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적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OO님'이란 호칭이 도입된 지 4년이 다 되어간다. 과도기에는 많이 어색했지만 이젠 어느 정도 자연스러워졌다. 그럼에도 간혹 부장 말년 차 분들 중에는 본인보다 어린 후배가 '김철수님'이라고 메일을 적어 보내면 기분 나빠하는 분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님' 호칭은 뭐랄까. 윗사람보다 아랫사람을 대할 때 더 효과적인 것 같다. 이전까지는 보통 직급이 없는 사원은 이름으로 불리거나, 그나마 'OO씨'라고 불리는 게 최대한의 존중이었다. 그런데 이젠 과장, 대리, 사원 구분 없이 '님'으로 통일되니까 아랫사람을 더 존중해주는 마인드가 자연스레(?) 장착되는 것 같다.
윗사람에게는? 글쎄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근무했던 사람들은(내가 입사하기 몇 년 전만 해도 정말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한다) 요즘의 이런 문화를 보고 "세상 참 좋아졌네~"라고 할지 몰라도 이것만 바꾸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말하던 그런 센세이션한 수평적 변화는 크게 느끼지 못한다. 이 안타까운 현상의 원인은 뭘까.. 생각해보니 그들의 행동 습관은 여전히 올드하기 때문이었다.
단적인 예로 늘 지나친 의전(儀典)과 사무실, 회의실에서의 자리배치가 그것이다. 의전은 대통령이나 회장들만 받는 게 아니다. 작은 사무실에서도 부장이 밥 먹으러 갈 때 마치 호위무사처럼 뒤따르는 행동, 엘리베이터를 온 순서대로 타지 않고 굳이 뒤에 있는 부장을 먼저 태우는 행동 등 사소한 일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예의'와 '의전'을 헷갈려서는 안 된다. 누군가 말했듯이 '의전'과 '아부'의 차이는 가족들이 나의 행동을 보았을 때 내가 부끄러운지 아닌지의 기준에 따라 나뉜다는 말에 공감한다.
아래는 일반적 한국 회사의 사무실, 회의실 자리배치다. 물론 스타트업이나 창의성이 강조되는 업계는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회사가 여전히 이런 형태를 고수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일반적인 회사 회의실, 사무실에서의 자리배치
회의실에서는 스크린과 가까운 쪽일수록 소위 짬(?)이 어린 사람이 앉는 게 상식처럼 되어있다. 제일 끝 자리는 스크린과 가까워 목도 아프고 전체 화면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가뜩이나 업무에 미숙한 후배들은 집중이 안되니 앉아서 졸거나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이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자리 배치의 문제다.
어느 날 회의실에 제일 먼저 도착한 나는 늘 앉던 no.2 자리를 지나 스크린 앞에 앉았다. 그랬더니 원래 그 자리에 앉던 (정기적으로 하는 회의는 거의 고정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후배가 뒤늦게 들어와서 당황하더니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내가 불편함을 조금 감수하더라도 후배가 좀 더 회의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고, 무엇보다 회의실에서만큼은 그놈의 서열 문화를 없애보려 한 것이었다. 같은 간부로서 늘 불만이었던 것은 뭐 하나 대단한 것 없는 사람들이 회의실에서 후배들 뒤통수를 보며 거들먹거리는 태도였다.
tvN 드라마 미생에서의 자리배치
한때 화제가 된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의 사진이다. 딱 봐도 심각한 회의자리로 보이는데, no.1 자리에는 대통령이 아니라 업무 책임자가 앉아있다. 우리나라였으면 무슨 안건이 든 간에 대통령이 가운데 앉고, 해당 업무의 실태는 1도 모르는 각종 장관들이 옆을 에워쌌을 것이다. 그러니 회의는 늘 산으로 갈 수밖에.
실무진을 존중하는 리더의 바람직한 자세
대리 시절 야간 근무 중 부서에 품질 사고가 생겨 새벽에 부서장에게 콜 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현상은 명확했고, 나는 부서 담당자로서 결정을 내리고 해당 내용을 임원 포함 유관부서에 공지했다. 생산을 홀드 하는 큰 사안이어서 부서장이 아침에 출근해서 내용을 파악하면 난처하리란 생각에 새벽 4시에 전화를 드려 상황을 알렸다. 30분 만에 씻지도 못하고 출근한 부서장은 내 책상 옆에 걸터앉아 현재까지 진행된 내용, 추가 결과 확보 시점 등을 듣더니 그제야 안심하고는 세수를 하러 갔다.
당시 신선했던 건, 이전까지 겪은 부서장들은 부서 내 크고 작은 이슈가 발생하면 실무자가 부서장 자리에 가서 열중쉬어 자세를 하고 보고를 하게 했었다. 마치 잘못한 것도 없는데 교무실에 불려 간 학생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데 당시 부서장은 위 오바마 대통령처럼 자리나 형식보다 실무자의 의견과 문제의 원인에 귀를 기울였고, 그런 리더의 자세는 실무자였던 나를 포함해 모든 부서원들이 자신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수평적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많은 회사들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수평적 문화는 직급체계를 없애고 호칭만 바꾼다고 따라오는 게 아니다.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조직이든 행동양식이 변하지 않는다는 건 그로 인한 혜택을 누군가 누리고 있다는 것이고(기득권) 그들이 변화를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말이 아닌 행동의 변화가 진짜 변화다. 부디 호칭의 변화가 끝이 아니라 시작점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