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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Sep 17. 2023

[안나의 습작노트] 6. 사샤 벨

파가니니 24개의 카프리스


 사샤 벨



 “그럼 그렇지, 비행기가 제시간에 도착하면 재미없지.”

 

 늦은 오후 인천공항 출국장. 잘 다려진 검정 셔츠와 정장바지에 낡은 검정 운동화를 신은 은주가 비아냥거린다.

 

 '공연까지 남은 시간은 3시간. 비행기 연착으로 정확히는 2시간 20분. 국적기 비즈니스 석 맨 앞줄에 앉혀놨으니 나오는 건 제일 먼저 나올 테고, 화물로 짐 붙일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미리 으름장도 놨고, 사전입국시스템에 이름도 올려놨으니 출국장까지 나오는 데 오래 걸려도 40분이면 되겠다. 그럼 1시간 40분 남은 건가? 공항에서 공연장까지 대략 1시간 소요예정. 뭐 괜찮겠……'

 

 "아, 오늘 토요일이구나."

 

 은주의 미간이 빠르게 구겨진다. 그냥 집에 갈까?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하는 은주를 다그치듯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

 

 “어디냐? 사샤는 나왔냐?”

 “비행기 연착됐습니다. 팀장님.”

 

 마치 ‘시’를 읊듯 우아하고 건조하게 ‘욕’을 하는 팀장. 돌발상황 원데이 투데이인가. 담담하게 전화를 끊은 은주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지금 집에 가면 팀장은 분명히 나를 '기껏 키워놨더니 은혜도 모르고 공항에 연주자 버리고 도망간 비겁한 루저로 만들어서 대한민국 공연계에 다신 발도 못 붙이게 만들겠지? 찝찝해. 이건 패스. 그만두더라도 사샤 무대에 올려놓고 그만둬야지. 지금 발리행 비행기표가 비싸려나? 아, 집중하자 김은주. 공연장까지 대충 1시간 30분으로 잡고 도착하자마자 바이올린 손에 쥐어서 무대로 바로 들여보내면 되겠네. 5분 정도 여유가 있는 건가? 명색에 현존하는 21세기 최고의 최연소 바이올리니스트님이신데 캐리어에서 금방 꺼낸 구겨진 셔츠 입혀서 무대에 올릴 순 없잖아. 얘는 여자애가 왜 드레스 안 입고 셔츠에 바지만 고집하는 거야. 아니다. 셔츠가 입히기 쉽다. 됐다. 좋네. 혜미한테 다림질한 셔츠 단추 다 풀어서 반입구 앞에 들고 서있으라고 해야겠다. 조명, 음향은 권주씨, 티켓은 선배님이 맡았으니 걱정 없고, 문제는 사샤 컨디션인데...... 뉴욕 카네기 홀, 베를린 필하모니,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홀 그리고 오늘 예술의 전당. 10일 동안 세 개 대륙을 가로지르는 미친 스케줄을 그 조그마한 몸으로 어떻게 치는 거지. 대단해해야 하는 거야, 안쓰러워해야 하는 거야.'

 

 쉴 새 없이 열리고 닫히는 출국장 문을 노려보고 서 있는 은주. 그 주위를 분주하게 오고 가는 사람들의 걸음에 실린 설렘과 고단함이 출국장 특유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든다.


 은주의 손목시계 시침이 유난히 요란스럽게 째깍, 돈다. 잠시 빼놓았던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는 은주. 때마침 흘러나오는 파가니니 24개의 카프리스 중 5번. 은주는 팽팽하게 늘었다 줄어드는 음들 위에 몸을 뉘이듯 기둥에 조심스럽게 몸을 기대어본다. 그리고 누르는 반복재생 버튼. 오늘 사샤가 이 부분을 연주할 때 부디 아무도 은주를 방해하지 않기를.

 



 

  

 -


 “공연장 도착 5분 전입니다. 반입구 앞에 주차하고, 무대로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사샤 손은? 손은 좀 풀었어?”

 

 공연 시작 직전, 언제나 묘하게 들떠있는 팀장의 목소리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주변의 분주한 움직임들. 떨림과 긴장감, 은근히 끓어오른 흥분을 밟고 선 한 뺨 위의 순간, 스탠바이 5분 전. 은주의 아랫도리가 저릿하다.

 

 “네, 되는대로 차 안에서 손 풀었어요. 사샤 컨디션 나쁘지 않아요.”

 “의상은?”

 “단추 채울 시간도 없을 것 같아 그냥 구겨진 거 꺼내 입혔어요.”

 

 동시에 힐끔 뒷좌석의 사샤의 옷매무새를 살피는 은주. 무표정으로 차창 밖 줄지어 선 자동차들을 응시하고 있는 사샤. 은주는 새삼 진지한 사샤가 왠지 모르게 귀엽다고 생각한다.

 

 “그럭저럭 봐줄 만합니다. 바로 첫 곡 시작 할 수 있게 준비해 주세요.”

 “얼른 오기나 해. 인마.”

 

 

 

 


 -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선택하라고. 내일 사샤 데리고 하루 놀아줄 건지, 아니면 온종일 전화통 붙잡고 열 많이 받으신 관객님들한테 하나하나 환불안내 전화 돌릴 건지. 참고로 거기 공연장 2218석이고, 매진이었던 거 네가 더 잘 알지? 네가 이 프로젝트 담당자잖아.”

 

 은주는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담담하게 (마치 본인은 제3 자라는 듯이) 비보를 전하는 팀장이 어이없다. 게다가 ‘담당자’라는 단어를 묘하게 띄우는 저 교묘하면서도 얄미운 화술. 은주는 진짜 대단하다,라고 생각했다.


 마주 선 팀장 뒤로 보이는 여러 개의 모니터에서는 이제 막 무대에 오른 사샤가 첫 곡을 연주하기 위해 바이올린 활을 드는 모습이 고화질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장내는 12살의 천재 소녀가 인터미션 없이 1시간 20분가량 연주할 파가니니의 24개 카프리스 전곡에 대한 기대감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은주는 문득 꼭 이걸 지금 그러니까 '007 작전 수행하듯 사샤를 무대 위로 올린 직후에, 은주가 한숨 돌리며 의자에 앉으려고 엉거주춤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 꼭, 말해야 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벌써부터 내일 사샤를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자신이 정말 바보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동시에 들었다.

 

 “공연 하루 전에 취소라니요. 말도 안 돼요.”

 “아마추어처럼 왜 이래. 이 바닥에 말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이유는요?”

 “진짜 이유는 그쪽 재단 내부 사정, 공식 사유는 세계투어 강행군으로 인한 연주자 컨디션 난조.”

 “모레에 성남에서 공연 한 번 더 있는 거 알고는 계시는 거죠, 팀장님?”

 “애초에 삼일 연속 공연은 무리였어. 차라리 잘됐지 뭐. 오늘 마무리까지 잘 부탁한다.”

 

 진짜 죽여버릴까. 은주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를 뜨는 팀장에게 "그거 네가 개념 없이 마구 잡은 스케줄이잖아."라고 소리쳤다.


 마음속으로, 2번, 아주 크게, 심한 욕도 약간.

 

 상황은 이미 벌어졌고 해결해야 할 문제만 남아 있었다. 누구의 잘잘못을 집요하게 따지고 가려내는 것이 이 순간 얼마나 부질없고 소모적인 행동인지, 은주는 지난 2년여간의 소중한 '경험'(이라 쓰고 '노예살이'라고 읽는다)으로 알고 있었다.


 우선 듣고 보자. 조용히 음향 반사판 옆 의자에 앉아 스크린과 백 스테이지로 새어 나오는 무대 위 소리에 집중하는 은주. 어느새 쉴 새 없이 지저귀는 음들이 경이롭기까지 한 카프리스 1번이 끝나고 우아한 도입부의 카프리스 2번이 경쾌하게 연주되고 있었다. 성인 바이올린 연주자들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24개의 무반주 바이올린 독주곡을 거짓말처럼 연주해내고 있는 금발의 12살 소녀. 관객들의 기침소리조차 멎게 하는 화려한 테크닉과 깨끗한 음처리, 무엇보다 신나 죽겠다는 저 표정.


 은주는 사샤가 연주하는 카프리스 5번을 들으며 눈을 감는다. 은주의 까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차창 밖을 바라보던 사샤의 무표정. 은주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뜬다. 아 몰라, 내일의 걱정은 내일의 김은주가 하겠지. 은주가 다시 눈을 감는다.








2023.09.17

Photo l © Liz Pa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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