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a Oct 14. 2023

[안나의 습작노트] 7. Available now?


 Available now?


 

 김선배 대신 두바이에 출장 온 효진(여, 39)은 미쳐 돌아버릴 것 같다. 함께 온 이사님은 ‘효진아, 이건 네 행사야.’ 하며 윙크만 날리며 앉아있고, 회사에서 급하게 꾸려준 팀원들은 하나 같이 제대로 준비된 녀석이 없다. (팀원들이 무슨 죄냐… 행사 막 준비한 김선배 탓이지.) 긴 시간 손발을 맞춰왔던 만능 후배 유미(여, 31)를 회사에 우기고 우겨서 데려오지 않았다면, 효진은 진작에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늦은 저녁까지 오프닝 행사를 치르고, 화장도 지우지 못한 채로 호텔 스위트룸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병째로 들이키며 실행계획서를 고치고 있는 효진. 갑자기 유미가 수상하게 효진을 ‘언니’라고 부르며 다가온다. 사적으로도 효진을 ‘언니’라고 잘 부르지 않는 유미. 효진이 아주 불안한 표정으로 유미를 돌아보며 “왜, 뭐.”하며 경계한다. 그런 효진에게 "언니, 우리 2시간만 놀고 오자." 하며 귀엽게 치대는 유미. '유미의 놀이'가 무엇인지 아는 효진이 단호하게 거절해 보지만, 물러서지 않고 파업 선언을 하겠다는 유미. 한다면 하는 유미의 협박에 아찔해진 효진은 순순히 노트북을 덮는다.


 유미는 효진의 폰을 뺏다시피 가로채, 데이트 어플을 깐다. 능숙하게 아이디와 비번을 치고 로그인을 하는 유미. 예전 프로필에서 사진만 효진의 최신 사진으로 업데이트한 유미는 어떤 스타일이 끌리냐며 쉴 새 없이 조잘거린다. 효진이 사진도 제대로 보지 않고, “어 걔, 걔 좋다.” 하는 순간, 유미의 오른쪽 스와이프와 함께 매칭된 로건(남, 38). 유미가 자신의 폰으로 데이트 상대를 고르는 동안, 폰을 돌려받은 효진은 “Hi, available now?” 단도직입적으로 메시지를 보낸다. 얼마 되지 않아 띵- 소리와 함께 “Yes"하고 화면에 뜨는 알림 창. 그제야 로건의 프로필 사진을 제대로 살펴보는 효진. 새침한 표정으로 "잘생기긴 했네." 한다.



-

 직원들의 눈을 피해 도둑고양이처럼 맞은편 호텔바에 도착한 효진과 유미. 효진은 어디를 가든 꼭 들고 가는 검정 드레스 (파티, 데이트, 만찬 어디에나 어울리지만 과하지 않은 드레스)를, 키가 작은 유미는 미니 드레스에 높은 하이힐을 신고 있다. 두 사람은 가까우면서도 먼 듯한 테이블에 각각 앉아 데이트 상대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스마트폰으로 업무내용을 확인하는 효진과, 마티니 두 잔을 연달아 원샷한 뒤 올리브를 입에 물고 화장을 고치는 유미.


 이윽고 바에 도착한 로건이 효진에게 인사를 건넨다. 고개를 들어 로건을 바라보는 효진. 크림색 면바지에 클래식한 갈색 벨트 그리고 남색 폴로셔츠를 입은 금발의 남자. 바 안에 있는 모든 여자가 '아주 많이' 잘생긴 로건을 힐끔 본다. 효진이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로건에게 집중하기 시작하고, 로건도 효진이 마음에 드는지 두 사람 사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효진과 로건을 보며, 유미가 멀리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위스키 한 병을 반쯤 비웠을 때, 유미의 테이블 쪽을 힐끔 바라보는 효진. 어느새 파트너의 바로 옆자리로 옮겨 앉아 반쯤 안겨 있는 유미. 이제 10-15분 후면 유미는 파트너와 함께 자리를 뜰 것이다. 원래는 유미가 파트너와 함께 사라지면, 자신도 대충 마무리하고 호텔방으로 돌아와 일을 마저 하려고 했던 효진이었지만, 어쩐지 오늘은 호텔방으로 혼자 돌아가고 싶지 않다. 게다가 로건은 '아주 많이' 잘생겼고 젠틀하고 다정하다. 생각이 많아진 효진의 뺨을 손등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로건. 로건의 고요한 파란 눈동자 안으로 소란스럽던 효진의 마음이 통째로 빨려 들어간다. 유미보다 먼저 바를 나선 효진은 로건과 함께 그의 호텔방으로 향한다.



-

 새벽같이 일어나 방으로 돌아온 효진과 유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미친 정신력으로 숙취도 없다.) 2일째 행사를 척척 진행한다. 저녁 만찬장에서 루나의 귓가에 “PCO님, 우리 이제 드디어 보겠네요. 그 VIP-sx…….”라고 속삭이는 유미. 효진이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눈알을 굴리며, 문제의 ‘VIP-sx’가 보내준 100페이지가 넘는 S국 수상 의전 가이드라인을 꾸깃한다.


 이미 업계에 까다롭기로 소문난 S국 수상과 그 수상보다 더 까다로운 수행원 피터. 김선배로부터 급하게 일을 넘겨받은 터라, 그와 이메일을 주고받은 것은 몇 번 안 되었는데도, 그의 극강의 까다로움과 변덕스러움에 이미 질릴 때로 질린 효진이었다. 같은 일을 두세 번 다시 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효진을, 지난 한 달간 불필요하게 야근하도록 만든 VIP-sx, 피터. 효진은 그의 잘난 면상이 궁금해 죽을 지경이다.


 "VIP-s 도착하셨습니다. 행사장안으로 들어가십니다." 하는 무전과 함께 만찬장으로 들어오는 S국 수상과 그의 수행원 피터(남, 42)어? 네가 왜 거기서 나와? 15년 PCO 인생, 어떤 일이 있어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걸로 유명한 효진의 눈동자가 요동친다. 굳어버린 효진에게 유미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왜 그러세요?”하자, 효진이 “어제 원나잇”하고 역시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대답한다. “헐.” 하고 낮게 소리 내어 놀라는 유미.


 프로답게 곧 포커페이스를 되찾은 효진이 사무적인 미소를 띠고 허리를 곧게 핀다. 동시에 수상에게 귓속말을 하며 들어오던 피터도 효진을 알아본다. 순식간에 효진만 알아볼 수 있는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눈썹을 위로 꿈틀 한번 한 뒤, 빠르게 다시 무표정을 짓는 피터. 순간 효진은 어젯밤 침대 위 피터의 표정이 떠올라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난 사람처럼 깍듯하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나눈다. 이내 시작된 만찬. 만찬 내내 S국 수상은 소문대로 까탈스럽고, 그런 수상을 모시는 피터는 더 다채롭고 창의적으로 까다롭다. 효진도 지지 않고 그 어느 때보다 더 신속하고 센스 있게 그들의 요구를 척척 처리해 준다. 빈틈없는 효진의 특급케어가 만족스러운 듯 어느새 만찬을 즐기기 시작한 S국 수상. 한숨 돌린 효진이 고개를 돌리다 피터와 눈이 마주친다. 효진의 딱딱한 미소와 피터의 속을 알 수 없는 차가운 미소가 엉켜 나뒹군다. 



-

 만찬이 끝나고 호텔방에 돌아온 효진과 유미. “어제 그 로건이 그 VIP-sx라니…….”하며 유미가 호들갑을 떤다. 효진은 대답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노트북 앞에 앉아 남은 업무를 본다.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효진의 눈치를 보며 샤워가운을 챙겨 욕실로 달아나는 유미. 욕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효진은 참석자 데이터 폴더에서 피터의 차트를 찾아 살펴본다. 피터 에릭 브랜튼, 42세, S국. 이름도 나이도 국적도 다 속였네. 효진의 머릿속에 지난밤 뜨겁던 피터의 모습과 만찬장에서 차가운 피터의 모습이 떠오른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하던 업무에 집중해 보는 효진.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는 효진의 눈동자에 생기가 없다.


 잠시 후, 띵- 소리와 함께 노트북 화면 우측 상단에 뜨는 왓츠앱 메시지 알림 창. 

 “Available now?” 노크도 없이 훅 들어온 피터의 메시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는 효진의 눈동자에 싱그러운 생기가 어린다.

 







2023.09.07

Photo l From the photobook “Studio 54” © Tod Papageorge 


매거진의 이전글 [안나의 습작노트] 6. 사샤 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