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글라스와 넥타이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한창 멋부릴 4.5살 고양이

by 고양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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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는 보랏빛 선글라스를 쓴 채, 누런 거실 조명을 등에 지고 앉아 있었다.

햇빛이 반사된 렌즈 위로 털 한 올이 스쳤지만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은 ‘고양이’라기보다, 잠시 삶에 염증을 느낀 자유주의자에 가까웠다.


시트에 내려앉은 햇살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그 위에 앉은 고양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라색 선글라스가 그의 머리 사이즈를 감당하기에 작아 보였다.

작지만 머리 위로 올려 쓰기엔 충분했다.

하얀 셔츠의 카라는 털과 구분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고,

별무늬 넥타이는 중심에서 3도쯤 틀어진 채 달랑 매달려있다.

설이가 천천히 걸어 거실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앞발은 나란했고, 꼬리는 무심히 바닥에 닿았다.

나는 무심코 마우스를 잡은 손을 멈췄다.

그 눈빛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단순한 지루함을 느끼는 눈이 아니었다.


퇴사를 결심한 직장인의 눈빛,

긴 침묵 끝에 자유를 찾아 떠나는 리더의 반짝임이 눈빛에서 새어 나왔다.


세상에 질린 자의 마지막 차분함.

"집사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말을 할 수 없는 그의 입에서 나지막이 확실히 들렸다.

"어디 가려고?"

설이는 고개를 살짝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그 방향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낡은 주차장, 말라가는 화분, 저 멀리 지나가는 자전거 한 대.

기계 공고 학생들의 허심탄회한 한숨 소리까지

창문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이 그의 눈에 선명히 보이는 듯했다.


"바람“


창밖에 엔진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분명 설이의 발걸음을 멈춘 것이었다.

이상하리만큼 가까이 들리는 소리에 설이가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기어가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닌 선선히 바람결을 따라 걷는 걸음.

느리지만 여유를 갖고 아무 말 없이 벽 쪽으로 돌아섰다.


행선지는 묻지 않았다.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표정만으로 마음 닿는 곳 어디든 갈 수 있지 않을까?


선글라스를 고쳐 쓰고,

별무늬 넥타이를 매만진 설이는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

하얀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 순간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에게도 냥춘기가 찾아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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