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편의 감상작 소개, 리뷰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역대급으로 전쟁과 같은 티켓팅을 방불케 했다. 대형 상영관이었던 소향시어터가 상영관에서 제외된 탓도 있을 것이고, 전반적인 상영작들의 러닝타임이 증가하며 시간표 구성 또한 매우 빡빡해졌다. 그럼에도 주변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감사하게도 원하던 모든 티켓 예매에 성공했고, 10/06(금)~10/11(수) 일정으로 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했다. 총 19편의 영화를 관람했고, 각 영화들에 대한 감상을 짧게 정리해 보았다.
1. <약속의 땅> (The Promised Land, 2023) - 니콜라이 아르셀
"황무지에서 일궈낸 감자, 척박한 세상에서 일궈낸 가족"
매즈 미켈슨 주연의, 17세기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황무지 개척에 힘쓰는 사생아 출신 퇴역 군인의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다. 신분 상승에 대한 강한 열망과 편법과 노동착취를 마다하지 않는 무도한 주인공이,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일종의 대안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며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는다는 그런 진부한 플롯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황무지의 쓸쓸함을 강조하는 훌륭한 촬영과 주조연들의 두말할 것 없는 연기가 극을 흥미롭게 이끌어나간다. 또한 중세 유럽 배경에 남성 캐릭터가 주연임에도 불구하고, 극의 주요 전환점을 제공하는 계기는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여성 캐릭터들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여성 서사 영화로도 볼 수 있겠다. 상업 영화로서도 상당히 재밌고 매즈 미켈슨이 매력적인 연기를 보여주기에 꼭 정식 개봉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올해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2. <더 비스트> (The Beast, 2023) - 베르토랑 보넬로
"갑작스럽게 집 안으로 날아 들어온 비둘기는 마치 재앙과도 같고, 이런 급작스러운 재앙은 우리의 삶에서 자연재해, 가정의 붕괴, 주거침입, 감정의 상실, 컴퓨터 바이러스 등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다가온다. 이제 그 비둘기가 사랑이라는 형태로 내 문 앞에 찾아온다면,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과연 그 문을 열어젖힐 수 있을까?"
레아 세두와 1917 등으로 친숙한 조지 맥케이 주연의 영화. 그린 스크린을 배경으로 연기하는 레아 세두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이 영화는 평범함을 거부하고 일종의 실험 영화, 전위 영화라며 선언하는 듯하다. 3개의 시간대가 교차되는 구성, 주인공 커플의 여러 세대에서 배경을 바꿔가며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듯한 결말부에 QR코드로 엔딩 크레딧을 대체하는 대담함까지, 평범한 영화로 기억되지 않길 바라는 감독의 강박마저 느껴질 정도였으며 꽤 성공적인 시도였다고 평한다. 데이비드 린치 영화에서 볼 법한 몽환적인 이미지와 난해한 이야기가 매력을 발하지만, 특유의 난해함 때문에 거부감을 느낄 관객도 많을 법하다. 올해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3. <납치> (Kidnapped, 2023) - 마르코 벨로키오
18세기 이탈리아, 볼로냐의 유대교 가정에서 생후 6개월 된 아기가 부모 몰래 세례를 받고, 이 사실이 교회에 밀고되어 아이는 교황청으로 ’ 납치‘당한다. 이후 아이를 되찾기 위한 부모와 아이가 교황청에서 겪는 이야기를 다룬 실화 바탕 영화. 장르적인 재미도 출중하고, 묵직한 결말과 끊이지 않는 유머, 입체적인 캐릭터들까지 거장 감독의 노련함이 엿보인다. 무엇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흥미진진하게 관객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서, 순전히 재미로만 따지면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재밌게 본 영화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올해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4. <프렌치 수프> (The Taste of Things, 2023) - 트란 안 홍
"대등한 관계와 존중, 이해에서 비롯되는 편안함과 따뜻함"
베트남에서 프랑스로 활동 영역을 넓힌 후 계속 죽 쑤기만 하던 트란 안 홍 감독의 신작이다. 배고플 때 보면 큰일 날 영화고(정말 요리 맛있게 한다) 요리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사뭇 묻어난다. 그러나 단순히 요리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오랜 기간 함께해 오고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할 줄 아는 대등한 관계에서 오는 편안함과 따뜻함, 안정감이 느껴지는 영화다. 여성을 단순히 요리해 주는 존재로 한정 짓는 것이 아니라 요리 비평가인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 줄 수 있는 의지할 수 있는 삶의 동반자이자 이해자로 대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감상적으로 다가온다. 쥘리엣 비노쉬의 호연도 두말할 것 없이 훌륭하며, 정신없는 요리의 과정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촬영 테크닉이 인상적. 올해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 그린나래미디어 수입 (개봉 시기 미정).
5.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2023) - 요르고스 란티모스
"질투하고, 소유하고, 억압하려 드는 가여운 존재들에게 집약되는 란티모스 세계의 부조리함"
두말할 것 없이 올해 최고의 화제작 중 한 편이며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최고 인기작이라 할 수 있다. 기존에는 세계의 법칙 자체에서 유발되었던 부조리함이, 이번 영화에서는 여성을 소유하고, 속박하고, 억압하려 드는 남성성 그 자체로 집약된다. 그렇기에 꽤나 노골적인 페미니즘/성해방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인간 실존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촬영과 미술, 음악 모두 예술적인 경지에 이르렀고 각본 또한 전작들에 비해 진일보했다는 개인적 평. 또한 엠마 스톤의 온몸을 불사르는 호연은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을 기대해 봄 직하게 만든다. 월렘 대포와 마크 러팔로의 연기 또한 아주 인상적. 첨언할 것으로, 수위가 생각 이상으로 매우 높으니 관람에 주의를 요한다. 올해 베니스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내년 1분기 개봉 예정.
6. 블라가의 마지막 수업 (Blaga's Lessons, 2023) - 스테판 코만다례프
불가리아 영화로, 남편이 죽고 모아둔 묘지/묘비 비용을 전화 사기로 모두 잃어버린 전직 국어교사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배우의 처연한 연기가 묵직하게 다가오며, 정직하고 선량하던 시민이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선택을 하게 되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관객 또한 그 처연함에 자연스레 물들게 된다. 특정 시퀀스들에서 꽤 훌륭하게 긴장감을 자아내며, 이게 영화 전반에 흐르는 처연함과 결부돼 생각지도 못하게 숨쉬기도 힘들 정도의 서스펜스를 제공한다. 불가리아 사회의 빈부격차 등 현실에 만연해있는 문제와 제도적 허점, 그리고 세대 간 갈등 등을 이야기에 적재적소에 녹여놓았으나 주인공이 불가리아에 대응되는 것이 너무 일차원적인 감 또한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매우 훌륭하게 잘 빠진 스릴러였다. 이번 영화제에서 생각지 못한 발견 중 하나.
7. 더 킹 타이드 (The King Tide, 2023) - 크리스찬 스파크스
"자연의 선물을 당연하게 여기는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포크 호러적 우화"
자연과 교감해 물고기 등을 불러들이는 능력, 주변 사람들의 병과 상처를 치유해 주는 초능력을 지닌 여자아이가 어느 날 우연히 바닷가로 떠밀려오면서 고립된 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10여 년이 지나자 아이는 어느덧 마을 사람들을 치유해 주는 일을 맡아하고 있고, 그러던 도중 모종의 사건으로 아이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마을 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벌어진다. 일종의 고립된 환경에서 벌어지는 포크 호러 장르를 변주했다 할 수 있는데, 점점 이성적 판단을 잃고 광기에 휩싸이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섬찟해진다. 등장인물들이 상당히 입체적이라 그들의 비이성적인 판단도 어느 정도 수긍이 되며, 어느 정도는 예상이 가는 듯한 결말도 약간의 변주가 가해지며 흥미롭게 다가온다. 중간중간 보이는 인서트 숏의 촬영이 상당히 인상적. 개인적으로 꽤 마음에 들었고, 이번이 두 번째 장편이라고 하던데 감독의 전작 또한 궁금해졌다. 생각지 못한 발견 두 번째.
8. 안젤름 3D (Anselm, 2023) - 빔 벤더스
<베를린 천사의 시> (Wings of Desire, 1987) 등 비주얼리스트로서 명성을 떨치던 빔 벤더스 감독의 신작 다큐멘터리. 이번엔 안젤름 키퍼라는 독일 예술가의 작품과 작품론,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선보였다. 영화는 현재 노년의 안젤름 키퍼 본인에 더해 유년기를 연기할 배우를 따로 캐스팅 후 촬영 후 이 둘을 교차 또는 결합해,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적인 구성을 넘나들며 VFX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이를 통해 실제 존재하는 것만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것이라 생각했던 다큐멘터리의 형식 자체를 더 확장해 인생과 예술을 더 효과적으로 영화 속에 담아내며, 감독의 장기인 비주얼 또한 여기서 빛을 발한다.. 개인적으로 3D 기술 자체에 회의적인 관객이었는데, 여태 본 3D 영화 중 가장 기술을 효과적으로 접목시킨 영화로 느껴졌다. 꼭 3D로 관람해야 본 영화의 진가를 느낄 수 있을 듯하며,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법한 훌륭한 영화적 체험이었다. 다만 예술 다큐멘터리답게 상당한 졸음을 유발해 일요일 오전 타임에 관람하긴 알맞지 않았다(고백하자면 초반 40분 정도를 기절했다). 올해 칸 영화제 스페셜 스크리닝 부문 초청작.
9. 더 골드만 케이스 (The Goldman Case, 2023) - 세드릭 칸
"정체성 정치의 격돌이 되어버린 법정, 누구도 진실을 확신하지 못하는 혼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묵직함"
격동의 70년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실제 벌어졌던 극좌파 운동가인 골드만이 강도 살인죄로 기소된 후 벌어지는 재판을 엮어낸 영화다. 무엇이 진실인지조차 불명확하고 계속 교차되고 부정되는 증언의 릴레이를 보고 있노라면 관객도, 영화 속 증인도, 배심원도, 방청객도, 판사도, 심지어 피고인 본인조차도 진실이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게 된다. 영화는 과하리만치 실제 사건 기록들을 그대로 재구성해 영화 속에 담아내는 데에만 치중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에 반해 배우들의 연기는 상당히 극적인 톤이라 여기서 오는 이질감이 약간 있다. 그러나 결말의 묵직함과 흥미롭게 전개되는 재판 과정에 몰입하다 보면 관객 본인도 배심원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법정 드라마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필히 관람해야 할 영화. 올해 칸 영화제 감독 주간 초청작.
10. 아모레의 마지막 밤 (Last Night of Amore, 2023) - 안드레아 디 스테파노
이번 영화제에서 미리 예매하고 가지 않고 현장에서 예매한 것 중 하나였고, 평 또한 미묘했기에 가장 불안감이 있었다. 그러나 필름 누아르 장르를 애정하기에 고민 끝에 선택했고, 결과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정직하게 근무해 오던 은퇴 직전의 경찰이 은퇴 마지막 날 불법적인 일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는 필름 누아르 장르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심심한 각본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과하리만치 느껴지는 음악의 활용과 은퇴 파티를 기점으로 두 번 반복되는 영화의 구성이 상당한 흥미를 유발한다. 화려한 총격 씬 하나 없이 오로지 긴장감과 돌이킬 수 없는 범죄 속으로 휘말려가는 주인공의 모습에 집중하는 각본이 필름 누아르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감상이 즐거웠던 영화.
11. 마른 풀에 관하여 (About Dry Grasses, 2023) - 누리 빌게 제일란
"이미 말라비틀어져버린 풀의 생(生)에 대한 동경"
터키 영화계 거장 감독인 누리 빌게 제일란의 신작이다. 시골 마을의 교사로 부임하고 있는 주인공이 동료 교사, 총애하던 여학생, 소개받게 된 여성 교사 등과 엮이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그 안에 현재 터키 사회의 정치적 갈등과 양극화 등 현존하는 문제점을 녹여내고 있다. 감독 특유의 터키의 황량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내는 촬영은 여전하고, 대화의 티키타카가 예상외로 훌륭해 200분에 근접하는 러닝타임이 지루할 틈 없이 지나간다. 감독의 영화 중에선 가장 대중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겠으나, 10살 남짓 되는 학생에게마저 열등감을 느끼는 주인공의 모습은 약간 보기에 짜증을 유발할 수도 있다. 영화 중후반부에 상당히 뜬금없는 특정 시퀀스가 있는데, 영화 전체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흥미로운 시퀀스이다(자세한 것은 스포일러라 언급할 수 없다).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메르베 디즈다르의 연기는 두말할 것 없이 훌륭하나 예상외로 비중이 많지 않고, 학생 역을 맡은 에체 바슈 또한 신인이라기에 믿기지 않는 호연을 보여준다. 올해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작.
12. 클로즈 유어 아이즈 (Close your Eyes, 2023) - 빅토르 에리세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반추하는 도구로서의 영화에 대한 맹신론. 그런 영화의 소멸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는 그저 안타까움에 눈을 감아 외면할 뿐"
스페인 거장 감독인 빅토르 에리세가 <벌집의 정령> (The Spirit of the Beehive, 1973), <남쪽> (The South, 1983), <햇빛 속의 모과나무> (Dreams of Light, 1992) 이후 30년 만에 촬영한 신작이다. <벌집의 정령>의 주연이었던 아나 토렌트가 영화에서도 주연으로 등장하며, 아직 감상하진 못했지만 전해 듣기로는 <남쪽>과 맥락이 통하는 면이 있는 영화라고 한다. 세 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과 느릿한 전개가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시네마가 소멸해 가는 시대에서도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반추하는 도구로서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그런 맹신론적 관점, 그러나 동시에 이런 영화와 극장의 소멸을 지켜보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이 느끼는 안타까움에 대한 영화다. 그 안타까움을 견디지 못하고 우리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상외로 흥미롭게 이야기가 전개되는 부분들이 있었으며, 후반부 극장 시퀀스가 매우 애절하게 다가온다. 감독의 데뷔작 <벌집의 정령> 또한 그랬지만 영화에 대한 진한 애정이 짙게 묻어 나오는 작품. 올해 칸 영화제 프리미어 초청.
13.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 (Do Not Expect Too Much from the End of the World, 2023) - 라두 주데
"말초적인 숏폼 등 자극적인 콘텐츠에 감각이 지배당해 버린 21세기 인류들의 자본주의, 노동착취 고발극"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당한 논란과 충격을 가져왔고 검열판으로나마 정식 개봉까지 되었던 루마니아 영화 <배드 럭 뱅잉> (Bad Luck Banging or Loony Porn, 2021)의 감독 라두 주데의 신작이다. <배드 럭 뱅잉>이 실제 섹스 신을 노골적으로 클로즈업해 보여주고, 영화의 결말부 전체를 메타적으로 전개하는 일종의 충격 요법을 썼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조금 더 유머러스한 풍자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감독 특유의 악랄함과 과격함은 여전하기에, 이번에는 노동 이슈를 들고 나오며 틱톡 등 숏폼 미디어의 형식을 가져오는 독특한 방식을 채택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영화/방송 프로덕션 일을 하면서 과로로 얻는 스트레스를, 괴상한 필터를 낀 틱톡으로 혐오발언을 내뱉는 영상을 업로드하며 해소하는 노동자다. 영화 속 기업과 자본논리를 옹호하는 헛소리들이 등장할 때면 주인공은 여과 없이 카메라 밖(또는 안)에서 틱톡을 켜고 혐오발언을 시작한다. 이를 통해 자본논리를 옹호하며 과로를 조장하고 노동자를 억압하는 그 수많은 헛소리들이 사실 온라인상에 범람하는 혐오발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개소리라는 것을 명확한 이미지로 풍자한다. 출연자를 찾기 위해 운전과 통화, 인터뷰를 반복하는 주인공의 여정을 조수석의 카메라가 비추며 따라가는 초반부는 엄청난 지루함과 피로감을 자아내지만, 고된 노동을 간접 체험하는 일종의 영화적 체험으로 이해하자면 이 노곤함 또한 납득이 간다. 또한 이런 고된 노동 등의 문제로 인해 어째서 사람들이 틱톡 같은 저급한 자극적 숏폼 콘텐츠에 중독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현실을 이야기한다. 우베 볼이 본인 역으로 카메오 출연하는 부분도 웃음을 자아내지만, 이 영화의 백미는 단연코 후반부 30분에 걸쳐서 보여지는 롱테이크 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촬영 대상인 산업재해 피해 가족들의 황망하고 어이없어하는 표정은 마치 관객들의 표정과 같으며, 카메라 밖에서 틱톡 영상을 촬영하는 주인공, 기업 이미지만 신경 쓰는 악질적인 고용주, 그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촬영 스태프들의 모습 그 모든 것들이 융합되어 거대한 메타-현실적인 블랙 코미디 세계관을 펼쳐낸다. 거기에 더해 과연 영화 매체 자체가 자본에서 독립된 영화(independent cinema)로서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 또한 담겨 있다. 과하고 불편한 풍자가 160분 내내 이어지는 괴팍한 영화이며 수입 가능성 또한 매우 낮게 점치지만, 감독이 상영 전 영상에서 콕 집어 언급했듯이(한국에서도 노동 인권 이슈가 중요 문제라며 직접 한국의 노동 문제를 언급한 해외 뉴스기사를 화면에 띄워 보여준다) 이는 당장 이 나라에도 당면한 문제이기 때문에 꼭 모두가 보았으면 하는 영화이다. 바야흐로 ‘누칼협’(누가 칼 들고 XXX 하라고 협박했어?을 줄인 인터넷 신조어)의 시대에 딱 걸맞은 노동과 자본주의 고발극이다. 올해 로카르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
14. 추락의 해부 (Anatomy of a Fall, 2023) - 쥐스틴 트리에
"모호한 진실 속에서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찾아야 하는 개인의 추락, 가정의 붕괴, 관계의 해부학"
<시빌> (Sibyl, 2018)로 유명한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최신작이자, 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토니 에드만>(Toni Erdmann, 2016)-필자가 꼽는 인생 영화 중 하나다-으로 엄청난 연기를 보여주었던 독일의 명배우 산드라 휠러의 또 다른 호연을 볼 수 있다.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산드라 휠러의 연기가 가히 압도적이라, 올해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타지 못했던 것은 중복 수상 금지 규칙 때문이 아닐지 상당한 의심이 들 정도. 영화는 뻔한 법정 드라마로 흘러갈 수 있음에도 기나긴 재판 과정 속에서 무너져가는 관계와 상처받는 개인, 망가지는 기억(또는 추억)들에 초점을 맞춘다. 평이하게 흡입력 있던 초중반부에 비해 후반부의 전개는 상당히 인상적이며, 영화 전반적으로 촬영과 음악에서 강렬함이 돋보인다. 개인적인 평으로는 작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슬픔의 삼각형>(Triangle of Sadness, 2022) 보다 훨씬 좋았다.
15. 발리우드 러브스토리 (Rocky and Rani's Love Story, 2023) - 카란 조하르
<내 이름은 칸> (My Name Is Khan, 2010) 등의 영화로 발리우드 영화계에서 저명한 카란 조하르 감독의 최신작이다. 상영 전 감독이 영상에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마냥 가볍게 보이지만 일종의 구시대적 이데올로기(가부장제)와 현세대(여성인권)의 충돌이라 볼 수도 있다. 부천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적이 있는 <걸리 보이>(Gully Boy, 2018)에서 주연 커플로 분한 발리우드 스타인 란비르 싱과 알리아 바트가 다시 주연 커플로 등장하며, 여러 면에서 현세대 발리우드 영화계의 총결산과 같은 영화라 할 수 있겠다. 한국보다도 3~40년은 퇴보한 듯한(그러나 영화 속 상당히 많은 면에서 현시대 한국이 엿보이기도 한다) 끔찍한 가부장적 문화를 지닌 인도의 문제를 폭넓게 다루기도 하나, 그 문제제기 방식은 깊이가 매우 얕고 갈등의 해소, 관계가 진보하는 방식은 상당히 일차원적이고 단편적이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발리우드 영화를 관심 있게 지켜봐 온 관객들이라면, 이러한 이슈를 다루면서 매년 조금씩이나마 진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 이러한 미약하지만 지속적인 발전을 흥미롭게 지켜봐 오고 있는 중이다. 또한 이런 무겁고 분노를 유발하기 쉬운 주제를 다루기에, 오히려 단편적인 문제 제기와 편의적인 갈등 해결이 더 암울한 현실을 잊고 희망을 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서로가 이해하고 양보하고 존중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발리우드의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발리우드 스타일의 최정점이다. 야외상영으로 영화제에서 처음 사귄 분들과 같이 관람했는데, 시원한 밤에 이렇게 유쾌하고 따뜻하고 즐거운 영화를 보며 모두가 같이 화내고 분노하고 어이없는 전개에 실소를 머금고 뒤에서 서라운드로 감탄사를 내뱉으시는 아주머니 관객분들까지, 이 모든 요소들이 어우러져 잊지 못할 영화적 경험을 했다.
16. 모든 것의 설명 (Explanation for Everything, 2023) - 가보르 레이스
헝가리의 정치적인 대립을 첨예하게 다룬 영화다. 극우 성향을 가진 부모와 정치적으로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그 아들, 그리고 극좌 성향을 가진 고등학교 교사가 얽혀 아들의 졸업 시험에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 영화 속에선 헝가리 국기 배지가 주요하게 다뤄지는데, 독립기념일이 아닌 날에 헝가리 국기를 드러내는 것은 일종의 극우적인 의사표현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예시로, 마치 한국 사회에서 태극기 부대 등의 극우 집단에 의해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과도 맥락이 상통한다. 그렇기에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정치적 갈등과 부모/자식세대 간의 갈등, 심지어 언론의 보도 관련한 문제들까지 전부 한국에 대입해도 크게 무리 없을 수준의 익숙한 이야기다. 영화가 조금 아쉬웠던 지점은 문제 제기에는 열심이지만 나름의 답을 찾는 데에선 회피한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지점일까. 그러나 저예산임에도 영화적 완성도는 출중한 편이며,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로 유명한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초기작 또한 연상된다. 이후 행보가 기대되는 감독. 올해 베니스 영화제 오리종티 대상 수상작.
17.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Evil Does Not Exist, 2023) - 하마구치 류스케
"제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너희는 우리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을지니. 그것은 너희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지하기 때문인 것을"
명실상부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최고 화제작이라 할 수 있겠다. 기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해피 아워> (Happy Hour, 2015), <아사코> (Asako I & II, 2018), <드라이브 마이 카> (Drive My Car, 2021), <우연과 상상> (Wheel of Fortune and Fantasy, 2021) 등의 영화와는 결이 상당히 다르다. 초기 기획 자체가 영화가 아니라 음악가의 공연에 필요한 영상 제작이 목적이었고, 그 영상 촬영 과정에서 자연스레 발전되어 지금의 영화가 반쯤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주연 배우는 옆에서 차를 운전하던 연기 경력이 전무한 프로듀서이며, 영화의 각본 또한 일반적인 논리에서 상당히 벗어난 결을 보인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바는 상당히 직설적이고 명확하며, 개인적으로는 비가역적인(돌이킬 수 없는) 행위를 일삼는 무지한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영화로 이해했다. 촬영이 일반적인 영화문법을 따르지 않기에 기이한 힘을 지니고 있으며(하마구치 류스케의 스승인 구로사와 기요시의 호러 작품들을 연상케도 한다), 음악이 모티프가 된 영화답게 사운드 또한 훌륭하다. 개봉 이후엔 상당히 많은 해석과 이야기가 오고 갈 작품일 것이라 확신한다.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은곰상) 수상작, 그린나래미디어 수입, 내년 개봉 예정.
18. 본인 출연, 제리 (Starring Jerry as Himself, 2023) - 라우 첸
"평생을 선량하게 일해온 자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시련처럼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지탱해 주는 가족이 있고 그 과정에서 다시 찾은 열정이 있다. 사실 그거면 삶을 살아가는 데 충분한 걸지도 모른다"
미국에 살고 있는 은퇴한 중국계 남성이, 어느 날 중국의 비밀경찰에게 돈세탁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전화를 받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영화의 극초반부에서 모두가 예상할 수 있듯 이는 전화 사기의 일종인데, 영화는 이를 주인공의 시점에서 마치 스파이 영화에서 첩보 작전을 펼치는 듯한 연출로 보여주며 의외의 재미를 선사한다. 특기할 만한 지점은 영화의 주인공 배우 분이 실제 사건 당사자이며, 자신이 당한 범죄를 영화 프로듀서인 아들과 함께 제작하고 재연하는 연기를 했다는 사실이다. 영화 속에서 보이는 주인공의 순수하고 선한 마음과 사기에 연루되는 과정이 유쾌하게 묘사되지만 그 덕분에 관객들에게는 더욱 안타깝게 다가오며,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눈물을 쏟게 만든다. 주인공 제리의 처연한 태도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꼭 수입되어서 모두가 봐주었으면 하는 영화다. 생각지 못한 발견 3. 슬램댄스 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
19. 더 킬러 (The Killer, 2023) - 데이비드 핀처
씨네필이라면 모두가 애정할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신작이다. 마이클 패스벤더와 틸다 스윈튼이 등장하는 핀처의 필름 누아르라니 상당히 기대치가 높았으나, 데이비드 핀처의 장기였던 현란한 편집과 연출이 살지 못하는 특색 없는 각본에 의해 무미건조한 매력의 영화로 다가온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무난하고 평범한 영화이지 않을까. 물론 그럼에도 기본은 충분히 하는 영화고, 장르적인 재미는 충분하다. 곧 극장과 넷플릭스로 공개될 예정이니 기대치를 내려놓고 보시길 권한다. 올해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총 19편의 영화를 관람하는 빠듯한 일정이었고, 러닝타임이 대부분 2시간 반 이상일 정도로 길었기 때문에 상당히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그렇지만 놀라운 사실은 이번 영화제에선 단 한 개도 지뢰를 밟지 않았다는 것. 가장 미묘했던 <더 킬러>나 <모든 것의 설명>도 성에 차지 않는 부분은 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흥미롭게 감상했다. 유수의 영화제 수상작, 레터박스/로튼토마토/메타크리틱 평가, 검증된 유명 감독들 위주로 시간표를 구성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지뢰를 피하기 위해 안전한 길을 선택한 결과 이전 영화제에서 있었던 보석 같은 발견은 이번에는 많지 않아서 그 점이 못내 아쉽다(물론 <본인 출연, 제리>는 엄청난 올해의 발견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운영에서 많은 잡음과 문제가 있었기에 정상 개최가 될지 미지수였으나, 이 정도면 비교적 성공적으로 개최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나 예년에 비해 현저하게 감소한 부대 행사나 푸드트럭, 부스 덕에 축제 분위기는 줄어들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년에는 정부에서 영화제 지원 예산을 50% 삭감한다고 하기에, 앞으로 영화제는 더욱 축소되고 어려워지지 않을까 예상한다. 그렇지만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의 슬로건인 "Theater is not dead"처럼, 극장은, 영화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