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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Sep 03. 2023

[안나의 마음노트]
1. 나는 왜 공허할까?

당신이 욕망하는 대상 'a'


 나는 왜 공허할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 안에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어떤 공간 같은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 공간을 '안나의 방'이라고 불렀는데, 마치 죽기 전에 꼭 완수해야 하는 삶의 과업을 수행하 듯, 그 텅 빈 방을 가득 채우기 위해 항상 무언가를 욕망했다. 


 20대의 나는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 좋은 차와 좋은 집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외/내적인 아름다움을 욕망했다. 그럭저럭 (운이 좋아서) 쟁취/획득한 '일부' 결과물에는 일시적으로 만족감을 느꼈지만, 손에 쥐지 못한 것들에는 쌉쌀한 상실감과 박탈감을 느꼈다. 하지만 욕망하던 것의 쟁취/획득 여부를 떠나 그 방은 여전히 공허했고, 그로 인해 나는 만성 '고독감'에 시달렸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거창했던 욕망의 대상들은 조금씩 사적이고 소박한 것들로 변했다. 보기만 해도 흐뭇한 예쁜 소품을 사거나, 좋아하는 공부를 하거나, 읽고 싶었던 책을 읽고 글을 쓰거나,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가꾸거나, 맡은 프로젝트를 안정적으로 완수하거나...... 그런 보다 작고 쉬운 것들로.


 비교적 적은 노력으로 손에 쥘 수 있고, 지속적인 안정감과 기쁨을 주는 것들이기 때문에, 곧 그 방을 채우고 지긋지긋한 만성 '고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마냥, 그 방에 열심히 구겨 넣은 것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나는 다시 또 공허하고 고독해졌다. 


 심지어 이 고독감은 내가 아주 기쁘고 행복한 순간에도 툭 튀어나와 나를 불편하게 했다. 마치 이건 네가 숨 쉬고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아주 당연한 거라는 듯이, 아주 뻔뻔하게! 때문에 예전의 나는 언제나 고통스러웠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 방을 채우는 것을 그만두고, 그 방의 공허함에 대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연히 지인과 대화를 하다 머릿속에 떠오른, 대학교 때 '흘려' 배웠던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개념 '대상 a'(Object a)에 주목하게 되었다.


 라캉에 따르면, 대상 'a'는 절대로 충족될 수 없는 (상상계의 자아가 상징계의 언어의 질서로 옮겨지면서 만들어진 허구의 혹은 거세된) '타자의 욕망'이다. 동시에 주체로 하여금 끊임없이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근원적 원인'이자, 반복적인 환유와 치환을 통해 주체를 계속 욕망하게 하는 주체의 '환상'이자, 결핍의 '상징'이다. 

 

 즉, 인간을 욕망하게 만드는 원인인 대상 'a'는 태생적으로 절대 (네버에버포에버!) 충족될 수 없는 것인데, 인간은 그것을 충족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대상 'a'를 욕망하고 쟁취/획득 혹은 실패한다. 그리고 비충족(결핍)의 단계를 거친 뒤, 다시 대상 'a'를 무언가 (예: 돈, 명예, 이성, 물질 등) 다른 것으로 바꿔가며 욕망한다. 마치 x축과 y축에 수를 대입하여 값을 구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1. 욕망하기

  2. 욕망하는 것을 쟁취/획득 or 실패

  3. 비충족(결핍)

  4. 다시 욕망하기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과정을 단순히 항목화했지만, 사실 각 과정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행동 양상과 결과는 무궁무진하다. 인간은 '1. 욕망하기' 단계에서 도파민/엔도르핀 뿜뿜, 고도의 집중력, 갖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저릿함, 초조함, 불안함, 의구심 등을 느낀다. 그리고 욕망하는 것을 갖기 위해 액션을 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일찌감치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대상 'a'를 쟁취/획득하기 쉬운 것으로 바꿔서 욕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포인트는 액션을 취하던 취하지 않든 간에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이다. 단, 각자의 성향, 기질, 상황에 따라 다음 단계로 언제 넘어가느냐 이 단계에 얼마나 머무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 


 '2. 욕망하는 것을 쟁취/획득 or 실패' 단계에서는 쟁취/획득 여부에 따라 기쁨과 환희, 성취감 혹은 좌절과 절망, 상실감 등을 느낀다. 전 단계와 같이, 본 단계에서 느끼는 감정과 나타나는 행동 양상과 결과는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욕망한 것의 쟁취/획득을 통해 느끼는 기쁨과 환희, 성취감과 같은 긍정적인 정신/정서적인 것들은 일시적이며, 궁극적인 충족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상 'a'는 절대로 충족될 수 없는 허구의 것이기 때문에) 쟁취/획득 여부와 별개로,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3. 비충족(결핍)'의 단계.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봤을 크고 작은 허무함과 공허함이 바로 이 단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모든 인간은 (각자의 성향, 기질, 내외부 상황에 의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이는 이 단계에서 느끼는 공허함을 재채기를 하듯이 크게 에취, 하고 툭툭 털어버릴 수도 있지만, 어떤 이에게 그 공허함은 어금니에 낀 시금치 조각처럼 거슬리고 불편한 것 일수도 있다. 또 어떤 이에게는 '만성' 고독감으로 변질되어 고통스러움으로 다가올 수 도 있는 것이고. 계속 강조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매우 상대적이다.


 여차저차 어찌어찌하여 크고 작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 각자의 방식으로 공허함을 정리한 사람들은 다시 또 무언가를 욕망하는 '4. 다시 욕망하기' 단계에 접어든다. 사람마다 크고 작음, 길고 짧음 등과 같은 각 요소에 대한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죽을 때까지 이와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그리고 나는,

 

 대상 'a' 개념을 다시 읽고 정리하면서, 본래 내가 욕망하는 것들이 절대 충족될 수 없는 허구의 것이고, 욕망하는 행위 자체가 본능적이고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면, 그 과정에서 오는 공허함과 고독감에 대해 굳이 크게 걱정하거나 불안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동시에 어쩌면, '1. 욕망하기 > 2. 욕망하는 것을 쟁취/획득 or 실패 > 3. 비충족(결핍) > 4. 다시 욕망하기' =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깨달음 같은 것을 얻었다.


 내가 라캉의 대상 'a'개념을 제대로 이해했던 하지 못했던, 내 마음대로 분석하고 갖다 붙인 '안나의 방'의 공허함에 대한 이유의 답은 (혹은 이 답이 모순으로 똘똘 뭉친 비겁한 자기 합리화의 산물이라고 해도) 지금의 나를 편안하게 하고, 여유롭게 한다. 이제 나는 이따금씩 그 방의 공허함과 그로 인한 고독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덜컥 겁이 날 때마다, 단순하게 생각한다. 아! 나 지금 살고 있구나,라고.


 간절하게 무언가를 욕망하고

 욕망하는 것을 쟁취/획득하는 순간 벅차오르고

 그 뒤에 찾아오는 공허함과 그로 인한 고독감에 깊이 가라앉고

 또 치열하게 욕망할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다시 욕망하고. 


 혹시 어느 날 갑자기, 앞만 보고 달려온 당신에게 공허함이 찾아왔다면, 그리고 그것이 꽤 오래 지속되고 생각보다 많이 고통스럽다면, 그냥 나를 믿고 (나 그래도 꽤 오랫동안 진지하게 고민했다.)  지금의 나처럼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원래 그런 거구나,

 자연스러운 거구나,

 괜찮은 거구나, 

 불안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구나, 


 아! 나 지금 살고 있는 거구나,라고.








2020.10.04

Image l Melancholy, painting by the Norwegian artist Edvard M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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