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세계 대전 때문이든 아니면 환경 문제 때문이든 더 이상 지구에서 살기 어려워진 인류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각 작품에서 다루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근본적으로는 인류의 멍청함 때문이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긍정적인 미래를 그리기란아무래도 힘들다.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는 대신 일주일에 다섯 번 꼴로 일회용 컵을 배출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채식을 하는 사람은 유난스러운 취급을 받는 와중에 유튜브에선 고기 먹방 영상이 넘쳐난다. 유행이라는 말로 소비자들을 부추긴 패션 업계 덕에 버려지는 의류 폐기물이 국내에서만 8만 t 이상이라고 한다.(2020년 기준) 그 외 다른 업계들 또한 우리가 눈을 뜨고 있는 매 순간 소비를 부추기고 만족은 잠시 뿐인 상품을 잔뜩 생산해 내며 탄소 배출에 적극 동참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화나 소설 속에서 그리는 쓰레기로 가득한, 혹은 공기가 완전히 오염된 지구의 모습이 먼 미래가 아닌 당장 내일 닥친대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 환경 관련 기사들에 따르면 실제로도우리가 걱정하는 시기가 점점 더 앞당겨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브레이크도 밟지 않고 디스토피아 시대로 폭주하는 인류를 보고 있자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로 인해 덩달아 피해를 보고 있고 앞으로도 고통받을 동식물들이 안타까운 것은 물론이고. 미래 인류를 그린 작품들은 대부분 얼마간 음울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다 드물게도 예외적인 작품 하나를 만나게 됐다. 인류가 버리고 간 땅에서 생명과 사랑을 발견하는 이야기, ‘월-E’이다.
• 버려진 땅, 그곳에 남은 로봇
쓰레기로 뒤덮여 사람들이 모두 떠난 지구. 그곳에서 폐기물 분리수거 로봇 월-E가 홀로 살아가고 있다. 언제나처럼 쓰레기를 처리하고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수집하던 월-E. 그러던 그는 어디선가 나타난 빨간 불빛을 홀린 듯 따라가다 우주선 하나를 발견한다. 그곳에서 내린 건 다름 아닌 탐사용 로봇이브. 그동안 다른 로봇들이 모두 고장이 나 혼자 외롭게 지내던 월-E는 이브에게 첫눈에 반한다. 지구의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이브를 월-E가 도와주고 함께수집품들도 구경하며 친해지는 둘. 그러다 월-E가 신발 속에서 자란 식물을 보여주자 이브가 그 식물을 스캔하더니 돌연 작동을 멈춘다.
지구에 홀로 남은 월-E
이브가 고장 난 줄 알고정성스레 돌봐주는 월-E. 그러던 어느 날 또 다른 탐사선 한 대가 등장하더니 이브를 데려가고,월-E도 몰래 따라탑승한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지구를 떠난 인간들이 모여 살고 있는 우주선 ‘엑시엄’. 이곳의 사람들은 언젠가 다시 지구로 돌아갈 꿈을 꾸며 700년째 우주에서 항해 중이다. 원래는 광합성을 하는 생명체를 발견해 5년 안에 지구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그동안 지구는 점점 더 황폐해져 엑시엄을 떠나지 못한것. 한편 다시 깨어난 이브가 선장 맥크리에게 자신이 발견한 식물을 보고하자 인공지능 로봇 오토가 그 식물을 뺏으려 든다. 결국 실랑이 끝에 맥크리는 오토만이 접근할 수 있던 기밀 영상을 통해 ‘지구 귀환 작전’이 오래전 취소 됐음을 알게 된다.
탐사 로봇 이브
• 놓을 수 없는 희망이라는 끈
영화 ‘월-E’의 주인공 월-E는 실로 대단한 존재이다. 모든 것이 망가진 곳에서 그는 꿋꿋이, 그리고 매일매일 폐기물 분리수거라는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이행한다. 이를 지시한 인간들은 모두 지구를 떠나고, 심지어 자신의 동료들은 모두 작동을 멈추었음에도. 언뜻 회색빛일 것만 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월-E는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이곳을 소소한 즐거움과 낭만으로 채워 간다. 그러던 어느 날 월-E는 마침내 작은 식물 하나와 우주에서 온 로봇 이브를 마주한다. 즉, 모두가 포기한 땅 위에서 생명과 사랑을 발견한 것이다.
버려진 지구에서 생명과 사랑을 찾아낸 월-E는 어떤 면에선 희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시작 따위 불가능하고, 아무도 책임을지지 않고 떠난 곳에서 기어코 일말의 가능성을 찾아냈으니 말이다. 부정적인 감정도 마찬가지겠지만 긍정적인 마음과 생각 역시 전염성이 있다. 홀로 제자리를 지키던 월-E의 마음은 결국 두 번 다시 지구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 믿었던 인류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월-E와 이브
과연 우리가 희망을 품어도 될까. 한동안은 이에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아무런 부채 의식 없이 막연하게 품고 있는 희망은, 지구와 인류의 관계로만 한정했을 땐 무책임의 다른 말일뿐이니까. 그러나 영화 속 가상의 캐릭터이자 사람도 아닌 로봇 월-E 덕분에 조금은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희망이 있어야만 책임을 질 용기 또한 생길 것이라고 말이다. 월-E가 찾아낸 식물 덕분에 엑시엄에 탄 사람들은 70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지구로 돌아갔다. 고작 작은 식물 하나만 믿고 무작정 귀환하기엔 지구는 여전히 망가져 있다. 그러나 맥크리와 승객들은 그 작은 희망의 끈을 기어코 붙잡았다. 우리에게 생명을 안겨준 지구에게 그동안 못다 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그리고 다시 그 땅 위에서 사랑을 꽃피우기 위해.
내가 살아가는 지구를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 딴에는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고 하지만 아직 턱없이 부족한 것 같고,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는 속도는 느리게만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희망의 끈을 놓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영화 속 월-E가 그랬던 것처럼 끝끝내 잃지 않은 작은 희망이 어떤 거대한 반향을 일으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