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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딜김 Aug 13. 2020

보호라는 이름의 학대, 학습되는 왜곡된 성취주의

<이상한 정상가족> 을 읽고 생각한 것


약 10년 전, 한창 교내 체벌금지법의 시행 여부가 화두에 올랐던 적이 있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교내에 만연하던 체벌이 금지되면 학교에 대단한 혼란이 일어나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일각에서는 체벌을 금지하면 원활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논란이다. 논란거리가 되지 않아야만 하는 이슈에 찬반이 나뉘던 시절이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세상이 이렇게 변했다.

<이상한 정상가족>을 읽었다. 사실, 지금까지 나에게 가장 익숙한 가족에 관한 담론은 가부장제에 관한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미혼모나 다문화 가정에 관한 것이었던 듯 싶다. 이 책에서도 분명 그 주제들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책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소재는 아동에 관한 문제다. 아동 체벌에 관한 문제는 분명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가족 문제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문제에 무지했다. 신체적인 체벌은 결국 부모-자녀, 교사-학생 등의 위계적인 질서와 약자를 향한 강자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결국 ‘맞을 짓을 했다’라는 말이 근거를 얻게 되는 셈이다.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인식은 몇 년에 걸쳐 보편화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내가 중학생 때나 지금이나, 보호라는 명목의 학대는 아주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아이를 방임하거나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학대라는 인식이 보편적인 것과는 달리, 과보호와 같은 문제는 ‘부모님이 너희를 너무 사랑해서’ 혹은 ‘다 자식 잘되라고 하는 일’이라는 등의 명목 아래 허울 좋게 포장된다.


내가 책에서 주목한 부분은, 가족주의가 어떻게 한국의 비정상적인 교육열을 만들어 내는 데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서술한 부분이다. 항상 한국의 기형적인 교육 구조의 원인을 학력주의의 측면에서만 생각해 왔는데, 가족주의와 학력주의의 관계 또한 공고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족 구성원의 개별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가 ‘개인’이 아닌 ‘가족’의 경쟁 구도를 만든다는 것이다. 아이를 개별성은 아이를 '미래의 희망'으로 여기고, "아이의 '현재의 행복'에는 별 관심이 없고 유년기 자체를 하나의 독립적인 인생의 단계, 시기로 간주하지 않는(p.244)"가족에 의해 무시된다.


남들도 다 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의 바탕엔 불안의 심리가 자리 잡고 있다. 이거라도 안 하면, 나만 안 하면 치열한 경쟁구조에서 내 아이만 낙오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어느 영화 제목처럼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시대다.  (p. 181)
" ... (생략) ... 내 선택으로 삶을 만들어왔다는 생각의 이면에는 나를 위해 헌신한 부모의 기대를 번번이 배반하며 살아왔다는 죄책감이 여전히 남아 있다. 가족주의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나 역시 가족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셈이다. (중략) 자녀의 수가 줄어든 요즘에도 교육을 중심으로 한 ‘부모의 희생과 헌신, 자녀의 보답’을 아름다운 관계로 바라보는 오래된 가족주의의 경향은 약해진 것 같지가 않다. " (p. 183)


위처럼, 가족의 과잉기대에서 비롯된 과'보호'는 폭력이 아닌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자녀가 그 '헌신'을 정말 바래왔는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자녀에게는 일종의 부채감이 생기게 된다. 헌신은 곧 선한 것이 되며, 부모의 헌신을 통해 얻게 된 자신의 위치는 "내 선택으로 삶을 만들어왔다"는 개별성은 지워진 채, 다시금 가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에 빠지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책 중에,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라는 책이 있다. 오찬호 씨가 쓴 책인데, 나는 이 분의 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읽었다. 내가 이 분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책들에 내가 살아오면서 느낀 온갖 불편함이 집약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 전까지는 내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해서, 또는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짚지 못해서 괜히 나만 예민한건가? 싶었던 문제들을 속 시원히 긁어 준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역시 그랬다. 요즘 인기있는 <선량한 차별주의자> 역시 이와 비슷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직관적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의 삶에 보편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비가시적인 차별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정당화되는지를 생각해 볼 계기를 만들어준다.


여기서 이 책을 언급하는 이유는, 부모의 통제가 어떻게 '차별에 찬성하는' 자녀를 키워 내는지를 생각해 볼 만하기 때문이다. 왜곡된 성취주의는 과보호 구조 내에서 학습된다. 어린 시절, 소위 ‘공부해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야’로 대표되는 명목 아래 행해진 부모의 '헌신'은 왜곡된 성취주의적 사고를 내면화하게 한다. 이 때문에, 성취에 따른 노력(대개는 공부)의 여부를 차별의 정당한 근거로 사용하는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의 모습은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성취한 자'의 잠재된 우월의식은 비교적 극단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개는 비가시적인 탓에 은연 중에만 드러난다. 예전에 학교 사람들이랑 얘기를 하다가, 자기가 만약 자식을 낳으면 외고에 보낼 것이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많은 것을 보고 나는 정말 놀랐다. 기형적인 구조에서 나고 자라 독립성을 가진지 몇년이 채 되지 않은 우리들은 이 구조를 지적할 수 있는 최전선에 위치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해 외고에 '보낸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또한 어쩌면 학력주의의 수혜자로써, 구조를 비판하는 위치에 서기보다 구조의 편에서 구조를 이용하는 쪽을 택하는 모습은 결국 구조의 대물림을 낳을 것을 알기에 씁쓸했다.


극단적인 사례는 평범한 사례를 가려지게 만든다. 그래도 나는 그 정도는 아니다, 하면서 자신의 상황을 논의에서 배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가 학대인지를 정하는 경계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행동 역시 누군가에게는 학대일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할 수 있는 반성적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스토킹이 사랑이라고 말하던 때가 불과 몇 년 전이다. 이처럼, 자녀에의 과보호가 학대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 역시 몇 년 후에는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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