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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트라슈 Dec 18. 2020

롱보드를 탑니다

살려고요.

내향적인 성향이긴 하지만.. B형인 탓인지(샤머니즘 버금가는 맥락) 나는 주위에서 '의외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조용하고 소심한 줄만 알았던 내가 스카이다이빙을 하고, 대학생 때 해외에서 중고차를 사서 운전을 하고 (심지어 생애 첫 운전), 내 몸집만한 악기를 다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가 주로 그렇다.


 https://brunch.co.kr/@hessemian/125

* 이렇게 링크를 하는 게 맞는 걸까 (오!! 김영배작가님 감사합니다^^)



롱보드도  중 하나다.

  

보드에 대한 관심은 초등학생 때 본 인생 영화 프리윌리의 한 장면에서부터 시작됐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었지만 바퀴 달린 판때기(?)를 타고 U자 계곡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꽤 오래 기억에 남았다. 집에 있는 롤러스케이트보다 뭔가 희한해 보이기도 했고. 


물론.. 

치키치키 차카차카 초코초코초! 

의 영향도 무시할 순 없다.

날아라 슈퍼보드



롱보드는 4년 전 처음 시작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여름 네 번째 일본 출장에서 돌아올 때였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도로를 오한이 들 정도의 냉기를 뿜으며 달리는 공항버스 안에서 문득 '아까운 내 청춘이 이렇게 사람에 대한 실망, 회의, 상처로 낭비되는 게 너무 아깝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공항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캐리어를 끌고 보드 샵을 찾아가 장비를 구입을 했다. 사전조사 같은 건 당연히 없었고 당시 내 머릿속엔 오로지 '살아야겠다' 란 생각만 가득했다.


출장은 굳이 갈 이유도, 필요도 없는데 어떻게든 해외 출장을 한 번이라도 더 가보겠다는 신념을 가진 선배가 용하게 결재를 받아 같이 출장길에 올랐다. 평소 주위 사람을 배려치 않는 본인 위주의 대화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내뱉는 동료들에 대한 뒷담화로 많은 후배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리는 선배였다.


3박 4일 동안 최대한 맞춘다고 맞춰줬는데.. 그래도 거래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직속 후배를 씹는 것 까진 도저히 동조할 수가 없어 리액션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더니, 그게 발단이 되어 정말 초등학생도 안 하는 유치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식사할 때 내 쪽으로 등을 지고 한쪽 팔을 괴어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못하게 한다거나, 언급하지 말아야 할 사내 기밀을 흘리듯이 말하며 거래처의 관심을 유도해서 대화를 주도한다든지.. 정말 어디다 속시원하게 하소연도 못할 찌질함의 결정체였다.


이런 어이없는 일을 계기로 산 보드여서, 처음엔 어떻게 타야하는지도 몰라 너튜브를 보며 독학을 했다. 그리고는 저녁이 되면 동네 농구장에 가서 열심히 혼자 굴려 보았다. 신기하게 생긴 물건에 호기심이 생긴 동네 꼬마들이 몰려들었다가.. 걸음마에도 못미치는 나의 실력을 보고 실망해서 돌아가기도 했다. (그래서 주말에도 해질녘만 노려 연습했다 ㅠ ㅠ)



혼자서는 도저히 늘지 않는 실력에 답답해서 하루는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집 근처 공원에 갔다. 거기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상주하다시피 하는 크루(보드를 타는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작은 용기만 내면 동호회 소속이 아니더라도 노하우를 친절히 전수받을 수 있었다.


초등학생의 자녀를 둔 어머님부터,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취미 하나로 서로 친구가 되는 곳이었다. 회사-집-회사-집만 반복하던 나에겐 정말 별천지 같은 곳이었다.


깨알같이 전수받은 노하우 덕분에 기본적인 주행과 정지, 간단한 방향 전환이 가능해지고서는 용기를 내어 동네 라이딩을 다녔다. 과한 자신감에 겁도 없이 기술을 익히느라 발목이 까지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래도 보드를 탈 때는 뭔가 살아있다느낌이 들어 좋았다.



그리고 얼마 후 휴가차 간 마드리드의 레티로 공원에서도 롱보드를 타는 크루들을 만날 수 있었다. (롱보드 타는 사람들은 주로 이렇게 모여있는 게 특징인 듯하다) 겉모습은 레게머리와 문신, 피어싱 등으로 무섭게 보였지만 쪼그만 동양애가 옆에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구경을 하고 있으니 "한번 타볼래?"하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본인들의 예상보다(?) 제법 선전했는지.. 그때부터 신이 나서 다들 말문이 터졌다. 


- 어디서 왔니?

- 한국에 롱보드로 유명한 애 알아. 얼마 전에 같이 탔었어.

- 우리 매일 여기서 타, 타고 싶을 때 언제든지 와. 

- 이 기술을 할 땐 중심을 이동시켜야 해. 그래야 안 넘어져.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으로는 모른다는 진리를 또 깨달은 날이었다. 참 순수하고 친절한 청년들이었다. (괜히 쫄았..ㅋ) 취미 하나로 인종, 성별, 나이, 직업을 불문하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순간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마드리드 레티로 공원의 크루들




요즘 유행하는 전동 킥보드와는 전혀 다른 느낌.

역시 아날로그가 제 맛이다.


롱보드를 추천합니다.

(그런데 왜 눙물이...)


햇살 좋은 가을날의 동네 라이딩

* 헬멧 등 보호 장비 착용은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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