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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규영 Dec 20. 2019

캐릭터 성격

첫 문장만 보고도 결말을 알아채는 능력

(긴~ 휴재 끝에)

    마지막 전-전 단계다. 인물에 어떤 성격을 부여하느냐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 보자. '캐릭터'에 관한 글이다. 꼭 뭐가 옳고 뭐가 그르다는 평가가 불가능한 게, 우리는 회화에서 파란 사과를 봤을 때 "왜 사과를 파랗게 그렸냐"는 토를 달지 않는다. 어떤 객체에 어떤 색을 부여하느냐는 작가 마음대로다. 다만, 왜 그랬는지는 누구나 알 수 있게끔 하는 게 좋겠다. 얼마 전에 나온 <알라딘>을 보자.

    

그림 출처ㅣ조선일보ㅣ 나도 아무데서나 노래 부르고 다니고 싶다. 그런 영혼이 좋다

    알라딘의 성격은 어떤가? 용감하다기보다는, 쾌활하다. 경쾌하고. 일단 거리 한복판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인격인 이상(소격1)이라 쳐도) 현실에는 흔하지 않은 영웅상이다. (노래를 부르는 게 영웅이라고? 영화 <8마일>에서는 극도로 소시민에 가까운 에미넴조차 영웅이 된다.)

    이 알라딘이 소심하면 어떻게 될까? 알라딘에게 '흥부'의 영혼을 주입한다면? 대답해볼까?


    우선 도둑질 자체에 가책을 느낄 것이기 때문에 도둑질은커녕 선인으로 유명해질 것이다. 비록 가난하지만 쉬지 않고 일하며, 나눌 줄 아는 알라딘이 있을 것이다. 그런 그는 누군가에게 미움을 사기는커녕 이용당할 것인데, 만약 이용을 당해서 램프가 있는 동굴까지 갔다고 치자. 내가 봤을 때는 램프 근처도 못 갈 것 같지만.

     어찌어찌해서 램프를 구해내는 데 성공하고 양탄자와 친해지는 데는 성공할 것이다.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도둑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 민첩한 액션을 거치지는 않았을 것이며, 벌벌 떨고 있다가 저 알아서 우연히 살았거나 양탄자가 다 처리했거나 했을 테다.

    동굴을 나와서는, 소원을 빌도록 할 텐데. '도둑질을 안 했으니 만날 이유조차 없었던 공주'와 이루어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테고, 설마 만난 사례가 있더라도 여자 하나를 차지하겠다고 소원을 쓸 흥부가 아니다. 어쩌면 시킨 대로 램프를 구했으니 순순히 넘겨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본인은 돈을 받고. 끝.

    설-마-설-마 해서 알라딘의 내용과 똑같이 흘러갔더라도, 결말 부분에서는 권선징악의 구도가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흥부는 남을 해치면서까지 본인의 행복을 추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선한 인물이기 때문에. 악역마저도 행복할 수 있는 유토피아를 만들어내기 일쑤다. 가장 심각한 건, 악역이 '선함'을 일깨우지 못한다면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무한으로 반복하게 된다.

    아니면 흥부의 패배(=디스토피아)로 흘러간다든가. 그것마저 아니라면 흥부가 현실에 타협하는 내용을 만들게 될 텐데.


    이렇게, 필자가 사색한 내용을 다시 한번 검토해볼 여유가 있나? 눈을 올려서, 혹은 책장을 돌이켜서 읽어보자. 캐릭터와 상황만으로 엔딩이 정해진다. 뭔가 수상하지 않나? 하나 더 해보자.



kr.news.yahoo.com/cartoon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모두가 잘 알 테다. 나무꾼이 흥부면, 이야기는 서너 페이지 만에 끝나버린다. (놀부라면;; 포르노가 되지 않을까!) 옷을 돌려주고 끝날 테니까. 돌려주고 자시고를 떠나서, 애초에 도둑질을 않을 테다. 하나 더.

출처ㅣ이미지 하단ㅣ세상 제일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Tom이 '퉁명스럽지만 선한 면이 섞인 캐릭터'가 아니라면, 신데렐라나 흥부라면? 제리와 갈등이 일어날까? 동화 한 편이 되어버릴 것이다. 상상해보자. 착해빠진 톰을. 순진무구하고 무한한 착함을 품고 있는 톰. 요즘 말하는 개냥이 같은 순함.


    이게 무얼 말하는 것이냐면, 캐릭터가 가진 본질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캐릭터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체'다. 이끌지 않으면 캐릭터가 아니다. 실험실 리트머스마냥 용액에 흠뻑 젖는 실험쥐가 아니라는 뜻이다. 상황에 주인공을 넣으면 이야기가 진행될 거라는 오만방자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어떤 이야기를 쓸 거면', '어떤 상황이 있는 게 좋을까', '그 상황과 이야기의 주제를 어떤 성격의 인물이 가장 잘 드러내 줄까?'가 바로 고려대상, 고려 순서이다.

    문학에서는 조금 고지식한 인물, 답답한 인물, 사색이 많고 내성적이거나 소시민적 주인공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판타지에서 비굴(했으나 영웅이 될)한 인물, 또는 영웅호걸, 아니면 가진 것은 없으나 기개는 호방한, 그런 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현대의 판타지물에서는 일본의 문화가 섞인 - 개인의 사색이 짙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동화에서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극단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 액션 영화에서는 약골, 빈민, 서양 액션 영화에서는 부자, 퇴역군인이 등장하는 모든 이유는, 그래야만 주제가 살기 때문이다. 그 캐릭터가 밟아갈 길이 곧 주제로 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꼭 해야 하는 건 역시, 한국 문학도들의 주객전도 때문이다.


    아까도 말했듯, 캐릭터는 리트머스지가 아니다. 상황에 '압도'되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질문이 있을 수 있는데. "당연히 상황에 따라 캐릭터가 움직이는 게 아니냐"라고 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근데 '압도'되지는 않는다. 주인공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 짙은 나머지, 특히나 페미니즘/고발/부조리 고발/풍자에서 캐릭터를 피해자로 두거나 어느 한 사상에 경도된 채 두는 경우가 많다. 어떤 변증법적 결론을 내기에 부적합한 인물들(어려운 말은 넘어가자!/ '불만에 가득 찬 인물들'로 바꿔 읽어도 좋다.)로 주인공을 두는 경우가 많다. 관찰자로 두는 건 양반인 수준이다. 그렇게 되면, 캐릭터는 매력이 떨어지고, 상황은 던져지고 불만을 토로하기만 하므로, 그것은 하등 대자보나 논설문에 그쳐진다. "이런 상상의 상황이 전개되면, 이 세상, 정상인가요?"라고 투덜대는 데 그친다는 것이다.

    캐릭터가 주어진 상황에 패배하고 승리하면서 인생에 그래프를 그리는 것이 '소설'이라는 것은 문학도라면 알 것이다. (루카치.......인데, 어.... 하여튼, 그냥 그렇다고 알자.) 그리고 문학적 포즈를 취하면서 '패배'의 회화를 그리게 될 테다. 극악무도한 상황에 작가의 자아를 내던지는 형태로 이뤄질 테다. 본인의 경험에서 가장 부조리하고 어처구니없던 일을 나름 담담하게 풀어내겠다고 가상의 피해자를 생성해낼 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러지 말자.

    '실패'라는 것은 좌절스러운 상황에 직면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패배하는 캐릭터는, 농구를 처음 하는 사람의 드리블처럼 실패하기 마련이다. 인생 2회 차가 아니기에 미숙하지만, 그 또한 농구다. 연습이랄 게 없었으니 무너져도 당연하다. 가장 중요한 건, "공이 이상하네!" 하며 투덜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게 문학 캐릭터의 실패다. 슛에 성공하면? 가다듬지 못한 운 좋은 한 발일 뿐이다.


    정리하자면, 캐릭터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존재이므로 당신의 생각보다 튼튼하다는 것이다. 전 재산을 뺏긴다고 자살을 할 건가? 파산 신청하고 바닥부터 시작해야지. 당장 본인들도 그럴 거면서 캐릭터나 본인의 자아에게 너무 혹독한 처사를 내리진 말자.

    특정 캐릭터가 특정 주에게 알맞고, 특정한 이야기에 알맞은 것은 자명 사실이다. 그건, 캐릭터마다 담당 파트너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 캐릭터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의 차이다. 캐릭터의 성격이 정해지면, 행동의 가짓수가 확 줄어든다. 결말로 향하는 가짓수 또한 줄어든다. 그 캐릭터로 보여줄 수 있는 주제의 수 역시 줄어든다. 이런 것을 '좁아진다'라고 표현한다. 결말이 좁혀지고 좁혀지는 것은, 첫 문장, 첫 문단, 혹은 주인공의 성격을 보자마자 대부분 정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글을 쓸 때, 이야기의 개연성을 축소해나가며 글을 쓸 수 있겠다. 본인이 드러내고 싶은 주제나 결말로 나아가려면, 전혀 다른 길로 나아가지 않는 노련함을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캐릭터와 상황을 합쳤을 때 대체로 결말이 정해진다면, 그 반대 역시 유추가 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주제를 먼저 생각했다면, 캐릭터와 이야기(상황이든)를 유추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조합의 가짓수 또한 그리 많지 않다. (신선한 결과를 내놓고 있는 게 현대 문학이기도 하다.)

    매번,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사회의 이런 부분을 지적하는 거야." 혹은 "이 문단, 이 문단이 대치되고 있어." 내지 "이 문장을 봐, 잘 썼지."라든가. "한국 사회는 주인공을 이렇게 내몰고 있는 거야."라는 말로 본인 글을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잘 쓰는 사람은 정 반대로 이야기한다.

    "읽어보니까 어때, 재밌냐?"


다음 글은 똑같은 주제로, 조금 쉽게 쓴 판을 올리겠다. '글을 처음 쓰는 사람'역시 저격해야 하므로.



1) 소격효과: 낯설게 하기. 몰입도를 일부러 낮추는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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