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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들(1)

by 가제트

누나들(1)



사내아이들에게 ‘누나’ 혹은 ‘누이’라는 호칭은 ‘엄마’라는 단어만큼 따뜻하다. 더구나 남동생만 달랑 하나 있는 장남인 나로서는 ‘누이동생’보다 ‘누나’를 더 목말라했다.


어릴 때 가정일을 도와주던 7,8살 터울의 누나가 있었지만 그건 고추 내놓고 누나에게 목욕을 당하던 때라 ‘누나’라는 존재에 대해 무감각했다. 그 누나가 시집간 후로 특히, 사춘기 이후로는 누나가 있는 친구가 그렇게 부러워서 괜히 공부한답시고 친구 집에 찾아가서는 누나와 손목 맞기 가위바위보 등을 하며 누나의 부재를 채우곤 했다.


나에게도 그런 ‘누나’가 생긴 건 그러니까 재수 생활이 본 궤도에 오른 79년 5월쯤으로 기억한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학원 동기지만 여자에 관하여는 숙맥인 친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여자 친구가 생겼는데-정말 기이한 일이었다- 같이 만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핵심은 지들 연애할 때 심심치 않게 들러리를 서 달라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나불대기 좋아하던 시절이라 기꺼이 응답하곤 자주 학원을 탈출하여 그녀가 다니던 M대학을 같이 드나들게 되었다.


그런데 그 녀의 옆에는 항상 붙어 다니는 언니라는 누나뻘 되는 여자가 있었는데 넷이서 자주 같이 어울리다 보니 그 언니는 자연스럽게 나의 누나가 되었다. 국문과인 데다 나보다 4살 정도 많았으니 주로 문학이나 철학 쪽 얘기가 자연스럽게 오고 가게 되면서 이젠 친구의 들러리가 아니라 둘만 따로 만나기도 하였다.


호(號)도 있었는데 ‘아화’라고 했다. 우리는 만나면 책과 철학에 대해 얘기했다. 재수생 주제에? 그 딴 건 상관없었다. 적어도 나와 대화가 되는 상대를 만났다는 기쁨에 우린 책을 서로 빌려 봤고, 그 책에 대해 얘기했다. 린드버그, 칸트가 기억난다. 그때 메모한 <바다의 선물>의 몇몇 구절은 아직도 생생하게 머리에 남아 있다. 이래서 남, 여가 같이 공부하는 반의 성적은 필연적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으리라.(나만 그런가? 혹 어떤 놈들은 정신이 혼미해져서 성적이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칸트, 하필 <순수이성비판>부터 시작했다. 따라서 잠깐 동안의 공부로도 철학과에 대한 미련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그러나 공부도 겸해야 하는 재수생이어서 시험이 다가오면서는 만남을 잠시 미뤘지만 오래 걸리진 않았다. 대학생이 된 나는 신입생의 기쁨과 낭만을 즐기면서도 누나와의 만남을 지속했다. 그 때는 詩와 키에르케고르에 더 관심을 가지고 얘기하곤 했다.


유명한 정치가들 중에는 안 거친 사람이 많지만, 대체로 한국의 정상적인 남자라면 반드시 거치게 되는 군대를 들어가면서 휴가 때의 잠깐 동안의 만남을 제외하면 누나와는 편지로만 만났는데 중고참이 된 어느 날 날아온 편지 한 통이 내 가슴에 뻥하고 바람구멍을 뚫었다. 편지와 동봉한 청첩장이었다. 나도 아는 그 M대학 국문과 형과 결혼을 한다는….


중고참인 데다 본부 소대 소속이라 결혼식에 가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결국 가지 못했다. 갑자기 배가 아파서 못 가서 되어 미안하다는 답장만 쓰고는 결국 두 번 다시 못 보고 말았다.


죽고 못사는 그런 사랑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을 빼앗겼다는 그런 감정이었다. 좀 더 철이 들고 나서는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끊어진 줄이었다. 연결고리였던 그 친구도 애인과 헤어져 수소문할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첫 ‘누나’는 가버리고 말았다. 아쉬움과 그리움만 남긴 채……


그 이후로도 ‘누나’ 결핍증은 습관적으로(?) 연상인 여자를 따라다니느라, 동아리에서도 동기보다 여자 선배를 더 가까이하는 바람에 여자 동기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눈높이는 언제나 조금 위로 향해 있었다.


내가 따라다닌 여 선배들은 다 나에게 잘해줬지만 그 ‘아화 누나’와 같은 포근함과 격조 있는 대화는 그 이후 만난 누나들과는 나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민을 오고 얼떨결에 캘거리 문인 협회에 들어오고 나서 운정 누님을 만나게 되었다. 첫 몇 년간은 문협 회원으로서 만났지만 그런 만남 가운데서도 따스함과 품위를 느끼게 되었고 무엇보다 글을 잘 써서, 난 나의 두 번째 ‘누나’로 삼았고 나이 차가 조금 나서 누나라고 부르기보다 누님으로 불렀다.


주간 신문 편집장도 겸하고 있어서 시간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나자고 하면 흔쾌히 만나 세상 사는 얘기며 그동안 발표한 글에 대한 얘기 등을 나누곤 했다. 그러다가 2016년 가을, 결국 누님을 괴롭히던 병마에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례식장에서 누님의 남편께서 오히려 절 위로하시며 ‘이제 누님을 못 봐서 어쩌누…’하실 때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가 없는 이곳에서 그나마 엄마의 따스함과 비슷한 ‘누나’의 포근함을 느끼게 해 주시던 분이 떠나니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우울하였다. 나란 남자는 아내 외에 문학과 철학을 논하며 때론 따스하게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누나가 필요한 모양이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런 분이 나타날 것 같지 않다.


첫 ‘누나’는 나의 변변치 않은 질투심으로 인해 이별하게 되었고 두 번째 ‘누님’은 병마가 앗아버렸다. 이제 남은 생에서 세 번째 누나를 만날 수 있을까?

그런데 하늘은 내 염원을 들으셨나 보다.

그리하야....


세 번째 누님부터는 다음으로...


사진을 무엇을 첨부를 할까 찾아보다가 운정 누님과 함께했던 2015년 캘거리 문협 시화전 사진이 있어서 첨부해본다.


20150919_164658.jpg 2015년 캘거리 문인협회 시화전


이왕 그 때 사진 올린 김에 가제트 시를 서예로 쓴 작품도 같이 올리자


취월 서예로 쓴걸 찍음-1.jpg 글 밑에 가제트 이름과 서예가 이름은 지움.

이 시도 브런치에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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