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들은 가슴속에 남아 영원히 빛나고
어떤 말들은 생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밝혀주는 것처럼 마음속에 남는다. 사랑의 말이기에.
고3 아이들 모의평가 감독을 설 때 '필적확인란'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내게 환한 불 밝혀주는 사랑의 말들'. 아름다운 문구라고 생각했다. 감독을 서다 보면 아이들에게 필적확인란을 또박또박 읽어줄 때가 있는데(필적확인란 문구가 적힌 시험지를 수령하기 전에 답안지에 학적을 작성할 때부터 필적확인란을 미리 적어놓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어서) 그럴 때마다 필적확인란을 선정하는 사람들은 참 서정적이구나, 싶을 때가 많았다. 2022년 3월 고3 모의평가 필적확인란 문구가 유난히 그랬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해인 수녀님 시의 한 구절이라고 하더라.
감독을 서면서 아득해지는 시점에 문득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도 그런 말이 있었나, 내게 환한 불 밝혀주는 사랑의 말이. 살아오며 그런 말을, 생에 환한 불을 밝혀주는 것 같은 사랑의 말을, 들은 적 있었나. 그런 말이 가슴에 와닿은 적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감사한 생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한 말들, 연애를 할 때 주고받는 사랑한다는 속삭임, 부모님이 너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하시는 말들,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그런 말 말고, '사랑'이라고 발음하지 않았으나 너무도 사랑의 말이었던, 빛나는 말들이 몇 개 떠올랐다.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비참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친구가 건넨 위로의 말도 떠올랐고, 엄마가 내게 했던 애정 어린 말들, 아빠가 내 눈을 보며 너는 눈을 보면 문학을 해야 하는 사람의 눈인데, 하고 했던 말도 사랑의 말 같았다. 그리고 연인에게서, 남자에게서 들은 말 중에도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사랑해', 그런 말 말고. 내게 환한 불빛으로 남았다고 할 만한, 어떤 사랑의 말이.
몇 년 전 일을 하다 마음에 병이 들어 중증 우울장애 진단을 받고 병휴직을 한 적이 있다. 교직에 있으면서 우울증, 수면장애, 다양한 스트레스성 건강장애로 아픈 사람들을 흔히 본다. 고강도의 서비스직이자 감정노동직인 동시에, 수업과 평가, 성적처리와 기록, 학생 지도와 상담, 잡다한 행정 업무까지 병행하면서 방학이 오기 전까지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어떻게든 수행해야 하는 직무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저 버티는 사람들도, 결국엔 버틸 수 없어 내려놓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일을 그만두려고 했었다. 신설 학교에 근무하며 서너 사람쯤이 감당할 업무를 수업, 학생 지도, 담임 업무와 병행하면서 학생의 교권침해 사안에 연이어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시달렸다. 목숨을 끊는 것보다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 쉽고 합리적인 일이었기에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교권침해 사안으로 정신과 상담과 약물치료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나의 마음의 병은 심각했다. 나를 상담하던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일단 쉬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지금은 당장 그만두기보다 선택을 보류하고 쉬어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권유했다. 나는 고민 끝에 진단서를 받아 들고 휴직계를 냈다. 다시는 교직에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치료를 이어가던 중에 나는 혼자서 제주도로 며칠간 훌쩍 떠났다. 바다를 보며 글을 쓰고 필사를 하고 책을 읽고 쉬다 오면 병든 마음이 나아질 것 같았다. 훌쩍 떠난 여행은 효과가 있었다. 나는 힘을 내어 걸으며 보고 싶은 풍경들을 보고, 예쁜 소품샵에 들를 때마다 육지로 돌아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건네줄 조그만 선물들, 엽서들을 잔뜩 샀다. 가져간 캐리어 한 칸 가득,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와, 가족들과, 친구들과, 고마운 사람들에게 건넬 이런저런 선물들이 쌓여갔다.
육지로 돌아가기 하루 전날, 카페에서 글을 읽고 필사를 하다가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와 통화를 했다. 아프고 불안정하던 내내 옆에서 힘이 되어주고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어주던 사람이었다. 오늘은 무얼 했는지, 무얼 먹고 어디 어디를 들러 무얼 보았는지, 이야기하다가 문득 내가 말했다. "이제 내일이면 비행기 타야 하는데, 나 이상한 불안한 마음이 들어. (남자친구는 차분하게 "뭐가 불안한데?" 하고 물었다.)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죽을까 봐, 아니면 짐을 잃어버릴까 봐, 그런 게 불안해. 진짜 이상하지? 안 죽을 거 아는데, 근데 죽을 수도 있잖아.(웃음) 그리고 오빠랑 사람들한테 줄 선물을 많이 샀는데, 그걸 혹시 잃어버리거나 뭔가 잘못될까 봐, 이렇게 선물들을 한가득 담아가는데 내가 잘못돼서 무얼 누구한테 주어야 할지도 모른 채로 그냥 남겨지게 되는 게, 그런 게 무서운 기분이 들어. 진짜 이상하지. 왜 이런 불안한 마음이 들까. 유럽도 아니고, 태풍도 없는 계절에 제주도에서 비행기 타는데." 그렇게 내 이상한 불안을 쏟아내고 나는 멋쩍어서 웃었다. 가만히 내 얘기를 듣던 당시 남자친구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건 수영이 마음이 예뻐서 그래. 사람들 생각하고 선물 사고, 무사히 와서 주고 싶은 마음이 예뻐서. 그래서 불안한 거야. 아무 일 안 생기고 잘 올 거야."
나도 이유를 모르겠던 나의 이상한 불안감에 대해 그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런 답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 말을 듣고 왠지 눈물이 나고 마음이 먹먹했었다. 지금도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날 것 같은 말이다. 통화를 마치고 카페에서 숙소로 돌아갈 때 참 기분이 좋았다. 더 이상 불안하지도 않았다. 그 말을 들은 후로 나의 불안이나 슬픔들이 나의 다정함이나 세심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조금씩 깨달았다. 사랑이 아니라면, 이상하게 불안하다는, 내내 불안정하고 무너져 내리던 여자친구에게, 네 마음이 예뻐서, 사람들 생각하는 마음이 예뻐서 죽을까 봐 불안한 거야, 하고 안심시키는 말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말은 헤어진 후에도, 지금까지도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무언가 불안할 때 자꾸 그 말을 떠올린다. 그 말이 내게 주었던 위로를 생각한다. 결국 헤어졌지만 이제는 희미해진 사람이지만 그래도, 어떤 말들은 이렇게 생을 환하게 밝혀주는 말로 마음속 깊은 곳에 부식되지 않고 보존되어 빛난다. 사랑의 말이기에.
나의 연애일기의 주인공이 내게 건넨 말 중에도 그런 말이 있었다. 코로나19 확진을 받고 자가격리를 시작하던 날 나는 고양이에게도 코로나가 옮을 수 있다는 사실에 덜컥 겁이 나서 잔뜩 두려웠다. 양성 판정을 받기 전날 밤에도 언제나 내 곁에서 잠드는 고양이를 평소처럼 만지고 쓰다듬고 볼을 부볐는데, 내 고양이는 언제나 내 곁에 있으려고 하는데, 코로나에 걸려 7일간 밖에도 나가지 않고 집에서 고양이랑 뒹굴며 지내야 하는데, 축복인 동시에 고양이가 나 때문에 코로나가 옮아서 잘못되거나 건강이 상하거나 수명이 줄어들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에(그럼에도 곁에 와서 몸을 부비고 같이 눕는 고양이를 내치지도 못하고) 집 안에 혼자 있으면서도 마스크를 끼고 있어야 하나 싶었지만, 콧물은 계속 흐르고 호흡이 딸리고 기침은 미친 듯이 나오고 수시로 따뜻한 물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마스크를 쓰고 숨 쉬는 것도 곤욕이었다. 너무 걱정이 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매면서 '고양이 코로나', '고양이 코로나 증상' 따위의 말들을 미친 듯이 검색해보고 안도하거나 두려움에 사로잡히거나 했다.
남자친구도 당시에 확진으로 격리 중이었는데, 그나마 서로 목소리를 부지하고 있던 때에 통화를 하며 내가 말했다. "내 고양이한테 코로나 옮아서 애가 아프면 어떡하지. 나는 아파도 되는데 밤이가 나 때문에 아프면 나는 못 견딜 것 같은데. 근데 마스크 끼고 있지도 못하겠고 밤이는 내가 집에만 있으니까 너무 좋은지 계속 옆에 와서 애교 부려. 어떡하면 좋아." 남자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괜찮아. 밤이는 너한테 너무 예쁜 사랑받아서, 안 걸릴 거야. 무적이야." 그 말을 듣고 울컥했다. 어떤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을 무적으로 강하게 만드는 것이 정말 맞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웃으며 말했다. "오빠, 내 사랑은 오빠도 듬뿍 받았는데, 오빠는 왜 걸린 거야. 우리도 무적이어야 하는데." "밤이는 무적이야. 괜찮을 거야."
그렇게 웃으면서 또 불안감과 두려움이 씻겨 내려갔다. 내 고양이에게 내 사랑이 만든 두터운 방패막이 아른아른 씌워져 있는 것 같아서 왠지 안심이 됐다. 예쁜 사랑을 받았으니까 아프지 않을 거라는 그 말이, 평소 내가 사랑을 쏟는 모습을 모두 보아 알고 있다고 하는 것 같은 그 말이, 참 따뜻하고 다정했다. 다행히 고양이는 아프지 않고 나의 격리 생활이 잘 지나갔다. 앞으로도 내 고양이는, 나의 예쁜 사랑을 듬뿍 받아서 아프지 않을 것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
사랑의 말은 불안과 두려움과 깊은 슬픔을 물리친다. 어둠을 물러나게 하는 빛처럼, 마음에 환한 빛이 되어 위로를 준다. 사랑의 말은 사랑의 마음에서 나오고, 그런 말을 직접 듣는다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마음의 어둠을 몰아내는, 환한 불을 밝혀주는 말이라는 걸. 그런 마음과 그런 말을 서로 건넬 수 있다는 것은 생에 얼마나 큰 축복인지.
나도 누군가에게 환한 불을 밝혀주는 사랑의 말을 건넨 적이 있었을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사랑을 품고 살면서, 소중한 이에게 환한 불을 밝혀주는 말을 하고 싶다. 헤어지고 멀어지더라도 마음에 남아 반짝이는 그런 말을 건네고 싶다. 마음에 넘치는 사랑으로 사랑의 말을 하고 싶다. 우리가 서로에게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다면, 생이 결코 가난하거나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무너질 것 같을 때, 끝없이 공허할 때도, 마음 깊은 곳에 남아 반짝이는 말들을 기억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 환한 불을 밝혀주는 사랑의 말들이, 생에 가득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