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으로 아무리 쿵짝이 잘 맞던 사람도, 일적으로 만나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원수로 둔갑하는 곳이 직장이다. 그런 곳에서의 하루하루가 내 인생에서 중요치도 않은 사람들에 의한 감정소비로 채워져 가는 것에 회의를 느낄 때쯤, 문득 주위 동료들을 둘러보다 깨달았던 점이다. 대외 홍보나 신입 사원 유치를 위해 내세우는 흔하디 흔한 복지제도나 인프라 시설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자세에서 느꼈던 좋은 점, 배울 점에 대한 이야기.
오늘도 김부장이 러닝머신에 오르는 이유는
보통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보이는 직장에서의 '부장' 직급의 외모는 대부분 배가 두툼하게 나오거나, 머리숱이 얼마 없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볼 때마다 그 장면들이 낯설었던 이유는 우리 회사 부장(수석) 이상의 직급에서는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반강제적 금연과 출근 전, 점심시간, 퇴근 후 언제든 본인 스케줄에 맞춘 사내 피트니스에서의 운동, 허리 건강을 위한 스탠딩 책상, 식후 산책 등의 철저한 자기 관리는 40대 중후반의 나이가 무색해 보일만큼 부장님들의 체형과 체력을 바꾸어 주었다.
어느 부장님이 알려준 그런 절실한 체력 관리의 속사정에는 비만, 고혈압, 고지혈증과 같은 성인병이 있으면 주요 보직에 앉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짠한 현실이 있긴 했지만 그럼 어떤가. 잃고 후회하면 억만장자라도 소용없다는 게 건강 아닌가. 비록 반강제적이긴 해도 회사도 개인도 win-win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좋은 점인 것 같다.
오늘도 배운다
공무원인 친구들을 만나면 내가 지금도 외국어 공부를 하는 것에 놀란다. 그것도 입시, 취업, 승진의 목적이 아닌 순수한 자기 계발로써의 공부라니.. 처음엔 그 반응들에 오히려 내가 어리둥절했다. 응?? 이게 왜 놀랄 일이지?? 우리 회사 사람들 대부분 이렇게 사는데.. 공무원 합격 이후 어떤 공부도 한 적이 없다는 그들은 그렇게 피곤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공무원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의 말을 빌렸지만 어디나 개인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회사 동기 중에는 전공자가 아니어서 주말이면 자비로 프로그래밍 학원에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업무 관련 논문을 확인하기 위해 사비를 들여 유명 학회 논문집을 구입하는 사람도 있었다. 출근 전, 퇴근 후 사내 어학 강좌를 듣는 사람들도 있었고 동호회 활동으로 커피 만드는 것을 배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용했던 프로그램이나 좋은 강연은 거리낌 없이 주위 동료들에게 추천해주었다.
무엇이든 배우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이라는 걸 문득문득 깨닫는다.
하루빨리 내 것으로
한참이 지난 지금도 이해할 수 없지만 한때 사원증을 집에 두고 오면 반차를 쓰고 가져와야 하던 때가 있었다. 분명 임시출입증이란 게 있었지만 그것을 발급받느니 차라리 반차를 쓰라는 상사의 압박이 있었다. 이유인즉 사원증은 사내 보안규정 중 핵심 항목이어서 임원 MBO지수에 부서의 보안 점수로 반영된다는 것. 때문에 실제로 사원증을 깜박해 주위 만류에도 불구하고 임시출입증을 2회 발급받은 사원은 그 해에 하위 고과를 받기도 했다.
영구 분실도 아니고 깜박 집에 두고 온 것에 대한 처분 치고는 과하다는 임직원들의 반발과 자율 출퇴근제가 생기면서 없어지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건 너무한 처사였던 것 같다. 특히 피해자(?)는 아이가 어린 아빠들이 많았는데 아이들이 아빠 가방에서 사원증을 꺼내 놀고는 다른 곳에 두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이와 같은 제도나 규제들은 특별한 유예기간 없이 갑자기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신기한 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새로 생긴 제도를 칼같이 지킨다는 것이다. 아니 집에서는 양말 뒤집어 벗는 습관 하나 고치기 힘든 사람들이 신기할 정도의 속도로 바뀐 규제나 시스템을 내재화하는 능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밥줄이 달려있어서겠지만 한편으로는 해이해지지 않고 늘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니 그 또한 높이 살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