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인, 알고 마실까요? - 1부 전쟁과 와인
“여기가 내 머리고, 여기가 내 목이다.”
1303년 9월 7일 새벽, 이탈리아 남동부의 휴양도시 아나니에 한 무리의 프랑스 군대가 소리 없이 들이닥쳤습니다. 휴양차 고향을 찾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교황직에서 내려올 것을 요구하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충복인 ‘기욤 드 노가레가’에게 꼿꼿이 선 채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에 프랑스 군이 교황의 뺨을 후려갈기자 73세의 노구인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그 자리에서 충격으로 쓰러졌습니다.
교회사에 박식한 사람들이라면 잘 아는 전대미문의 사건 ‘아비뇽 유수기’가 시작되는 첫 장면입니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프랑스 내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면서 교황의 권력에 도발하자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이에 맞서 프랑스 왕에 대해 파문을 내립니다. 그러자 프랑스 왕이 교황을 강제로 납치를 시도한 사건이었습니다.
프랑스 왕의 성직자 세금 부과에 교황 반발… 교황 7명의 ‘아비뇽 유수기’ 시작
3일간 감금당한 끝에 갖은 모욕을 당한 교황은 주민들이 들고일어나는 바람에 감금에서 풀려났지만 로마로 돌아온 후 화병 끝에 한 달 만에 선종합니다. 보니파키우스 8세를 이어 도미니크 수도회 원장이던 베네딕토 11세가 교황에 오르지만 채 1년도 안된 1304년 7월 무화과를 먹고 사망하는 의문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어 1305년 교황에 오른 사람이 그 유명한 프랑스 출신의 클레멘스 5세입니다. 그가 교황에 오른 후 첫 번째 한 일은 바로 로마의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68년 동안 7명의 프랑스인 교황이 프랑스 아비뇽에서 머물렀던 가톨릭의 흑역사 ‘아비뇽 유수기’가 시작된 것이죠.
교황 거주 아비뇽 남부의 론 지역, 미사에 사용할 와인을 공급하기 위해 대규모로 포도원 개간
아비뇽은 지금은 프랑스 남쪽의 도시 아를에서 북쪽으로 40km 위에 있는 인구 9만여 명의 작은 도시지만 당시에는 교황이 거주하던 세상의 중심지였습니다.
아비뇽은 교황청이 옮겨오기 전까지는 황량한 시골마을이었으나 교황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활기를 띠게 됩니다. 특히 미사에 사용할 와인을 공급하기 위해 대규모로 포도원 개간이 이뤄집니다.
햇살과 토양이 좋은 아비뇽 인근의 남부 론 지역은 그르나슈와 시라 포도 품종이 잘 자라는 천혜의 산지였습니다. 그르나슈와 시라 모두 강한 햇살을 좋아하는 품종이어서 따가운 햇살이 계속 내리쬐는 지중해성 기후와 자갈로 이뤄진 토양이 생육에 아주 잘 맞았던 것이죠.
보르도의 경우 연간 일조시간이 2050시간이지만 남부 론의 일조시간은 무려 2750시간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중 ‘교황의 새로운 성’이란 뜻을 가진 ‘샤또뉘프 드 파프(Chateauneuf-du-Pape)’ 지역에서 가장 좋은 와인이 났습니다.
지중해성 기후와 자갈밭의 ‘샤또뉘프 드 파프(Chateauneuf-du-Pape)’ 지역에서 가장 좋은 와인 탄생
교황이 직접 사들인 땅이니 그 당시 포도 재배에 가장 좋은 곳을 골랐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무려 3238ha에 달하는 샤또뉘프 드 파프의 포도밭 토양은 둥근 조약돌로 이뤄졌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작물이 자랄 수 있을까 싶지만 이 조약돌은 낮 동안 햇볕을 흡수해 기온이 내려가는 밤에도 포도밭에 지속적으로 열기를 보내줘 포도의 당도를 높여줍니다.
그르나슈와 시라를 기반으로 무드베드르, 까리냥 등 13종의 포도 품종을 섞어 만드는 와인은 당시에도 보르도 못지않은 블랜딩의 미학을 보여줬습니다. 샤또뉘프 드 파프에서 나는 와인은 초대 교황 ‘베드로’의 상징인 천국의 열쇠 문양이 병에 찍혀 있어 교회 신자들이 특히 좋아하는 와인이기도 합니다.
1377년 그레고리우스 11세가 교황청의 오랜 아비뇽 생활을 마무리하고 로마로 돌아옵니다. 사실 그레고리우스 11세는 물론 그곳에서 거주하던 추기경들도 로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가 영국과 백년전쟁에서 계속 밀리고 있던 상황이고 인근 프랑크 왕국마저 가세해 아비뇽에 있는 교황청을 다시 로마로 옮길 것을 요구하자 결국 압력에 굴복한 것이죠. 그레고리우스 11세는 로마로 돌아오자마자 이듬해에 죽습니다. 교황청이 다시 대혼란에 빠집니다.
아비뇽에서 사치스러운 시절 그리워한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 로마와 대립… 교회의 대분열 시작
이탈리아 출신 우르바누스 6세가 새로운 교황에 올랐지만 아비뇽 유수기에 주축 세력으로 등장한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은 아비뇽에서 즐기던 사치생활을 그리워합니다. 이들은 결국 콘클라베 무효를 선언하고 그 이듬해 재선거를 실시해 프랑스 출신 클레멘스 7세를 대립 교황으로 선출합니다. 교회의 대분열 시대가 시작된 것이죠.
아비뇽 유수기 때 교황들은 성직 임명권을 남용하고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리면서 물질적으로, 또 성적으로도 가장 부패한 시대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들 추기경들은 이때로 다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죠.
당시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한 시기를 살았습니다. 1337년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시작되면서 끝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시달렸고, 이 와중에 1346년 발병한 흑사병으로 2년 뒤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른 채 까만 시신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여명이 오기 전에 가장 어두운 것처럼 어쩌면 이런 짙은 암흑기가 있었기 때문에 인류 문화의 새로운 꽃이 피기 시작한 1400년대 르네상스가 왔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