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알고 마실까요? - 제2부 와인의 경제학
와인에도 있는 신분체계…프랑스 보르도 ‘그랑크뤼 클라세’와 부르고뉴 ‘그랑크뤼’가 대표적
나렌드라 자다브(Narendra Jadhav)는 아직도 철저하게 신분제도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인도의 ‘카스트제도’의 벽을 뛰어넘어 능력만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인도 천민들의 ‘살아있는 영웅’입니다.
1953년 ‘달리트(접촉해서도 안 되는 천민)’ 계급으로 태어난 그는 인도중앙은행의 수석경제보좌관에 역임된 후 현재 인도 최상위권 대학인 푸네 대학에서 총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달리트는 브라만(승려), 크샤트리아(귀족), 바이샤(평민), 수드라(천민)로 구성돼 있는 카스트 계급에도 못 드는 가장 낮은 집단입니다. 서구 언론에서는 그가 머지않아 인도중앙은행 총재, 재무장관 등을 거쳐 인도의 미래를 책임질 대통령에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고대부터 인류 문명 어느 곳에서나 존재해왔던 신분제도는 기득권층을 보호하고 그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었습니다. 반면 제도권에 들지 못한 아래 계층에게는 결코 뚫을 수 없는 두터운 벽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시대 ‘골품제’, 조선시대의 ‘양반제도’ 등이 대표적인 신분제도로 이어져왔습니다.
그런데 와인에도 이와 비슷한 신분체계가 있습니다. 프랑스 보르도의 그랑크뤼 클라세 체계나 부르고뉴의 그랑크뤼 체계가 대표적인데요. 보르도 그랑크뤼 클라세 등급은 160여 년 동안 한 번을 제외하고는 그 ‘신분등급’이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르고뉴 그랑크뤼 등급은 ‘포도밭’으로 아예 등급을 고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1855년 프랑스 만국박람회 때 나폴레옹 3세 요청으로 5등급의 보르도 와인 탄생
프랑스 와인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1855년’입니다. 1855년은 프랑스 만국박람회가 열린 해로 보르도 그랑크뤼 클라세 등급이 이때 탄생했습니다.
만국박람회는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 무역과 산업혁명으로 부강해진 국가의 면모를 전 세계에 과시하는 경연장이었습니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는 만국박람회의 대표 상품으로 가장 프랑스 다운 상품으로 와인을 선택합니다. 와인이야말로 농업생산물 중 가장 정점에 있는 고부가가치 상품이었고 중세부터 프랑스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기 때문이죠.
나폴레옹 3세는 보르도 상공회의소에 연락해 보르도(정확하게는 메독) 와인 등급을 매겨달라고 요청합니다. 보르도 상공회의소는 현재 통용되는 가격이 와인 등급이 될 수 있겠다고 판단해 보르도 교역상협의회를 통해 와인 가격을 수집합니다. 1855년 4월18일 상위 60개 와인을 가격 순서에 따라 5등급으로 나눈 리스트를 발표합니다. 이게 보르도 AOC 등급이 됩니다.
160년 동안 사실상 고정된 와인의 신분제도… 1등급과 2등급 와인 가격 큰 차이
지금도 와인 애호가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꼽는 라피트 로췰드, 마고, 라뚜르, 오브리옹, 무똥 로췰드 등의 대중적 명성이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이 리스트는 처음에 ‘잠정적’이라는 단어가 붙었지만 160여 년 동안 단 두 번만 바뀌었습니다.
보르도 AOC 등급이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샤또 깡드메를르가 5등급에 추가된 것을 제외하고는 120년 후인 1973년 샤또 무똥 로췰드가 2등급에서 1등급으로 격상된 게 전부입니다. 사실상 고정된 신분제도와 다를 바 없죠.
당시 샤또 무똥 로췰드를 비롯해 일부에서는 이 리스트에 공정성 등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지만 이는 아주 정확하게 산출된 리스트였습니다. 당시에는 샤또가 병입을 하기 전이어서 샤또가 포도를 수확해 와인을 담그면 중개상들이 와인을 받아 고객에게 파는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중개상들은 각 샤또들의 와인 값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이는 그대로 리스트에 반영됐다는 것이죠.
1855년 당시 1등급 와인과 2등급 와인의 가격차는 정말 컸다고 합니다. 와인전문가 조정용 씨가 쓴 ‘라이벌 와인’에 따르면 1등급 와인 4개 중 가장 비싼 와인은 라피트 로췰드였습니다. 이어 마고, 라뚜르, 오브리옹 순이었다고 합니다. 라피트 로췰드가 100달러라고 하면 마고는 85.4달러였습니다. 라뚜르는 71.4달러, 오브리옹은 42.9달러였다고 합니다.
포도밭으로 구분한 부르고뉴의 4개 등급 신분제도 더 엄격
부르고뉴 와인은 신분제도가 더 엄격합니다. 1936년 만들어진 부르고뉴 와인 등급은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가 아니라 아예 포도밭에 등급이 고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부르고뉴의 와인 등급은 포도밭에 따라 그랑크뤼, 아펠라시옹 프리미에 크뤼, 아펠라시옹 빌라주, 아펠라시옹 레지오날 이렇게 4개 등급으로 매겨집니다.
그랑크뤼는 33개 밭에서 나는 와인으로 전체 생산량의 1.4%에 불과합니다. 프리미에 크뤼는 대략 635개의 밭에서 생산되는 와인으로 전체의 10.1%로 역시 아주 귀합니다. 이들 밭을 제외한 나머지 밭에서 나온 포도로 만든 와인은 그냥 해당 마을 이름을 붙이는 빌라주급(36.8%)이거나 큰 지역 이름을 붙이는 레지오날(51.7%)이 됩니다. 아무리 와인의 품질이 좋아도 태어날 때 정해진 해당 밭의 등급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부르고뉴가 와인 등급을 이처럼 포도밭에 고정한 것은 포도의 품질이 와인의 품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와인의 재료는 오로지 포도뿐입니다. 물 한 방울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 포도가 효모의 작용에 의해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로 바뀐 게 와인입니다. 물론 포도 외에도 와인을 제조하는 생산자의 취향과 노하우가 접목돼 각 와이너리마다 개성 있는 와인이 탄생하지만 포도가 좋아야만 특급 와인이 된다고 믿는 것이죠.
보르도 그랑크뤼 클라세와는 크게 다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보르도 와인의 그랑크뤼 클라세는 이상한 점이 한 두 개 아닙니다. 1855년 제정 당시 와이너리의 와인 제조능력에 따라 등급을 부여했지만 이후 와이너리 주인과 제조 담당자가 바뀌어도, 심지어 포도나무와 그 품종이 바뀌어도 160여 년 전 등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160여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보르도의 그랑크뤼 클라세, 그 등급 체계는 지금도 제대로 맞아떨어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