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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딜김 Aug 13. 2020

불교와 곤도 마리에의 교집합

대청소를 하며 생각한 것

어제 오늘 방 대청소를 했는데, 공교롭게도 요즘 듣는 오디오북(지대넓얇0)에서 불교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 시점이었다. 또 공교롭게도 요즘 신박한 정리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것을 보아 다시 곤도 마리에식 정리-그 논란과는 별개로-가 유행할 조짐이 보인다. (혹은 당근마켓의 부상에 대항하는 번개장터의 제작지원이라던가.. )그래서 넷플릭스 다큐 곤도 마리에의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를 보면서 방정리를 마무리했다.

어제 오늘 중고거래를 세번을 했다. 한번은 무료나눔을 했고, 나머지는 여러가지를 모아 실제 가치보다 말도 안되게 낮게 팔았다. 어짜피 나눔하거나 팔지 않으면 방에 처박혀있거나 버려질 거라.


나는 사실 뭔가를 버리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편이고, 뭔가를 너무 소중히 여겨 '아끼는'것도 잘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식의 정리는 나에게는 좀 쉬운 편이다. 그렇다고 내가 '정리'를 잘 하고 산다는 소리는 아니고 (감당할 수 없을 때까지 미루는 편), 버려야만 할 때 뒤도 안 돌아보고 버린다는 뜻이다. 스스로의 감정에는 그게 잘 안되는데 물건에는 그게 잘 된다는게 신기하다. 물건에 별다른 감정을 부여하지 않아서인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물건과 감정을 분리해서인 것 같기도 하고.


물건을 버리면 그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듯이, 그때의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매개로써 그 물건이 유일하지는 않다. 그때의 내가 가졌던 감정이 물건의 개수나 가격으로 정량화되는 것은 어쩐지 좀 서운한 일이다. 내가 산 물건이 곧 내가 아니듯, 내가 물건과 나를 분리하는 법을 아는 것처럼, 내가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과 상황이 흘러간다는 것 또한 깨달아야 하는데, 왜 그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물건에 집착할 필요가 없듯, 순간에 집착할 필요도 없는 것을..


우리말의 '정리한다'라는 말은 구성물들을 재배치하고 분류하다라는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맥락에 따라서는 비우다, 마무리하다라는 쪽의 의미를 더 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우리가 말하는 '정리'라는 말에는 organize란 말과 remove 등의 뜻이 합쳐져 있는 셈인데, 이것 또한 동양 문화권 특유의 사고방식이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이게 서구권이 일본스러운 미니멀리즘이나 곤도 마리에식 정리법에 열광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불교식으로 조금 비약하면, 정리(=비우기)의 끝에는 진리가 온다는데. 흐르는 물을 잡으려고 하는 것은 곧 집착이고, 흐르는 물을 잡으려다 괴로움이 오는 것은 필연적이다. 참된 깨달음은 결국 비우는 것에서 온다던 말은 매사에 적용되는 듯하다. 감정을 정리한다는 말은 대개 부정적인 감정을 버린다는 뜻으로 통용되고, 무엇인가를 마무리할때는 정리, 즉 비우기가 필수적이다. 반대로 말하면, 정리를 해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곤도 마리에 다큐 또한 의뢰인의 삶을 조명하며 정리의 과정을 풀어내고 있다. 정리의 행위는 삶의 가치를 재정의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새로운 내일을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정리의 행위는 버리는 물건의 양적, 질적 가치를 상쇄할 만큼의 내면의 소득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정리를 하겠다고 마음먹어야 추억 속의 물건을 다시 꺼낼 기회가 생기기도 하고, 버리고 나눌 때에야 비로소 그 물건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처치 곤란의 계륵같은 무언가, 불편한 무언가였을테니까. 결국 '정리'라는 계기가 있어야 물건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듯이, 매사에 집착을 버려야 진정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어제 몇년 전 너무나 좋아했던 아이돌의 포스터 몇십개를 무료나눔하면서도 그랬다. 항상 처치 곤란의 지관통 몇십 개가 방 한 구석을 차지하는 걸 보면서 괜히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는데, 나눔하기로 마음을 먹으니까 이게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이 경험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했었는지를 되새기게 되었다. 괜히 그때의 내가 낯설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낯설고도 그립게 느끼는 이유는 나는 지금 그렇게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몰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몰입할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지금의 나는 5년 전의 나를 마치 타인을 보듯, 부러워하며 바라보게 되더라. 그리고 방을 정리하면서 10년 전쯤에 엄마나 친구들이 준 카드도 다시 읽으면서 그때의 감정과는 확연히 다른 감정을 가지기도 하고, 10년 동안 자란 나를 그때의 감정으로 마주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정리와 비우기는 결국 재발견의 과정이라는 걸 생각하게 된다. 나는 정말 뭘 하던 미련이 없이 사는 게 목표인데, 내면의 목표를 이루려면 멀었지만 그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물건을 버리는 행위로나마 목표를 사소한 실천으로 옮기고자 한 게 아닌가 싶기도.. 삶의 진리는 절대 깨닫지 못하는 어린 중생이지만 언젠가는 내면의 작은 변화도 일어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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