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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Sep 13. 2023

[안나의 습작노트] 5. 씨파버스

에콰도르에서 페루로


 가만히 눈을 뜬다. 마치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 


 눈동자가 빠르게 소등된 버스 안 풍경을 읽는다. 비좁은 통로 끝 운전석 차창에서 새어 들어오는 밝은 빛, 힘을 잃고 좌우로 까딱거리는 머리들, 커튼 밖 딱 창문크기로 재단된 자줏빛 에콰도르, 그리고 내 옆에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채로 곤히 잠든 예원(여, 22)까지. 버스가 에콰도르와 페루의 국경을 향해 몽롱하게 나아간다.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다. 새벽 세 시. 예정대로라면 쿠엔카를 떠난 버스가 에콰도르 국경도시 후아끼야스에 닿아야 할 시간. 하지만 에콰도르 출입국사무소는커녕 가로등 불빛조차 없다. 습관적인 불안함이 엄습하려는 찰나, 옆에 앉은 예원이 고소하게 그르렁거린다. 


 잘도 잔다, 바보자식. 


 엄마미소 일초, 이초, 삼초. 새삼, 짓고 있는 미소가 멋쩍어진다. 이내 올라간 입 꼬리를 스르르 내린다. 빨려 들어가 듯 굳어지는 얼굴. 볼 근육이 저릿하다. 


 버스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한다. 나는 어? 하며 차창 밖을 확인한다.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는 자줏빛 허허벌판. 버스 안에 퍼지는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깬 예원이 안대를 이마 위로 걷어 올리며 비몽사몽 한 표정으로 묻는다.


 “다 왔어?”


 나는 섣부른 대답대신 굳은 얼굴로 예원을 바라본다. 내 표정을 읽은 예원이 눈빛을 바꾸고 조용히 커튼을 걷는다. 자줏빛 허허벌판에서 ‘있어야 할’ 출입국사무소를 찾는 예원. 나는 의자 등받이를 짚어 몸을 일으킨 뒤 승객들의 동태를 살핀다. 요리조리 어둠 위를 구르는 수십 개의 흰자위들과 은밀하고 위협적인 부스럭거림. 나는 급히 몸을 움츠린다. 


 끼이이익-


 강하게 귀를 조여 오는 오래된 브레이크 소리. 어느새 비좁은 통로로 걸어와 내 옆에 선 남자가 "바모스", 하며 나와 예원을 일으켜 세운다. 우리가 꼼짝도 하지 않자, 버스 선반 위 내 침낭과 예원의 간식가방을 아무렇게나 끄집어내 버스 밖으로 나가버리는 남자. 우리는 불안한 표정으로 귀중품이 든 작은 배낭을 끌어안고 통로를 걸어 나간다. 어둠 속 여기저기서 수십 개의 흰자위가 굴러와 우리에게 닿아 끈적거린다. 나는 예원의 옷자락을 잡고 묻는다. 


 “여기가 출입국 사무손가?”

 “그럼 다 내려야지. 왜 우리만 내려.”


 버스 출입문에 서서 우리를 올려다보는 남자. 뾰로통한 표정의 예원이 입을 앙다물고 버스 계단을 내려간다. 마음이 삐죽 나온 나는 남자의 시선을 밟고 내려간다. 훅 풍겨오는 바람냄새. 


 나는 버스를 등지고 서, 딛고 선 시멘트바닥을 내려다본다. 시멘트바닥이 끝나는 지점부터 수평으로 펼쳐지는 드넓은 대지와 그 위에 솟아 있는 손바닥만 한 산들과 다시 수평으로 그라데이션 된 자줏빛 하늘. 그리고 아까부터 자꾸만 기괴한 소리를 내며 깜빡거리는 주황색 가로등과 우리가 타고 온 버스의 비상등.


 그 깜빡거림을 타고 극단적인 생각들이 뿜어져 나온다. 엉킨 생각의 뭉치 위로 떠오르는 단어, 죽음. 나는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이 개념의 무게에 숙연해지는 동시에 순수한 호기심으로 타오른다. 숨 쉬고 있다면 언젠가 딱 한번 만날 수 있는,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죽음. 죽음을 둘러싼 생각들이 부딪치고 깨져, 머릿속은 아수라장이 된다. 답을 찾아 허우적거릴수록, 눈동자는 빛을 잃고 시들거린다. 한없이 깊고 낮게 멍하다.


 “야, 멍 때리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예원이 앙칼진 목소리로 심연에서 나를 끄집어낸다. 불과 몇 초의 시간. 또 언제 그곳에 빨려 들어갔다 나온 건지. 그 안에서 나는 한없이 자유로우며 격렬하다. 단 한 번도 명확한 답을 얻은 적이 없는 곳. 수천수만 가지의 기준과 이념, 이론과 가치, 감정들이 제멋대로 들끓는 곳. 


 그곳은 언제나 나를, 우유부단하게 만든다. 


 어느새 죽음에 대한 숙연함과 호기심은 사라지고 남은 사후의 혼란스러움에 우울해진다. 그리고 그런 나를 나무라듯 볼을 쓸고 지나가는 텅 빈 바람과 예원의 반짝이는 눈빛. 나는 내팽개쳐진 생각과 감정을 급히 그곳에 다시 구겨 넣는다. 그래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가로등 불빛에 얼굴이 드러난 남자가 버스 트렁크에서 큰 배낭 두 개를 꺼내 건네주고 손에 든 종이를 보여주며 무어라 스페인어로 설명한다. 그리고 한국말로 속닥거리는 예원과 나. 


 “얘 뭐래?”

 “몰라, 나도. 우리 버리고 가려는 건가?”


 손목에 찬 낡은 시계를 가리키며 가라고 손짓하는 남자. 하지만 앞 뒤로 크고 작은 배낭을 메고 양손에 침낭과 간식가방을 든 우리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남자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체념한 듯, "바모스 아미가." 하며 앞장서서 버스 뒤로 걸어간다. 따라오라는 건가. 버스 뒤로 걸어간 남자는 방향을 꺾어 버스 반대편으로 사라진다. 


 어쩌지? 불안한 표정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 우리. 커다란 버스에 가려 보이지 않는 버스 반대편 차로. 줄곧 앙칼진 표정을 짓고 있던 예원의 얼굴에 두려움이 서린다. 나는 예원의 손을 잡으며 괜찮아, 한다. 어디서 솟아난 용기인지, 나는 평소보다 힘차게 버스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코너를 돈다. 자 와라.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미래야!





 장난하나.


 반대편 차도에 비상등을 켜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페루의 씨파(CIFA) 버스.  


 아니, 누가 길 한복판에서 이렇게 국가 간 버스 환승을 하냐고. 그리고 아저씨, 좀 웃으면서 내리라고 하던지. 아저씨 같으면 이 머나먼 타국에서, 그것도 국경에서 정색하고 따라오라고 하면 가겠냐고. 뭐야 이게, 사람 무안하게. 나 그 짧은 시간에 죽음, 공간, 기준, 이념, 이론, 가치...... 우주 한 바퀴 돌고 왔잖아. 장난하나 진짜.


 나는 가볍게 구시렁거리며 걸음을 재촉한다. 사태파악이 끝났는지 이미 반수면 상태로 돌아간 예원. 앞장선 남자가 씨파버스에 올라타는 우리에게 손을 흔든다. 여전히 웃지 않는 아저씨. 자세히 보니 착하게 생긴 거 같기도 하고. 


 여자저차 갈아탄 씨파버스가 군데군데 시멘트가 마르지 않은 에콰도르와 페루의 '신' 출입국사무소 앞에 정차한다. 나는 그새 다시 잠든 예원을 깨워 출입국 절차를 밟는다. 출입국심사서류를 받아 든 예원이 잠결에 칭얼거린다.


 “지들이 써주면 될 것이지, 왜 나보고 쓰라고 난리야.”

 “예원아. 네 출입국심사서류를 네가 쓰지 누가 써 주냐.”


 정확히 5초 뒤, 실실거리기 시작하는 예원. 자기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좋다고 웃는다. 귀여운 녀석. 아시아의 미?로 LTE급 출입국심사를 마친 우리는, 처음 보는 휴지와 비누가 겸비된 남미 최신식 화장실에 크게 감동한다. 우리는 기꺼이 아까의 꽁한 마음을 풀기로 한다. 쉬운 여자들 같으니라고. 


 다시 버스에 오른다. 이내 꺼지는 불. 깜깜한 버스 안, 나는 다시 가만히 눈을 감는다. 마치 깨어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담백하게 생각한다. 곧 정말 페루다.








2023.09.13

Photo l © Sandra Perez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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