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30년 전엔 초점, 조리개, 셔터스피드 3가지 기본 조합을 적절하게 손으로 하나하나 조작해 주어야 오롯한 이미지를 기록할 수 있었다. 이시절 '카메라'는 사용하지 않을 땐 장롱 깊숙이 모셔두는 귀중품이었다. 우리 집 카메라는 나와 동갑이었는데, 부모님이 사용하시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자식들도 찍어 주시지 않았으니 아마 사용법을 모르셨을 거라고 생각된다. 80년대 중반 그 사진기로 기록된 단 한 장의 사진이 있는데, 가족 나들이로 간 행주산성에서 지나가던 사람에게 부탁해 촬영한 것이다.
고등학교에 가니 사진동아리가 있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카메라 사용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만져 볼 수 없게 장롱 깊숙이 있었던 기계도 나이가 들어 손에 닿는 곳으로 나와 있었다.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동아리에 가입했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이 전공 결정에 영향을 끼쳤고, 결국 '이미지'와 관련된 일을 17년째 하면서 살고 있다.
공장생활 3년 정도 지났을 무렵 근본적인 질문이 시작됐다. 무엇을, 언제, 어떻게, 왜 기록해야 하는가는 학교와 회사에서 배웠지만 '이미지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질문 자체를 인지하지 못해 놓쳤거나 찾지 않았겠지만). 아마도 취미로 삼았으면 하지 않아도 될 생각들을 본격적으로 오랜 시간 하다 보니 발생했으리라 생각된다.
문자, 오디오, 사진, 동영상. 현재 이용되는 모든 미디어는 이 4가지 텍스트의 조합으로 구성된다. 이 4가지 중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텍스트 정보량이 월등히 높다. 정보량이 높은 만큼 상대적으로 객관적일 가능성이 높고 그만큼 사실일 가능성도 높다고 인식된다. 이러한 특징은 특히 저널리즘 영역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고, 현재도 대체 어려운 텍스트로 취급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이미지는 연필로 거짓 문장을 한 줄 쓰는 것처럼 쉽게 조작할 수 있다. 사실로 받아들여지도록 그 조작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다. 여러 유형과 다양한 사례들을 찾으면 찾을수록 이미지에 대한 신뢰가 옅어졌다.
이런 불신은 오래되어 상처 부위에 떨어지지 않는 딱지처럼 되어버렸다. 항상 자각되진 않지만, 잠깐 돌아보면 늘 만져지는 가렵고, 딱딱한 상처.
빔 벤더스 감독의 '리스본 스토리' 마지막 대사는 '이미지'라는 텍스트의 '진실성'에 대한 고민이 녹아있다고 생각된다. 생산하는 미디어의 종류는 다르지만 그의 시선은 내가 관찰한 '이미지'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 아마도 그 반가움에 졸다가 벼락같이 깼을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2001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반영이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을 감추고 변질시킨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부재를 감춘다.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어떠한 사실성과도 무관하다: 이미지는 자기 자신의 순수한 시뮬라크르이다.
보르리야르의 생각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미지는 특정 시공간을 기록한 실재가 아니라 거기서 파생한 새로운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브라질 이과수 폭포를 보면서 어떠한 미디어와 방법을 동원해도 이 현장을 오롯하게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극단적 사례이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수시로 사용하는 스마트폰 촬영도 모든 상황에서 마찬가지다. 그대로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결국 선택과 표현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해관계가 높은 이미지 일수록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프레이밍 단계를 거치게 된다.
좋은 방송뉴스는 이 같은 이미지의 특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보다 객관성과 공정성을 담보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