대단한 그림이었다. 트레킹을 하던 여덟 밤 동안 나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무모한 도전을 말리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때로는 객관적인 시선이 맞을 때도 있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아서 후회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과감히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지 못한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도, 잊지 못할 기억을 만들어갈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앞으로 살아가며 나를 든든히 뒤받쳐 줄 자신감이라는 친구가 생겼다는 점이다. 안될 것만 같은 것을 해냈다는 건 앞으로 무엇이든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