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인 Jun 14. 2024

[더 레슨] 열등감의 말로

질투가 열등감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질투를 느낀다. 질투심이 제로에 가까운 사람은 있어도 질투심 자체를 전혀 못 느끼는 이는 없을 것이다. 질투란 당연한 감정이다. 키가 작아서 키 큰 사람을 보며 좋겠다, 하고 생각하거나 연봉이 더 높은 사람을 보며 부럽다고 여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다만 이때 느낀 질투를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돌리느냐가 중요하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당연히 질투심을 스스로의 발전의 계기로 삼는 것이다. 앞서 예를 든 키의 경우 목숨을 건 수술을 하지 않는 이상 키울 수 없으니 운동을 함으로써 몸을 좀 더 보기 좋게 만들면 될 일이다. 연봉을 더 높이고자 한다면 자기 계발을 하고 스펙을 쌓아 이직을 하거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면 된다.


만약 질투를 느끼지만 무언가 하기 귀찮다면 있는 그대로 만족하는 방법도 있다. 제일 별로인 방법은 역시 질투심에 못 이겨 질투 대상을 깎아내리고 험담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방치 질투심은 열등감이라는 한 차원 더 독한 모습으로 변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열등감을 품을 때는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만큼, 그 대상이 누구인지 또한 크게 작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열등감의 대상이 다름 아닌 피를 나눈 가족이라면 어떨까.



• 작가, 두 아들, 가정교사, 그리고 사라진 어머니


소설가로서 성공하기를 꿈꾸는 문학도 리암. 그는 우연히 찾아온 기회로 그동안 동경하던 작가 싱클레어의 아들 버티의 입시를 돕기 위해 가정교사로 일하게 된다. 리암은 자신의 논문 주제로 싱클레어에 대해 썼을 정도로 그를 동경한다. 그런 싱클레어를 실제로 만날 생각에 들떠있는 리암. 이런 기대가 무색하게도 독단적인 싱클레어와 덕분에 그의 아내 엘렌과 아들 버티는 어딘가 위축되어 있고, 덕분에 이를 지켜보는 리암마저 불편해진다. 게다가 싱클레어는 첫째 아들 필릭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날 집을 비웠던 아내 엘렌에 대해 ‘사라진 어머니’라며 그를 탓하는 듯한 말을 던지기도 한다.


작가 싱클레어와 그의 부인 엘렌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작품을 집필 중이던 싱클레어는 프린터로 인해 애를 먹고, 리암이 도와주어 문제를 해결한다. 이를 계기로 싱클레어는 리암에 대해 호감을 느끼고, 그에게 새로 작업하고 있던 작품 ‘장미 나무’의 교정을 부탁할 뿐만 아니라 리암이 쓰고 있던 소설 역시 봐주겠다고 제안한다. 리암은 싱클레어의 기존 작품과는 결이 다르면서도 새로운 매력을 뽐내는 ‘장미 나무’에 완전히 매료되지만, 어쩐지 후반부 챕터가 앞선 내용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결국 싱클레어에게 솔직한 감상평을 전달하기 무섭게, 싱클레어는 리암의 글이 형편없고 그에게는 재능이 없다는 혹평을 쏟아낸다. 존경하던 작가의 악평에 상처를 입은 리암은 싱클레어가 집을 비운 어느 날 아내 엘렌과 충동적으로 잠자리를 갖고, 이후 엘렌이 흘린 힌트로 ‘장미 나무’에 대한 엄청난 비밀을 파헤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엘렌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채.



나라는 사람절대


극소수의 특수한 교집합에 들지 않는 한 누구나 질투를 하고 또 받는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잘났어도, 스스로 느끼기에 너무 못났어도 질투란 감정은 결국 결국 상대적인 차이에서 발생하는 법이다. 때문에 그 심각함의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질투를 하는 입장도, 받는 입장도 쉽게 처할 수 있다.


지극히 평범한 나로서는 질투를 받았던 적은 별로 없는 편이다. 그나마 떠올리자면 취향에 따라 키 큰 남자만 만나는 나를 못마땅해하는 지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했던 말 중 특히 깊은 울림(?)을 주었던 멘트들이 있다. ‘언니는 키 작으면서.’ 그리고 ‘언젠가는 너도 키 작은 남자와 사랑에 빠져 봤으면 좋겠다.’가 그것이다. 변명을 하자면 내가 큰 키의 이성을 선호하는 것과 별개로 키 자체가 어떤 우월성을 나타낸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또한 키를 떠나서 내가 사귀는 상대방의 외적 조건이 잘났다고 해서 내가 잘났다는 뜻은 아니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와 관계없이 나의 개인적 선호에는 종종 괜한 말들이 따라왔다.


가정교사 리암


연애 얘기만 하자니 멋이 없어 추가하자면 나의 영어 실력을 깎아내렸던 지인도 있었다. 그는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내가 학원도 많이 다니고 그만큼 돈도 많이 썼기에 영어 실력이 좋다는 식으로 얘기했고, 그의 뉘앙스가 거슬렸던 친구가 나에게 이를 전했다. 자존심이 상해 덧붙이자면 유학이나 연수는 다녀온 적이 없다. 역시도 질투를 한다. 내가 부러워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완벽해 보이는 이들이었다. 똑똑하고, 사교적이고, 예쁘고. 이런 사람을 어떻게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러한 나의 감정들이 열등감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열등감이라는 감정은 유혹적이라 빠져들기 쉽다. 스스로의 발전을 꾀하고 노력하는 것은 힘들지만, 상대방의 성취나 조건이 별 것 아니라는 듯 깎아내리는 데는 어떤 수고도 들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수치화하는 것이 옳지는 않지만, 나의 시각에서는 10만큼 갖춘 이를 6이라고 평가절하해 봤자 본인의 가치가 올라가기는커녕 그 상대방을 깎아내린 딱 그만큼 본인의 위치도 같이 떨어질 뿐이다. 그러나 열등감에 매몰된 이들은 상대를 끌어내린 딱 그만큼 그와 자신 간의 거리가 좁혀진다고 믿는 듯하다.


경직된 분위기의 싱클레어 가족


열등감이 나쁜 이유는 차고 넘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이유를 꼽자면 열등감이 깊고 길게 지속될수록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열등감에 매몰된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눈에 불을 켜고 상대방의 부족한 점을 찾아내려 하고, 장점 역시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하지만 상대의 장점을 깎아내리내릴수록 그만큼 원하는 모습을 갖추지 못한 스스로가 불만족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기민하게 남들 사이에서 본인의 위치를 파악하고, 남들의 평가에 민감해진다. 이는 당연히 건강한 신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과정에서 분명 주변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게 될 것이다.


아마 ‘더 레슨’의 싱클레어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었으리라. 한때는 모두의 존경과 찬사를 받는 유명 작가였으나 그에게는 슬럼프가 찾아왔고, 예전처럼 작품을 쓰지 못했다. 예전의 명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압박 또한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첫째 아들 필릭스에게 자신을 뛰어넘는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싱클레어의 그릇이 컸다면 오히려 이를 기뻐했을 테지만, 더는 존경받는 작가로서의 입지를 지킬 자신이 없던 그에게 아들의 재능은 위협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싱클레어의 입에선 모진 말이 쏟아져 나왔고, 결국 그의 가족은 비극을 맞이했다.


묘한 분위기의 엘렌과 리암


가벼운 질투심은 스스로를 채찍질해 더 멀리 나아가게끔 해준다. 하지만 상대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품게 만드는 열등감은 어떻게든 떨쳐내는 편이 옳다. 물론 쉽지는 않다. 자기 발전을 꾀하는 일은 번거롭고,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를 인정하는 일 역시 녹록지 않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인 만큼 남들과 어울려야 하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기에 한 번씩 수치화된 나의 위치를 상기하게 되니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우리는 죽을 때까지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아무리 위로 올라간대도 내 머리 위에는 항상 누군가 있을 테고, 아래로 떨어진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와중에 나의 내면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나란 사람의 상대성이 아닌 절대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늘도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초콜릿을 먹는다.






사진출처

Rotten Tomatoes : https://www.rottentomatoes.com/m/the_lesson_2023

IMDB : https://m.imdb.com/title/tt20358284/

작가의 이전글 [스쿨 오브 락] 유쾌한 전화위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