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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Dev Dec 31. 2019

나는 왜/어떻게 개발을 시작했는가

1편. 문돌이가 이과로 변절한 이야기

주의: 문과 시절 겪었던 경험과 의견은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으로 글쓴이 본인에게만 해당한다는 점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이천이십 년이 되면 A 년 차 개발자가 된다.

    201D 년 X월 개발팀에 첫 출근을 했다. 해가 A번이 바뀌고서야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오래전부터 개발을 시작한 이후에 겪었던 이야기와 생각들을 시간 순서대로 글로 옮기고 싶었다. 이 글이 그 첫 이야기이다.


이십 대의 전부를 공부하는 학생으로 살았다.

    대학교 4년, 군대 2년, 해외 워킹홀리데이 1년, 해외 교환학생 1년, 서울 취업스터디 6개월(+제2외국어 공부), 대학원 2년 그리고 대학원 졸업 후 구직 활동 6개월이 그 시간들이었다. 모든 시간들을 공부에 전력투구하진 않았지만 꾸준히 '공부할 주제/목표'들이 있었다. 그중 70%는 개발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경험들이다. 학부 전공도 상경 계열이었다.

 

본래 상경 계열로 취업 준비를 했다.

    영어와 제2외국어 공부, 해외 활동, 경제학 공부 등 대학원 입학 전까지 했던 공부들의 목적도 '상사에서 일하기'이었다. 대학교 4학년 때 졸업을 앞두고 정말 많은 자소서를 썼다. 해외영업에 지원하고 싶었지만 현실과 타협하고 '신입 공채'가 뜨면 채용인원이 '00명'인 직무로 자소서를 써 갈겼다. 당시에 자소서를 제출하면 회사 이름과 직무를 포스트잇에 적어서 방에 있는 왼쪽 창문에 붙여두었다. 그리고 탈락하면 'X'를 쳐서 오른쪽 창문으로 옮겨 붙였다. 왼쪽 창문과 오른쪽 창문 모두 빼곡해지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소설을 썼다. 상반기 공채가 마무리될 즈음에는 오른쪽 창문만 빼곡했다. 모 통신사에 제출한 서류 하나가 합격해서 최종면접까지 가긴 했다.


도무지 '복기'가 안됐다.

    탈락한 자소서를 보면 복기가 안됐다. 탈락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탈락이라는 결과만 있었고 그걸 받아들이기만 할 뿐이었다. 복기를 하려면 흑백의 바둑돌이 있어야 하는데 자소서에는 상대(회사)의 흑돌만 있는 느낌이었다. '신의 한 수:귀수편'에 나온 '일색(一色) 바둑'이 떠오른다. 내가 둔 수(手)는 보이지 않으니 개선할 여지조차 없었다. 본인조차 공감할 수 없는 자소설은 의미 없이 쌓여만 갈 뿐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문돌이 시절과 컴돌이 시절을 비교하는 글을 써봐야겠다.

복기(復碁)
한 번 두고 난 바둑의 판국을 비평하기 위하여 다시 처음부터 놓았던 그 순서대로 놓아 보는 일
출처:네이버 한자사전


개발은 '수(手)가 보이는 바둑판'이었다.

    개발 관련 채용공고를 보면 명시된 직무역량이 명확했다. '자바', '씨쁠쁠'과 같은 구체적인 기술 목록이 그랬다. 직무역량과 관련된 경험을 녹여서 긴 이야기로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문돌이 시절에는 직무역량 조차 불명확했다. 뭘 자꾸 자소서에 녹여내라는 건지... 가슴이 먹먹했다. 자바를 요구하면 자바를 하면 됐고 씨쁠쁠을 요구하면 씨쁠쁠을 하면 그만이었다. 직무역량이 맞는지 틀린 지 고민하며 골머리를 썩지 않았다. 개발자 채용공고를 보면 복기가 됐다.

  

나는 기술자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군대를 전역할 즈음에 스마트폰 열풍이 불었다. 어플 만드는 게 유행이었던 시절이다. 나도 머릿속으로는 어플로 만들고 싶은 아이디어들이 많았다. 하지만 기술이 없었다. 컴퓨터를 전공하는 친구와 함께 해보고자 했지만 나만 신난 탓에 진행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때  "기술 없는 아이디어는 허구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가 건네준 '열혈강의 c언어'를 방학 내내 공부했다. 두 번째 책으로 친구가 자료구조 책을 건네줬다. 컴퓨터 공부는 거기까지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료구조가 내 흥을 사라지게 했다.


나는 개발자 뽕에 취해버렸다.

    문돌이 시절 '글로벌 인재'로 거듭나겠다는 뽕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사그라들던 4학년 2학기. 대학원 연구실에 다니는 친구의 생활이 재밌어 보였다. 연구실에서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모바일 어플이 생각났다. '안드로이드 스튜디오'를 깔아서 '헬로월드'를 찍어봤다. 개발자 뽕에 완전히 취해버렸다. 그때부터 수업이 끝나면 자소서가 아니라 코드를 작성했다.


문과 시절 최종까지 갔던 면접이 '하나' 있었다.

    '사즉생(死卽生)'이라 했던가. 모 통신사 최종면접까지 갔다. 토론 면접에서 조용히 듣고만 나왔다. 발표할 기회도 다른 조원에게 양보했다. 면접이 끝나고 면접관으로 왔던 사람들과 편하게 질의응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현직자들의 경험을 듣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남부럽지 않은 훌륭한 직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직장만을 원했던 건 아니었다.  문돌이 시절에 대기업 최종 한번 가봤으니 뿌듯했다(응~ 탈락).


면접 결과 메일을 찾아보니 지금도 보관이 돼있었다.


나는 개발자가 되고 싶었다.

    친구에게 대학원 연구실을 소개받았다. 어머니에게도 대학원을 가겠다고 했다. 넥타이보다 청바지 입고 살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여름부터 연구실에 나가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할 시간과 생활비를 벌 수 있었다(연구실 월급 1A0 만원). 학위까지 받으니 컴공생으로 신분세탁까지 일석이조였다. 같은 해 가을에 대학원에 입학했다.


문돌이 시절 취업을 준비하며 겪었던 경험과 느꼈던 점은 글쓴이 본인에게만 해당되는 개인적 감상이라는 점을 못 박고 싶다. 주변에 뛰어난 문과 출신 지인들은 본인과 달리 대기업에 취업도 잘하고 능력도 인정받으며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 상경계열로 대기업에 취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에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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