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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Sep 04. 2023

[안나의 습작노트] 4. 교집합

H에게


교집합

 


 무뚝뚝한 표정의 수영(여,34)이 막 포장을 마친 종이상자를 굳이, 다시 뜯는다.


 테이프를 덕지덕지 덧댄 종이상자의 틈을 찾아 커터칼로 조심스럽게 가르는 수영. 박스를 열어 내용물이 상하지 않았는지 살피는 수영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박스 안에는 파리 백화점에서 산 명품 스카프가 고급 포장지에 싸여 있다. 종이상자를 한쪽으로 살며시 밀어 두고, 서랍을 열어 가장 무늬가 많은 편지지를 꺼내는 수영. 수영은 잉크가 빨리 마르는 검정 펜을 들어 정성스럽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어머님~~ 진아는 파리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용. 오빠가 진아를 많이 아끼고 사랑해 주더라구요. 둘이 알콩달콩 잘 지내는 걸 제 눈으로 직접 보니, 마음이 놓였어요. (오빠가 집안일도 도맡아 하고, 진아한테 은근 져주면서 잘 하더라구요!ㅎㅎ 진아가 남편 하나는 아주 기가 막히게 잘 만난 거 같아요!) 진아랑 제가 같이 고른 생신선물은 제가 가지고 들어왔어요. 생신 축하드려요! 아버님이랑 맛있는 거 드시고, 행복한 생일 되셔요! 수영드림 ♥️


 수영이 곱게 접은 편지를 종이상자 안에 넣고 다시 투명 테이프로 칭칭 감는다.



 -


 “잘살아!”


 담담한 얼굴로 뒤돌아 걸어가는 수영에게 진아(여,34)가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외쳤다.


 “왜 울고 지랄이야. 가는 사람 심란하게.”


 가던 걸음을 멈추고 애써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수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출장 차 파리에 온 수영은 진아의 신혼집에 머물렀다. 결혼 후, 준영(남, 35)과 파리로 떠났던 진아. 3년 만에 다시 만난 수영과 진아는 많은 것이 변했음을 느꼈다. 서로의 몸과 마음은 물론이거니와 직면한 문제와 고민거리 그리고 처한 상황들까지.


 고등학생 시절 포개진 것처럼 겹쳐 있던 수영과 진아의 교집합은 진아가 결혼한 후, 빠르게 작아졌다. 겹쳐 있던 수영의 ‘원’과 진아의 ‘원’은 점점 멀어졌고 지금은 두 ‘원’의 끝 선만 간신히 걸쳐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진아 옆에는 준영이 있었고, 진아에게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도 준영이었다. 수영은 어느새 진아의 중심이 된 준영에게 묘한 질투심을 느끼기도 했지만, 머나먼 타국에서 진아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보호자 역할을 톡톡히 해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더 크게 느꼈다. 무엇보다 준영이 진아를 많이 사랑하고 진심으로 아껴 주는 다정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어 크게 안심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수영과 진아는 함께 쇼핑을 했다. 샹들리제 거리에서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함께 고르고, 고급 요리를 먹고, 에펠탑 아래에서 와인도 마셨다.


 돗자리에 누워 파리의 파란 하늘을 보던 수영이, 무심한 표정으로 “우리 언제 또 만나냐.”라고 지나가듯 말했을 때, 진아는 대성통곡을 했고 수영은 그런 진아가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수영과 진아는 '에펠탑 아래에서 꺽꺽 숨이 넘어갈 듯 우는 동양인 여자와 그 옆에 누워 실실 웃는 동양인 여자'를 힐끔거리던 주변의 시선까지 포함해서, 꽤 괜찮은 하루를 보냈다는 것에 동의했다.


 다음 날 한국행 비행기 안, 수영은 답지 않게 여러 번 가방을 열어 진아와 함께 고른 스카프가 잘 있는지 확인했고, 진아는 수영이 쓰던 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


 늦은 밤, 수영의 핸드폰이 반짝인다.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린 수영이 화면을 보고 피식 웃는다.


- 고맙다. 엄마가 선물 잘 받았대. 니가 쓴 편지도 찍어서 보여줌. 나한테도 평소에 이모티콘이랑 하트 좀 써줄래^^?
- 뭐래, 나 잔다. 여기 새벽 1시임. 매너좀요








2023.08.29

Photo l Annikki and Inkeri. 2017 © Nelli Palomä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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