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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정 Aug 04. 2023

여름휴가를 보내는 우리의 자세

일상으로 돌아올 준비, 되셨나요?

바야흐로 여름 휴가철이다. 자주 가던 야채가게도 여름휴가로 문을 닫았고, 내가 다니는 복싱장도 다음 주면 여름 휴관을 한다고 한다. 지난주, 나도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여름휴가는 한여름 더위를 ‘식히고’, ‘쉬라고’ 있을 터이지만, 주어지는 여름휴가가 아니면 떠나기 힘든 K-직장인인 나도 더위를 피하기보다는 직장을 피해 휴가를 다녀왔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뀌었다지만, 그중 하나는 아마 여행에 대한 생각일 것 이다.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마치 규칙처럼 여름휴가마다 해외로 나가기 바빴다. 하지만 코로나 동안 타의 반, 자의 반 국외로의 여행은 꿈꾸지 못했고, 덕분에 국내여행의 매력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이번 여름도 꼭 해외로 나가려던 건 아니었다. 그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울릉도나 가볼까 하던 차에 친구의 ‘필리핀에 오시면 제가 있어요~’ 한 마디에 바로 비행기 표를 결제하였다. 그렇게 필리핀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한국산 고구마 두 봉지를 싸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필리핀에서 만난 플루메리아 꽃


지난달, 12년 동안 함께한 강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난 후 약간은 무기력해있었다. 밥해 먹기도 귀찮아 배달음식을 시키고, 대충 정크푸드로 때우는 날이 많았다. 밤이면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해 기본 한두 시간씩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잠에 들고 했고, 자연스럽게 다음날엔 늦잠을 잤다. 일어나서도 딱히 하는 것 없이 뭔가를 능동적으로 할 에너지가 채워지지 않아 오디오북으로 소설책을 들었다. 내 힘으로 책을 읽는 것도 귀찮게 느껴졌다. 당연히 여행 준비도 제대로 했을 리 없다. 비행기, 숙소만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친구가 정리된 여행 일정을 공유해 줬지만, 그것조차 읽지 않다가 여행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결국 환전도 못해서 공항 환전을 신청해놓았고, 여행 전 날까지도 내가 몇 시에 공항에 도착해야 하는지 생각도 않고 있다가 겨우 공항버스 편을 알아보았다. 그렇게 얼렁뚱땅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필리핀에 도착했다. 


마닐라공항에 도착하니 아이패드에 ‘Welcome to Manila’라고 적힌 아이패드를 든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비건 식당이었고, 차를 주차하고 가는 길에 어디서 많이 보던 꽃이 떨어져 있었다. “어, 이거! 나 훌라할 때 머리에 꼽는 꽃인데!” 하고 나무를 올려다보니 플루메리아 꽃이 나무에 여기저기 피어있었다. “와 이거 진짜 예쁘다..완전 머리핀 모양이랑 똑같아..” 말하고 보니 웃음이 터졌다. 이 꽃이 머리핀 모양이랑 똑같은 게 아니고, 머리핀이 꽃 모양과 똑같은 것인데..이거 마치 밖에서 사 먹는 밥 먹으면서 ‘집밥 같다~’ 라고, 집밥 먹으면서 ‘밖에서 사 먹는 밥 같다~’라고 칭찬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친구의 반응이 더 새로웠다. 그동안 필리핀에서 플루메리아 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항상 지나치곤 했는데, 이렇게는 처음 본다고. 우리나라 신호등과 달리 파란불일 때 사람 모양이 움직이는 걸 보고 신기해서 동영상을 찍는 나를 보고도 같은 말을 했다. 이걸 다르다고 생각해본적이 없다고, 본인도 새롭다고 하였다. 이게 바로 여행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같은 것도 다르게 보는 순간을 갖게 되는 것. 낯선 환경에 놓아진 우리에게 아이의 눈으로 모든 것을 신기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 물론 굳이 여행을 가지 않아도  충분히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 같은 길을 걸어도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고, 익숙한 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능력이 여행지에서는 쉽게 얻어지는 것만 같다. 우리가 같은 ‘눈송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모든 지리적, 환경적 특색에 따라 다르다고 하니 말이다.


Tagaytay 전경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마음을 비우고 한 여행이었다. 떠나기 전날 체크한 일기예보에서는 필리핀에 있는 내내 비 소식이 있었다. 이미 마음을 먹어서인지, 내가 조금 더 날씨에 관대한 사람이 된 것 인지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괜찮고, 그치면 그친 것에 대해 감사했다. 둘째 날, Tagaytay라는 화산지형에 방문했다. 따알화산으로 유명한 곳으로, 화산폭팔으로 만들어진 지형 안의 호수가 멋진 곳이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짙은 안개로 호수가 보이지 않았는데, 앉아있다 보니 거짓말처럼 호수가 나타났다. 또, 보홀으로 가는 비행기의 연착 연락을 받고도 ‘오히려 좋아~’ 라는 마음으로 편하게 망고를 먹으며 독서를 즐겼다. 돌고래를 보고싶어서 호핑투어를 일찍 떠났는데 심한 파도로 돌고래를 보지 못했을때에도 ‘오늘은 돌고래와 내가 만날 인연이 아닌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소한 일에서의 통제 욕구를 내려놓으니 세상은 조금 더  편안한 곳이었다. 이런 게 바로 여행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5일을 꽉 채운 여행 후,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라면 여행을 끝내기 아쉬운 마음이 항상 컸던 나였다. 이번만은 달랐다. 여행이 충분하다는 느낌, 나의 일상이 반갑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지만 아늑한 나의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의 아름다운 일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 후 정말 거짓말처럼 (경미했던) 불면증이 사라졌다. 언제 또다시 잠 못 이루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나날들도 나에게 잠시 여행을 왔다고 생각하고 대접해준 후 보내주기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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