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의 매직'에 대하여
애인이 듣고 껄껄 웃었던 나의 충격 고백, "나는 100일이 고비야." 100일을 넘기면 안정권에 접어들지만, 대부분의 연애에서 100일 전후로 헤어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어 이별 수순을 밟았다. 연애 경력 10여 년에 30대에 접어든 사람의 발언이라기엔 다소 가벼워 보이는 이 발언,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진행 중인 연애가 100일에 다다른 시점에 다시 한번 짚어본다. 왜 하필 '100일'이 고비일까?
우리가 정식으로 만나기로 했을 때 애인이 내게 물었다. "기념일은 다 챙기는 편이야?" 나는 잠시 생각하고 대답했다. "100일, 1주년, 그 정도 챙기면 좋지 않을까? 사실 연애를 장기간 해 본 적이 별로 없어서 특별한 기념일을 지내본 게 많지 않아." 애인은 그렇구나- 하고서, 100일은 정말 금방 오는데 100일을 꼭 챙기냐고 물었다. 나는 웃으면서 솔직하게 말했다. "100일이 얼마나 중요한데. 나한테는 중요해. 나는 100일이 고비야."
서로의 요약되고 뭉뚱그려진 연애사를 간략하게 주고받은 후였기에 애인은 껄껄 웃으며 "그래, 3개월 정도에 고비가 오는구나."하고 맞장구쳤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가장 최근의 두 번의 연애 모두 3개월 정도에 끝이 났다는 이야기를 애인에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각각의 이별의 원인은 다르면서 비슷했고,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빠른 판단과 이별이 없었다면 지금의 애인도 적절한 타이밍에 만날 수 없었을 테니.
너무 많은 연애를 거치면서 내게는 일정한 패턴이 생겼다. 연애를 시작한 지 3개월 정도가 지나는 시점에 나에게는 고비가 온다. 3개월 만에 단순히 마음이 식거나 열정이 사그라드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이 관계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100일 언저리에 선명하게 판가름 난다. 100일 정도를 함께하면 특정한 판단 기준들에 대한 근거들이 자연스레 수집되고, 이 사람과의 관계를 더 깊고 길게 끌고 가도 괜찮은지 아닌지 저절로 판단이 든다. 일부러 의식하고 판단을 내리려고 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자연스레 일어나는 일이다. 관계를 계속 이어가며 나의 삶에 더욱 깊게 들여도 괜찮은 사람인지, 이 관계는 지금 나에게 독한지 이로운지, 앞으로에 대해 기대가 큰지 걱정이 큰지, 100일 정도 지내고 나면 속된 말로 '사이즈가 나온다'.
마음속에 "STOP/WARNING" 사인이 지속적으로 뜨면 나는 마음을 정리하고 연애를 끝낸다. 마음속에 "GOOD TO GO"의 울림이 더 크면 나는 마음을 새롭게 먹고서 전진한다. 관계를 더 윤택하고 다채롭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 판단의 기로에 서는 시점이 100일 전후로 찾아오는 것이다.
연애가 3개월 정도 진행되고 나면 당연히 서로에게 조금은 익숙해지고, 처음에 뭘 해도 마냥 좋던 함께하는 시간은 서로의 일상 패턴, 취향, 성격 등에 의해 특정 양상으로 패턴화 된다. 서로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까지 선명해진다. 장점과 매력으로 가득하던 상대방에게서 결점과 결핍이 보이고, 단점이 너무 치명적이라면 장점으로 상쇄될 수 있는지 저울질하게 된다. 상대방을 더 깊이 알게 되어 (발견된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더 좋아하고 사랑하게 될 수도, 혹은 완전히 정이 떨어지고 이별을 결심하게 될 수도 있다. 절대로 참아낼 수 없는 말이나 행동, 결점이 보이는 경우에 마음을 접고 후자의 수순을 밟게 된다.
마음을 접을 만한 극단적인 이유가 생기지 않았는데 앞으로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는 경우, 판단이 어려워진다. 헤어지는 것이 낫다는 100%의 확신(이 사람과 더 이상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은 완전히 시간낭비라는 확신)도 계속 만나봐야겠다는 확신도 없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애매한 경우, 마음은 내내 소용돌이친다.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을 부여잡고 뇌에 힘을 주고 충분히 숙고해야 한다. 이런 경우 내가 정한 결말은 대부분 이별이었다. 그게 쉬워서가 아니다. 단순히 '저 사람은 저게 마음에 안 드니까 더 만날 수 없어, ' 하는 미성숙하고 섣부른 태도로 내리는 결정이 아니다. 나 자신 그리고 상대방의 앞으로를 위한 최선의 결론을 내기 위해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지금 나와 함께하는 저 사람에게 나의 한정된 시간과 자원과 에너지와 다정을 앞으로 더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쏟을 가치가 있는가, 저 사람은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인가,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기쁨을 아는가, 연애의 과정을 '결혼'을 위한 투자로 생각하는가 아닌가, 나는 저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을 넘어서 사랑할 수 있는가, 앞으로 함께하며 서로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더 클 것인가 혹은 불행과 피곤함이 더 클 것인가, 하는 다양한 고민들이 내면에 파도친다. 이별을 결정하고 감행할 때까지 마음이 며칠, 길게는 몇 주 동안 소용돌이치며 차갑게 굳거나 왔다 갔다 한다.
놀랍게도 그런 시기에 나에게 확신을 주어 마음의 파도를 잠재우거나 나의 심경 변화를 눈치채고 마음을 돌려보려고 노력하는 남자는 거의 없었다. 처음과 같은 열정과 매너를 3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남자도 거의 없었다. 물론 시간도 자원도 에너지도 그 무엇 하나 아끼지 않고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던 연애 극 초반의 양상을 영원히 유지할 수는 없다. 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며 연애 극 초반의 양상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노련하게' '안심시키는' 사람과 '실망스럽게' '돌변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전자의 경우는 드물며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어쩌면 한 끗 차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그 '한 끗'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고작 100일이 뭐야... 1년은 만나봐야 하는 거 아니야?' 하고 당신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시간을 매우 한정적으로 생각하고 젊은 날의 하루하루를 아까워하는 나의 경우 그 '1년'이라는 시간을 전제하기 위해서 '100일의 고비'가 필수다. '감정'이 식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나의 앞으로를 위한 '판단'과 '결정'의 문제가 도래하는 시기이기에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그 시기에 어떤 판단이 들었을 때 애써 외면하며 '나는 상대방이 좋다'는 감정을 이유로 관계를 더 이어나가면 매번 결국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하는 노랫말이 절로 나오는 실망스러운 상황이 발생하곤 했다.
100일의 매직. 왜 하필 '100일'일까? '100일의 시간'이 꼭 연애에 있어서만 중요하게 적용되는 게 아니다. 나에게 있어 3개월은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일상, 새로운 패턴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한 걸음 물러서서 객관적인 판단을 하거나 개선책을 생각하기에 적절한 시간이다. 연애에 있어 나의 '100일의 매직'은 경험의 축적이 불러온 결과일 것이다. 100일 즈음 어렴풋이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에 최선을 다해 귀 기울인다. 나와 비슷한 가치관과 연애 경험치를 가진 친구에게 '나는 100일이 고비야'라고 털어놨을 때 친구의 대답은 이랬다. '3개월이면 더 만나도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 어느 정도 파악이 되니까. 그때 아니다 싶으면 그만 만나야지. 대신 그때 넘기고 1년의 고비까지 넘기고 나면 더 싸울 일도 없고 편해지지 않아?' 내 마음의 소리가 친구의 입에서 그대로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나와 같이 비혼주의자인 그 친구는 지금 생애 최초로 2년이 넘는 장기 연애에 접어들었고, '맞춰가는 과정'은 다소 고단했으나 획득한 '안정감'이 소중하다고 이야기했다.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해야 한다고 믿는 내 또래의 사람들은 '100일이 고비'를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할수록 '100일의 매직'을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적절한 시기에 발동하는 내면의 촉을, 은은하게 울리는 내면의 경고음을 무시해서는 안된다.(유명한 웹툰 '유미의 세포들'에도 나오듯 그것은 미래의 당신이 현재의 당신에게 보내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결혼이라면 (이혼을 전제하지 않는 이상)'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하는 일인데, 100일 만에 어떤 불안한 감이 자연스레 든다면, 그 감정과 예감을 애써 덮고 외면하고 합리화하고 지우기보다 들여보고 받아들이고 아쉽더라도 현재의 관계를 추억으로 남기기로 이성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 한 번뿐인 자신의 인생을 위한 합리적인 선택, 후회 없는 선택이 되지 않을까?
비혼주의자의 연애란 절대로 제도이자 의식에 불과한 '결혼'을 도착점, 목표 지점, 사랑의 완성점, 연애의 목적 따위로 삼지 않기에 오히려 더 담백하고 연애라는 활동 그 자체의 정수를 누릴 수 있다. 연애가 결혼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연애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결혼'을 해야 하니까 '연애'를 한다(고 대놓고 드러내거나 혹은 내심 그런 태도를 지니고 연애를 하며 숨기는 사람)는 사람과는 연애 관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을 인용하자면,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필요로 한다'는 태도가 아닌 '네가 필요하기 때문에(=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너를 사랑한다'는 태도로 나를 대하는 사람과 내가 함께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이런 경우에는 상대방도 연애에 있어 결혼을 전제하지 않는 나와 함께할 이유가 없는데, 그럼에도 '나는 너의 비혼주의를 바꿀 수 있다, 나와 함께하다 보면 너는 달라질 것이다'라는 신념으로 계속 연애에 임하려고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2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부터 '결혼'에 대한 관점과 그에 직결된 연애에 대한 가치관도 '100일의 매직'이 작용하는 데에 크게 한 몫하게 되었다. 상대방이 아무리 숨기려 해도 100일 정도를 함께하고 나면 결혼이 목적일 뿐인 사람은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을 만큼 티가 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를 사랑해서 내가 필요한' 사람인지, '내가 필요해서 나를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인지 정도는 약간의 눈치만 있어도 3개월의 시간이면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쌍방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사회적으로 규정된 결혼 적령기에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믿기에 '결혼을 위한 연애'가 당연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서로의 목표를 이룬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런 목적성이 전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결혼을 삶의 목표, 연애의 목표 지점으로 여기거나 연애 과정 전체를 '결혼을 위한 투자' 쯤으로 생각하는 사람과는 함께할 수 없고 그런 사람은 100일 전후로 반드시 걸러진다.
현재의 애인과 만남을 시작한 지 100일 가까이 다다른 지금, 나의 마음은 꽤 안정적이며 우리는 일상을 공유하고 체온을 나누며 많이 웃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3개월 남짓 만난 연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사소한 다툼도 있었지만, 큰 고비는 오지 않았다. 우리는 100일이 다가오는 기념으로 가까운 바닷가로 짧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새로운 계절을 기대하며 함께할 수 있음은 기쁜 일이다.
누군가에겐 별 것 아닌 100일이라는 시간이 나에게 가지는 의미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보니 문득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감사하다. 이토록 좋으면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흐르는구나 싶은 요즘. "100일이 이렇게 금방 흐르는 시간인지 전에는 몰랐어, "하고 애인에게 말을 건넨다. 쉽게 날을 세우고 쉽게 실망하고 예민한 성정을 지닌 내가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 있던 연인은 많지 않았다. 더 오래 곁에 있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는 것은 축복이다. 당신에게도 무엇이 됐든 길고 깊은 축복이 깃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