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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겁꾼 Jun 28. 2023

운전은 결국 나를 믿는 힘으로부터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린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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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skgus5130/50


사고가 난 뒤로는 한동안 차를 몰지 않았다. 급한 볼 일을 보러 가기 위해 차를 한 번 끌고 나갔다가 집 앞 골목길에서 맞은편 차와 대치했던 날이 있었다. 맞은편 차에 타고 있던 아저씨는 어버버 하며 R과 D를 반복하던 나를 보더니 윽박을 질렀고, 나도 그만 화가 나서(?) 그 아저씨에게 화내지 마시라고 소리를 질렀다. 운전 못 하는 게 그렇게 잘못한 일이냐는 말이다.


접촉 사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했던 그 소소한 사건은 그나마 남아있던 운전에 대한 자신감을 몽땅 앗아가 버렸다. 안 그래도 쭈굴쭈굴했던 나는 한 겹 더 쪼그라들어서 이대로라면 공기 중으로 증발해 버릴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록 내 잘못으로 일어난 사고였다고 한들, 그날의 사고 이후 트라우마 속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운전하는 게 무서웠고, 다른 운전자들도 무서웠다. 이참에 운전에서 손을 떼면 간단히 끝날 일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운전은 계속하고 싶었다. 아이를 데리고 외출할 때 자차를 가지고 돌아다니는 것의 편리함을 알아버린 이상 여기서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차를 가지고 나갈 일이 생기면 머릿속으로 먼저 상상을 시작한다. 주차장 출구로 나가는 길 연석에 차가 닿아버리면 어떡하지? 좁은 집 앞 도로를 지나가다가 길가에 주차된 차를 긁어버리면 어떡하지? 차선 바꾸다가 달려오는 차랑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주차를 못 하면 어떡하지? 단 몇 분만에 내 머릿속에서 수십 건의 교통사고를 창조해 내는 걸 보니 어쩌면 한문철 아저씨 동영상을 너무 많이 본 부작용일지도 모르겠다.


사고 이후, 일어나지 않은 일을 벌써부터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습관이 됐고 관성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운전을 할 일이 생기면 가능한 한 피했다. 마치 그것은 나에게 언젠가 일어날 사고를 무기한으로 연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도로에 다니는 차들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저들은 무슨 마음으로 운전하는 건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다들 이렇게 나처럼 사고의 위험 속에서 불안해하며 운전하는 걸까? 어느 날은 조수석에 앉아서 남편이 운전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차선 바꾸는 거 안 무서워?"라고 물어보자, “지금 나한테 운전하는 게 무섭냐고 물어보는 거야? “라는 답변이 돌아와서 내 질문이 굉장히 터무니없고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다들 운전하다 보면 한 번쯤은 접촉사고를 겪는다고들 하지 않나. 근데 그 이후에 다들 어떻게 마음을 추스르는지 알고 싶었다. ‘저도 초보일 때 많이 긁어먹었지만 지금은 베스트 드라이버가 됐답니다~’ 하는 후기는 참 많았는데, 그러니까 많이 긁어먹은 뒤로는 어떻게 마음을 극복하셨는지 안 알려주시더라는 말이다. 교통사고가 나더라도 사람만 안 다치면 되는 거라고들 한다. 근데 다쳐버린 마음은 어떻게 치료하는 건지 모르겠다.




누군가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의 첫 시작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가진 트라우마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교통사고로 인해 입을 신체적 피해? 아니면 교통사고로 인해 올라가는 보험료? 운전을 못 한다는 주변의 비난? 두려움을 몇 가지 나열해 보니 어쩌면 이건 트라우마라기보다 트라우마에서 파생된 두려움에 대한 불분명한 집착에 더 가까운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나는 평소에도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걱정이 많은 성격인데, 그런 내 성향이 운전에 반영됐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면서 사는 걸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한테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싫은 소리를 못 하는 성격 탓에 사고를 일으킨 것에 대한 죄책감을 쓸데없이 더 크게 가지며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어떤 날은 평소 자주 다니던 길도 괜한 사고를 염려하기 시작했다. “이 길은 그동안 운전 잘 해왔잖아?"라고 나의 염려에게 반론을 하면, ”아니, 이번엔 잘 못할 수도 있잖아"라는 마음의 대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아, 이 모든 것의 총체적인 문제는 내가 나 자신을 충분히 믿어주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뭐든 도전하기 좋아했던 나는 겁도 없이 찬란했던 20대를 보냈다. 결혼을 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를 하면서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어버린 지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려움에 짓눌린 채 자신감이 결여된 인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운전 실력을 채근할 때가 아니다. 물론 운전을 잘하려면 수려하고 섬세한 운전 기술이 필요하겠지만, 잘하고 있다고 나를 믿어주는 힘이 더 필요할 수도 있겠다.


운전에 대한 걱정과 불안은 더 조심해서 안전 운전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반증이 될 테니, 용기를 내서 한걸음 더 나아가보기로 하자. 그러다가 만약 또 사고가 난다면? 보험료가 오르는 건 너무 슬프지만, 나는 그 사고로 인해 또 무엇인가 배울 것이기 때문에 사고를 실패라고 여기지 말고, 너무 두려워하지만 말자.


그렇게 또 운전대를 잡을 나를 다독이기 위해 몇 번이나 적었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브런치에 나를 위한 글을 하나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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