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몽수 Mar 18. 2020

쓰다 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얼마 전 계약금이 들어왔다. 실로 오랜만에 통장에 글값이 입금됐다. 글빚에 더 가깝지만 그건 나중일이다. 일단 자축과 격려의 의미로 오래된 노트북을 바꾸려고 한동안 인터넷을 열심히 서핑했다. 그러다 결국 안 사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지금 쓰는 노트북이 너무 멀쩡하다. 작년에 거금 주고 산 아이패드 프로로 인해 노트북의 쓰임이 여러 모로 줄어든 탓도 있다. 한글 프로그램에 글을 쓸 때를 제외하곤 노트북을 잘 켜지 않는다. 고로 요즘은 노트북을 켜는 날보다 켜지 않는 날이 더욱 많다.  


그동안 잔뜩 사들인 책을 읽느라 나름 분주했다. 그러면서도 머리는 내내 쉬지 않고 불안함과 힘겨루기를 했다. 정작 일에는 전혀 손을 못 대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쓴 나의 글을 다시 꺼내 읽고 수정하고, 다음 회 대본을 이어 써야 하는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일단 글자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난독 증세가 유독 내가 쓴 글에만 나타난다.


자꾸 딴짓하며 미루고 또 미룬다.

아직 마감이나 독촉이 없는 상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스스로 마감을 정해서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면 계속 돌을 삼킨 듯 답답하고 불편한데, 왜 마냥 이러고 있는 건지 한심하다.


자신감이 없다.

그러면서 어떻게 남한테 글을 보여주고 평도 듣고 또 계약까지 한 거냐고 묻는다면, 그거와 이거는 전혀 결이 다른 것이라고 답하겠다.

글이란 게 쓰면 쓸수록 공식처럼 실력이 느는 거라면 좋겠는데 욕심만 늘고 그만큼 안 써지니 마음이 버겁고 힘들다.


내가 쓴 글인데 참 낯설다.

그 글을 쓰던 나와 지금의 내가 너무도 이질적이다.

그 글을 쓸 때 참 거침없이 짧은 시간 초집중해서 쓴 기억이 난다. 쓰면서 더욱 재미가 느껴졌다. 어느 순간 가속이 붙었고, 그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있었다.


그때의 열정과 패기를 다시 끄집어내야 한다. 다시 달릴 수 있는 동력이 절실하다. 새로운 관점이랄까. 그것이 없어서 시작할 수 없는 것인지, 아님 시작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생각나지 않는 것인지.. 머리가 일시 정지한 느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하루하루 한숨만 깊어진다.


마지막으로 이게 가장 큰 문제라면 문제다. 너무 잘하고 싶고, 진짜 잘해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이 크다. 그래서 쉽사리 시작도 하지 못하고 자꾸 주저하게 되는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것조차 만만치 않았다. 안 써지는 글을 억지로 한 자 한 자 써내려 가고 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라 글이 나를 멱살 잡고 가는 기분이랄까.


그래도 아무튼 쓰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내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 생각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생각만 너무 많다는 걸. 지나친 잡념으로 머리만 무겁고 그래서 정작 필요한 걸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글이란 건 생각이 나서 쓰기도 하지만 쓰다 보면 또 생각이 나고 그렇게 계속 쓰다 보면 그게 글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내일은 꼭 글을 써야지.

쓰고 또 써야지.

머릿속에 꽉 들어찬 잡념들을 하나씩 비우고 정리하고,

지금 꼭 필요한 생각을 발견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쓰는 것,

이 또한 작가의 일일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남보다 못한 나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