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 2년 차 부서 회식 자리에서였다. 오리구이집에서 1차가 끝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가하고, 나를 포함한 10명 정도의 인원이 남아서 근처 호프집으로 2차를 갔다.
마른안주에 맥주를 마시며 각자 요 근래 고민들을 이야기하는데, 후배 한 명이 우울한 표정으로 요즘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후배는 입사한 지 2년 차였는데 당시 크고 작은 업무 실수로 주눅이 든 상태였다. 늘 무슨 일에서든 의욕이 앞서던 후배는 자신의 마음과 달리 잘못된 결과물들과 그에 대한 선배들의 질책이 힘들었던 것이다.
가만히 듣던 나는 내가 신입이던 시절 사고 친 이야기를 해주며 그때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위로를 해줬다. 그런 실수들로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시기이니 절대 기죽을 필요가 없다고.
실제로 회사에서 사고를 친다는 건 일을 하는 사람들만의 특권이다. 잔잔하게 있는 듯 없는 듯 무탈하게 흘러가는 사람들은 가만 보면 한쪽 발을 빼고 있거나, 월급루팡들인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한창 대화가 무르익어갈 무렵, 옆 옆자리에 앉은 동기가 밑도 끝도 없이 날 가리키며 말한다.
다 필요 없고 딱 얘 만큼만 일해
얘는 진짜 여자 같지 않게 일해
여자 중에 이렇게 일하는 애 처음 봤어
(뭐지, 욕인가?? 칭찬인가?!)
순간 어떤 리액션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나의 미묘한 표정을 알아챈 동기는 확실한 마무리까지 한다.
칭찬이야
(뭐지.. 이 ddong 싸다 끊고 나온 느낌은..)
이 정도 되면 칭찬을 칭찬 같지 않게 하는 것도 기술인 것 같다.
찜찜한 마음으로 회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 말을 칭찬이랍시고 한 동기도 이상했지만.. '그동안 있던 여자 선배들이 도대체 어떻게 일을 했길래 묵묵히 일만 한 내가 이런 봉창 찢는 소리를 들어야 하나'에 대한 분노였다.
실제로 전체 인원이 1000명이 넘는 우리 팀에는 여자 선배들이 분명 있었다. (과거형) 다들 나와 똑같은 '연구개발직군'으로 입사를 하고는
① shift 근무가 힘들다는 이유로 면담을 해서 직군을 바꿔서 간접부서로 전배를 가거나
② 네일아트며 눈썹 연장술로 현장엔 발 한번 들여놓지 않는 강제 배려를(?) 받으며 일하다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쓰고 퇴직을 했거나
(네일아트나 화장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업의 특성상 제품의 품질에 영향을 줄 수 있어 금지된 것임을 밝혀둡니다)
이런 사유로 지금은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절대 그들처럼은 되지 않겠다 라는 마인드는 장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기껏 듣는다는 말이 이런 말이라니..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그 회식 얼마 전의 일이다. 지금처럼 연말을 앞둔 터라 날씨도 쌀쌀하고 5시 퇴근시간만 되도 어두컴컴해질 때였다. 퇴근시간이 좀 지나 사무실에 사람들이 얼마 남아있지 않을 때쯤 5kg짜리 평가 시료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100m 거리의 실험실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부서 동료가 마침 퇴근하느라 지나가길래 시료 하나를 저 앞까지 들어달라고 부탁하고 기쁜 마음으로 같이 걸어갈 때였다.
야, 이런다고 아무도 안 알아줘. 다 퇴근했는데 뭐하러 혼자 이 짓을 해? 그냥 내일 사람들 있을 때 하고 생색 내.
한심하다는 듯이 그 동료가 말했다. 순간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문이 막혔다..
(누가 알아달라고 하는 일 아닌데..)
내가 원하는 평가를 하려면 사람들 퇴근 한 지금이 평가 장비를 쓰기에 편하고, 또.. 누가 알아달라고 하는 거 아니야. 내가 평가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서 그래.
라고 솔직히 말하고 싶었지만, 이런 대화 자체가 의미 없는 동료라는 생각에 그냥 말문을 닫았다. 같이 들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내내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같은 업무를 하는데도 이렇게 생각의 방향이 다른 사람이 있구나.. 마치 일을 대하는 나의 가치관 마저 짓밟힌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