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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트라슈 Nov 18. 2020

장박사님이 퇴사하던 날

박사 출신 경력직의 말 못 할 애환

- 그 얘기 들었어?

- OO부서 장책임 퇴사한대~

-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왜요~??




아침부터 캔틴룸이 떠들썩하다. 텀블러에 커피를 담는 와중에도 다들 눈과 귀는 한쪽에 집중되어 있다. 그 날 화제의 중심은 퇴사하는 옆 부서 장책임이었다.  


장책임은 바로 옆 부서였지만 같은 임원을 모시고 있는 턱에 복도를 오가며 한 번씩 마주쳤던 분이다. 입사한 지 3년밖에 안되었지만 박사 출신 경력직이어서 직급은 나와 비슷했다.


요 몇 년 간 우리 회사는 박사급을 많이 뽑고 있다. 인사팀에 의해 공채로 선발되는 학사, 석사 출신들과 달리 박사급은 수시채용에 실무 임원이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어 종종 임원 사무실에서 면접을 보고 나오는 사람들을 마주치게 된다.


이런 박사급들은 입사하면 책임(과장) 직함이 주어지고, 해외 박사의 경우는 몇 년의 경력을 더 인정해 연차를 더 얹어준다. 그리고 박사 출신들은 입사 후 몇 년간 하위 고과는 받지 않는 특전(?)이 있다. 그래서인지 임원 진급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런 박사 출신 장책임이 입사한 지 3년 만에 퇴사라니. 모두가 의아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사내 소문에 관심 없는 나에게까지 그런 이야기가 들려온 걸 보면 뜨거운 감자인 건 확실했다.


이유를 알게 된 어느 회식자리에서였다. 진행하던 프로젝트의 마무리를 축하하는 자리에는 연구소 사람들도 많이 참석했다. 연구소는 이름답게 박사 출신들이 많았고 그들은 서로를 '~박사님'으로 불렀다. 멀쩡한 직함을 놔두고 굳이 학위를 티 내려는 것 같아서 듣는 나는 민망했지만 그들만의 문화겠거니 하며 이해하려 했다.


그중 마침 퇴사한 장책임과 같은 lab 출신에 사적으로도 친분이 있던 어느 '박사님'은 그 상황을 예상했다며 말을 꺼냈다. 이유인 즉 회사가 박사급을 채용할 때는 실무에 바로 투입하려는 목적과 부서 성과에 기여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데,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꽤나 어렵다는 것이다.


어느 회사나 그 회사만의 체계, 시스템, 문화가 있지만 특히 연구직은 몸으로 직접 깨지고 부딪히면서 배우는 것이 많다. 요즘 용어로 '짬바'라고도 하는 이것은 무어라고 딱 집어서 말은 못하지만, 부서원 모두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암묵적인 기본 지식 같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은 신입사원일 때 OJT를 하면서, 혹은 부서 선배들을 통해서.. 자연스레 배우는 것이지 누군가 앉혀놓고 가르쳐주는 부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사원+대리) 시절을 통으로 잘라먹고 들어온 박사 출신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이 부분이라는 것이다.


명색이 박사 출신 관리직급으로 들어와서 학사, 석사 출신 사원, 대리들을 쫓아다니며 실무의 기본을 배우는 것이 아무래도 그들 생각에 모양 빠지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 지점에서 한계를 느낀 많은 박사급 책임들이 퇴사를 고민한다고 했다. 혹 운 좋게(?) 그 고비를 넘겨도 임원 전용 논문 써치 봇 신세를 벗어나지 못함에 회의를 느끼고 또 퇴사의 고비를 맞게 된다고 했다.


아무리 유명 논문을 인용해서 그럴듯한 보고서를 써도 실무에 대한 이해가 빠진 보고서에는 힘이 실리지 않는다. 이것은 진리다.


또한 실무 부서에서는 박사급 책임을 받는 것을 꺼려한다. 고과 시즌이면 정해진 포션으로 최소한의 불만이 나오는 분배를 해야 하는데 당장 특별한 롤이 없는 그들에게 상위고과 주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관리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박사급들은 입사 후 2-3년 동안은 임원 staff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실무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것이기도 해 인력 운용의 큰 딜레마가 된다.


역시 박사 출신으로 입사한 타 부서 친구가 열심히 실무 부서들로 파견을 다닌 이유도 그제야 알게되었다. 걱정 없어 보이던 친구의 애환을 이제야 알게 되어 미안한 마음이 든 나는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는 이야기로 마음을 대신했다.


장책임이 퇴사하던 날, 모든 사람에겐 나름의 고충이 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친절해라. 네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지금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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