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즐겁꾼 Oct 25. 2023

아찔한 하원길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어쩌면 인생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운전에 반영된 것 같기도 하다. 뭐 운전 하나 가지고 이렇게 진지해질 일이냐만은, 허구한 날 운전에서 도망치려는 내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무언가를 얻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해 본 적이 과연 언제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간 시간이 흐르면 운전을 잘하게 되겠지’라며 막연한 미래에 희망을 품고 있는 나의 게으름과, 노력 없이 안일하게 무언가를 얻으려 하는 나의 옹졸함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접촉 사고의 트라우마가 깊어서 그렇다며 핑계를 대고 변명하는 것도 어쩐지 지겹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아빠의 직장 어린이집에 입소하면서 나는 반 강제적으로 운전대를 다시 잡게 됐다. 아빠가 육아 시간을 사용해서 어린이집 등, 하원을 담당하기로는 했지만, 어린이집 입소와 동시에 아빠 역시 부서 이동을 하게 되면서 두 남자의 적응기간 동안은 내가 아이를 하원시켜 집으로 데리고 와야 했다.


최소 2주, 만약 어린이집 적응 기간이 길어진다면 3개월까지 매일 운전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집에서 어린이집까지는 편도 약 8~9km 정도의 거리고, 고작 30분 정도의 시간이면 갈 수 있다. 게다가 거의 직진만 하면 되는 어렵지 않은 길이라 할만하다는 생각이 든 반면, 초보운전인 내가 앞으로 도로에서 저지를 변수들은 나 조차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걱정이 됐다. 그래서 첫 등원을 앞두고 미리 주행 연습도 해뒀다.




등원 첫 주차에는 1시간~3시간 정도 어린이집 앞에서 아이를 기다렸다가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나마 차가 많이 없는 시간대라 운전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심지어 아이는 2주도 채 안 되는 기간 안에 어린이집 적응을 끝내준 덕분에 엄마의 운전도 대폭 감소시켜 줬다.


무사히 귀가하면 인증샷을 남겼다


적응기간이 끝난 뒤에도 남편의 업무가 많은 날이나 야근, 회식 등이 있는 날이면 내가 아이를 데리러 갔다. 같은 길을 반복적으로 여러 번 다니다 보니 아이를 하원시키는 길만큼은 익숙한 길이 됐다. 네비를 보지 않고도 어느 구간에 차가 많은지, 과속 카메라가 어떤 지점에 있는지도 파악하게 되니 운전이 편해졌다. 적어도 사고가 날까 봐 과도하게 불안에 떠는 습관은 없앨 수 있었다. ‘일단 출발하면 어떻게든 집까지 도착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만으로 나에게는 충분히 고무적인 결과였다.


그런데 생각하지 못했던 복병은 도로가 아닌 주차장에 있었다. 어린이집 건물 주차장은 이중 주차가 되어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차들 때문에 식은땀을 흘린 날들이 더러 있었다. 출구로 나가려다가 이중주차된 차와 차 사이에 애매하게 껴버린 날에는 D와 R을 수십 번 반복 조작하고, 차 대가리(?)가 다른 차에 닿았나 안 닿았나 내려서 반복적으로 확인하다가 겨우 주차장을 빠져나오기도 했다.


그때, 주차장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물음표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길래 사실 그 아저씨한테 도와달라고 할까 생각도 했지만 어쩐지 창피해서 말을 못 걸었다. 결국은 내 힘으로 주차장을 빠져나온 그날은 내 운전 포트폴리오에 기록해도 될 만큼 좋은 운전 경험이 됐다. 차폭감은 직접 내려서 확인하는 게 직빵이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내 차 바로 앞에 주차해 둔 차를 밀어 보기도 했는데, 그게 뭐라고 왠지 능숙한 운전자가 된 것만 같아서 뿌듯했다. 또 어떤 날은 이중주차가 된 차 사이를 빠져나오던 중에 아이의 같은 반 친구 아버님을 우연히 만났다. (나는 또 내려서 차 간격을 확인 중이었다…) 차 앞을 직접 봐주겠다고 해주신 덕분에 무사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날도 있었다. 그날 아이 친구 아버님이 마치 구세주로 보였다.


살살 밀었는데 의외로 차가 잘 밀렸다


엄마가 주차장에서 고철덩어리와 낑낑거리며 사투를 벌이는 동안, 다행히도 그리고 고맙게도 아이는 얌전히 잘 기다려줬다. 아마 엄마가 운전이 서툴다는 것을 눈치껏 대충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주차장의 다른 차들을 긁을까 봐 간담이 서늘해지는 경험을 몇 차례 하고는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에게 차를 예쁜 곳에 잘 대두라며 신신당부를 하기도 했다.




요즘도 가끔 아이를 하원시키러 가는데, 이제는 차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차도 밀어보고, 전진 후진 반복하며 낑낑거리기도 하고, 정 안 되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지 뭐‘하는 뻔뻔함도 살짝 생겼다.


하원 후 놀이터에서 놀다 가자는 아이의 요구에 응해주다 보면 퇴근 시간대에 걸리기도 하는데, 러시아워 속에서 차선을 휙휙 바꾸는 차들 때문에 긴장을 바짝 하기도 한다. 그래도 괜찮다. 서두르지 않고 내 속도대로 천천히 가다 보면 어쨌든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


너와 나의 하원길, 운전에 집중하는 동안 아이의 조잘거리는 수다에 응해주지 못하기도 하고, 심지어 아이에게 잠깐 조용히 좀 해달라고 부탁할 때도 있다. 그래도 너를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가겠다는 필사적인 엄마의 마음 하나만 알아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운전은 결국 나를 믿는 힘으로부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