펫 로스(Pet loss), 강아지를 보내고 난 후
2년 전, 우리 집 막내 강아지동생 애정이가 하루아침에 다리를 덜덜 떨며 걷기 힘들어하더니 바로 며칠 후, 몸에 마비가 와서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MRI를 두 차례나 찍어도 정확한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척추이상으로 인한 ‘신경절마비’라고 추정만 할 뿐이었다. 겨우 침도 맞고, 이런저런 방법을 써 가며 함께 투쟁한 끝에 조금씩 기적처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후로 2년 동안 스테로이드를 먹으면서 애정이의 몸은 조금씩 좋아지는 동시에 약 부작용으로 인해 조금씩 망가져갔다. 애정이가 다시 걷기 시작하고, 약은 매일 먹어야 했지만 산책도 가능하게 되면서 상태가 조금 안정화되었다. 그즈음 나는 다시 독립을 강행했다. 이기적 이게도 나 혼자만의 공간이 너무 간절했고, 부모님과의 적절한 물리적 거리 두기도 필요하다고 느꼈다. 집에서 자전거를 타면 10-15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에서 재독립을 시작했다.
애정이를 보러 자주 오겠다던 나의 다짐은 핑계를 대자면 현생에 치여,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혼자만의 시간이주는 따뜻함에 취해 많으면 일주일에 두 번, 대부분의 경우 일주일에 한 번씩 짧은 시간 애정이를 보러 가고 산책을 시켜주러 가는 게 전부였다. 다른가족들이 잘 보살펴주고 있다는 안도감이었다. 그동안 애정이의 상태는 일주일이 다르게 나빠졌다. 약 부작용으로 배 근육이 사라지면서 둥근 배는 쳐지고, 다리 근육에도 힘이 없어지면서 다시 걷는 게 힘들어졌다. 목줄이 아닌 몸에 밴드를 착용하여 겨우 대소변을 해결하고 들어와야 했다. 그 마저도 항문에까지 염증이 생겨서 대변도 힘겨웠고, 여기저기 지방의 괴사가 일어났다. 그러다 지난 주말, 애정이의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볼 때마다 안 좋아지고야 있었지만, 이번 주말은 조금 달랐다. 그래도 밥은 잘 먹고, 안고 나가서 밴드로 부축을 해주면 더듬더듬 걸으며 용변을 보고 들어오고, 저녁에 잠은 잘 자던 애정이었다. 그런데 지난 주말부터 갑자기 목 주변까지 염증이 올라오더니 목이 부어올라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토요일, 일요일 모두 약속이 있던 터라 일단 시간을 쪼개어 약속 전에 애정이를 돌보다가 다른 가족구성원과 바통터치 후 약속 후에 다시 집으로 와서 애정이와 잠을 잤다. 애정이는 밤새 뒤척였다. 졸린지 바로 고개를 떨구다가도 3초 후면 호흡이 곤란한지 다시 고개를 들어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주말 내내 물은 먹지도 않고 있었고, 이제는 부드러운 치료식을 입에 가져 다 대주어도 고개를 돌렸다.
월요일아침, 이제 혼자 서있지도 못하는 애정이를 휠체어에 앉혀놓고 화장실에서 문을 열어놓고 가끔씩 눈을 마주치며 씻고 준비를 하였다. 건강할 때는 종종 내가 준비할 때 화장실 앞에 와있던 애정이었다. 그렇게 출근을 하였다. 애정이의 상태가 점점 더 안 좋아지면서 이미 가족들 사이에서 안락사 이야기가 나왔던 터였다. 그동안 애정이를 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되어있던 나는 한사코 반대하였다. 아직 애정이는 살고 싶을 거라고. 우리가 먼저 포기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지난 주말 숨쉬기도, 자는 것도 힘들어하는 애정이를 보면서 그 생각이 나의 집착과 욕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조차도 가능하다면 생을 마감할 때쯤 안락사를 시행하고 싶은 사람인데 왜 애정이는 살고 싶어 하지 않을까라고 계속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애정이에 대한 나의 집착인지, 삶에 대한 나의 집착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일주일만 더 지켜보자고 대화를 한 상태였는데, 그것 또한 다가오는 주말을 기다리는 나의 욕심이었다. 출근해서 일을 하는데 가족들에게서 계속 연락이 왔다. 애정이가 너무 힘들어한다고.
이제는 나의 욕심을 버리고 애정이를 보내줘야 했다. 그렇게 급하게 조퇴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택시를 잡는데 집으로 바로 가는 버스가 도착해서 버스를 탔다. 그렇게 애정이를 마지막으로 보러 간다고 생각하니 버스에서부터 눈물이 줄줄 흘렀다. 중간에 애가 타서 내려서 다시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니 기사님이 물었다. “슬픈 일이 있나 봐요.” 힘겹게 대답을 했다. “강아지가 아파서요..” 돌아오는 대답은 “강아지는 그냥 짐승인데, 그걸 가지고 왜 울어요?”였다. 순간적으로 어이도 없고 화도 났지만 지금 내 앞의 이 사람을 상대할 기운도 없었고, 이 사람에게는 나의 기분을 더 상하게 할 영향력도 없었다. 그냥 무시 한채 집으로 달려갔다. 밖에는 작은 언니와 애정이가 나와있었다. 걷지도 못하고 밴드에 매달려있는 애정이를 보자마자 또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가서 미리 와있던 큰언니, 형부, 조카와 다 함께 앉았다. 작은언니가 조카에게 말했다. “애정이 이제 다시 못 보니까 인사해.” 조카가 물었다. “애정이 하늘나라 가는 거야?” 그 말에 큰언니도 눈물을 터트렸고, 조카는 “엄마 왜 울어? 왜 슬퍼?”라고 계속해서 질문을 했다. 엄마가 대답이 없자 조카는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잘 들리지 않는 애정이의 귀에 조용히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잠시 시간을 갖고, 아빠와 언니들과 병원에 갔다. 가는 동안 창문을 열고 바깥바람을 쐬어주었다. 그동안 차로 놀러 간 것보다 병원을 가는 일이 더 많은 게 다시 한번 미안했다. 그런데 마지막도 병원이라니. 병원에 도착하니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는 애정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웃으며 헤어지고 싶었지만 계속 눈물이 흘렀다.
“애정아, 그동안 고생했어.”
“언니들이 사랑해.”
그리고 애정이의 다 말라서 뼈밖에 없는 다리혈관으로 약물이 투약되었고, 채 2초도 되지 않고 애정이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애정이의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았다. 힘겹게 뛰는 애정이의 심장을 만져본 것이 오늘 아침이었는데. 애정이를 눕혔지만 손베개를 해주었다. 원래 팔이며, 다리 위에 머리를 올리는 것을 좋아하는 애정이었다. 내심 끝까지 이게 맞는 걸까 하는 죄책감이 있었는데,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선생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셨다.“존엄사라는 게, 말 그대로 존엄한 죽음을 의미하는 거잖아요. 더 이상 치료의 의미가 없을 때 고통 없이 죽는 거.. 사실은 보호자님들도 애정이도 정말 오래 버틴다고 생각했어요. 워낙 상태가 안 좋았고, 독한 약을 오래 썼기 때문에… 보호자님들 충분히 하신 것 알고 있으니 혹시나 죄책감 갖지 않으셔도 돼요.”
10분을 기다린 후, 애정이의 심장이 더 이상 다시 뛰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2년 전에 사놓은 수의와, 간단한 짐을 챙겨 바로 시골집으로 이동했다. 시골집 앞마당에 애정이를 묻어주기로 가족들과 이야기가 되어있었다. 시골집으로 가면서도 중간중간 계속 눈물이 났다. 그렇게 시골집도착. 이미 어두워 불빛도 없는 곳에서 한 사람은 플래시를 비추고 나머지 사람들이 번갈아가면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13kg, 80cm의 풍채를 지녔던 애정이. 꽤나 넓게, 꽤나 깊게 땅을 파야했다. 나는 “이거 완전 사이렌 우물파기 게임 같다.” 하며 시답지 않은 농담도 던졌다. 주말에 비가 미친 듯이 오더니 땅을 팔 때 비가 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비 대신에 땀이 비 오듯이 떨어졌다. 중간중간 맥주 한 캔도 마시며 삽질을 계속했다. 1미터쯤 땅을 파고난 후, 이제 됐다 싶어 곱게 수의를 입힌 애정이를 데려와서 가장 좋아하던 장난감과 함께 묻어주었다. 머리를 동쪽으로 가게 가지런히 눕힌 후 삽에 흙을 퍼서 조금씩 덮어주었다. 애정이가 눈앞에서 조금씩 없어지면서 다시 눈물이 나왔다. 그렇게 애정이는 밤나무옆에 가지런히 묻혔다. 애정이를 땅과 가슴에 동시에 묻고, 시골집 안으로 들어왔다. 밤이 늦도록 저녁도 다들 못 먹고 삽질을 한터였다. 라면을 끓여서 캔맥주와 같이 먹었다. 맥주 한 캔을 하면서 가족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잠자리를 폈다. 잠들기 전, 애정이가 꿈에 나와서 마음껏 뛰어놀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아프고 난 후 스스로 발걸음도 잘 못 떼던 아이였다.
다음날,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뚫고 서울로 올라왔다. 어제 이만큼 비가 안온게 정말 다행이었다. 하늘이 애정이를 잘 받아주시려고 도와주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서울로 돌아와 부모님 댁에 도착하니 집이 허전하고 깨끗했다. 밤사이 엄마가 애정이의 쿠션, 밥그릇 등 모든 물품을 싹 치워놓았다. 그러고 나니 실감이 났다.
'아, 이제 나한테는 강아지가 없구나.'
지난 10년 동안 한결같이 집으로 들어가면 뛰어나오던 애정이었다. 현관문소리만 들리면 어느새 문 앞에 먼저 나와서 반겨주던 애정이었다. 투병 후 1년 동안 상태가 조금 괜찮았을 때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기어코 힘겹게 나오던 애정이었다. 혼자 일어서기가 힘들었을 때도 내가 다가가면 제 자리에서 꼬리를 흔들던 애정이었다. 최근에는 귀 마저 안 좋아져서 다가가서 얼굴을 쓰담듬어야 내가 온걸 눈치채던 애정이었다. 지난 12년, 한결같던 애정이가 이제는 더 이상 항상 있던 곳에 없었다.
그 와중에 엄마가 싸준 쌀, 야채, 기름을 이것저것 얻어서 챙기고 드디어 며칠 만에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주말 동안 일어나면 애정이에게 가고, 약속 후 다시 애정이와 같이 자려고 부모님 댁에 머물면서 빨래는 밀려있고, 바닥에는 먼지도 쌓여있었다. 빨래를 돌리고, 청소기를 돌리고 가만히 앉았다. 늦게 출근하기로 이야기가 되어있었기에 아직 출근하려면 한참이나 시간이 남았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평소라면 이것저것 책도 보고, 공부도 하고, 할 것 투성이었는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핸드폰을 켜서 애정이 사진을 보다가 뛰어노는 모습에 다시 눈물이 흘렀다.
애정이를 묻고 라면을 먹으며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하고, 또 부모님 댁에 와서 아무렇지 않게 옥수수를 삶고 언니와 '옥최몇'(옥수수최대 몇 개) 농담도 주고받았다. 너무 빨리 일상에 적응하는 게 아닐까 무섭기도 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서 무기력이 찾아오니, 그 무기력이 두려우면서도 반갑기까지 했다. 퇴근하고도 운동도 하고 싶지 않아 집으로 곧바로 돌아갔다. 자려고 침대에 누우니 다시 불안감과 우울감이 나를 방문했다. 피하고 싶었지만 맞이하고, 소리 내서 한참을 울고 나니 후련해져서 잠이 잘 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렇지 않게 아침밥을 먹고, 점심을 해 먹고 출근준비를 하다가 다시 눈물이 터졌다. 아직은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충분히 애도의 시간을 겪고 나아갈지. 아마도 잘 웃다가도 애정이가 생각나서 혼자 울게 되는 날은 앞으로 계속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은 글을 쓰면서 오늘을 극복해 본다. 우리 집에는 이제 강아지가 없구나. 그래도 우리에게는 서로 애정이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