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한가운데
어느덧 여름의 한가운데. 겨울에 만났던 우리는 여름을 함께 지나고 있다. 다시 겨울이 올까 싶은 무더위 속에 지난한 여름이 느리게 흐른다.
아, 덥다. 습하고 덥다. 축축 쳐지는 한여름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에어컨 바람을 오래 쐬면 금세 머리가 아파오지만 에어컨 없이는 한 공간에 오래 있을 수가 없다.
지구온난화, 이상기후, 연이은 폭염, 습한 날씨. 괴롭다. 모두가 괴롭다. 여름이 좋다고 하던 사람들은 여전히 여름이 좋을까? 여름이 좋다는 건 여름이 시작될 때의 그 청량함과 생명력 넘치는 감각이, 거기까지가 좋다는 얘기겠지? 어디를 보아도 무성하게 푸르른 초록들, 푸른 바다와 여름휴가, 피서의 이미지, 그런 것들이 좋다는 거겠지? 습하고 힘 빠지는 날씨 말고.
나는 여름을 싫어한다.(여름 초입만 좋아한다.) 겨울엔 여름이 좋다고 하고 여름엔 겨울이 좋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일관적으로 겨울이 좋다. 추운 것이 더운 것보다 훨씬 좋다. 누군가와 언 손을 녹이며 오들오들 떨며 딱 붙어서 걷고, 따뜻한 음료를 마시고, 몸을 따뜻하게 감싸고, 따뜻한 차를 마시고, 연말 시즌 따뜻한 빛깔의 조명들, 찬란하게 반짝이는 거리와 들뜬 사람들, 겨울의 코트와 목도리와 빠른 종종걸음. 추운 계절엔 따뜻한 것이 좋아지니까, 추운 계절이 좋다. 물론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이다. 찬바람이 불고 적당히 서늘하고, 트렌치코트를 입고 니트를 입을 수 있지만 극단적으로 춥지는 않은 아름다운 계절이니까. 한여름이 시작되고부터는 하루하루 버티듯 살면서 가을만 기다린다. 여름의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기다리다 보면 가을은 반드시 온다. 9월 초입에서 중순쯤, 코끝에 서늘한 바람이 스칠 때, 창을 열고 자면 아침에 찬 기운이 몸을 감쌀 때, 마음은 비로소 첫사랑처럼 설렌다. 왔구나, 가을, 하면서.
걷기를 좋아해서 틈만 나면 어디든 정처 없이 걸어야 하는 나는, 혼자도 자주 걷고 데이트를 할 때도 같이 걷는 걸 좋아하는 나는, 여름에 조금 불행해진다. 마음껏 걷지 못해서 몸이 찌뿌둥하고 에어컨 바람 밑에 서서히 시들어가는 가을형 식물 같다. 여름에 냉방병 증세를 달고 사는 나는 에어컨을 쐴 수 있음에, 에어컨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하면서도 매일이 정말 괴롭다. 몸을 따뜻하게 하고 따뜻한 것을 먹고 마시며 행복해하고 싶다. 습한 날씨에 피부의 모공이 열리고 자꾸 땀이 나는 것도 이렇게 괴로울 수가 없다. 삶이 뽀송하지가 못한 느낌. 우리가 사랑하는 '청량한' 여름의 이미지는 지금의 기후 상태로는 점점 머나먼 이야기로 사라질 것 같다.
한여름의 연애를 생각해본다. 여름의 연애는 대체로 시원한 카페 안에서, 하릴없이 커피를 쪽쪽 빨아들이며,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하며, 혹은 피서지에서 어떻게든 여름날을 흘려보내려 애쓰며 흘러갔지. 나는 대체로 여름에는 행복하지 않았는데, 이례적으로 여름의 관광지에서 만난 사람과 여름 한 철 장거리 연애를 하면서는 꽤나 별생각 없이(여름을 아주 싫어하지는 않으면서) 여름을 보냈었다. 그때의 연애는 연애의 양상 자체만 놓고 보면 아주 좋은 기억도 아주 나쁜 기억도 아니지만, 그때 여름의 풍경들이 모두 아침의 바다, 한낮의 바다, 노을에 물드는 바다, 밤의 바다, 밤의 파도, 찬란한 물의 빛, 그렇게 온통 바다였기 때문에 그게 좋았다. 유일하게 여름이 무난히, 더위에 크게 시달리지 않으며 흘러간 시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여름의 연애는 그렇게 바닷가 피서지에서 한여름밤의 꿈처럼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일상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지기에, 다소 지난할 수 있다. 이 계절이 내게 지난한 계절이기 때문에. 남자친구도 나처럼 여름을 싫어한다. 그에게 여름은 더욱 혹독한 계절이다. 화재 출동이 아니어도 방호복을 모두 갖춰 입고 장비를 다 차고 출동을 나가야 하다니, 린넨 나시 하나만 입고 밖에 나가도 땀이 줄줄 흐르는 판에, 안 그래도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이 한낮에 그런 복장으로 출동을 나간다고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하다. 이 여름에 우리는 모두 지쳐있다. 나는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달려온 탓에, 학기를 마무리하고 업무를 마무리하고 기록을 마무리하느라 모든 체력과 정신력을 쏟아온 탓에 다분히 지쳐있고, 애인도 많이 지쳐있다. 주변의 타인들도 많이들 지쳐있다.
이 계절을 지혜롭게 나기 위해 우리는 에어컨을 아낌없이 가동하고 선풍기를 틀고 실내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영화관을 찾는 날이 많아지고, 휴일에 집 안에서 나시와 반바지를 입고 커피를 내리고 얼음을 넣어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드라마를 정주행 한다. 냉동실에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쟁여놓고 종종 꺼내먹는다. 습도가 80-90%에 달하는 불쾌지수 높은 날씨가 이어지며 서로 더 다정하기 위해 모두 서로 애를 써야 한다. 겨울은 다정하기 더 쉬운 계절이다.(그래서 겨울이 좋다.) 여름에 서로 다정하게 굴기란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어쩌다 밖을 걸을 때 습도를 확인해보면 85%, 90%.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말한다. "현재 습도 구십 퍼센트. 나 물속을 휘적휘적 걷고 있어. 아가미가 생길 것 같아. 어항 속에 헤엄치는 물고기랑 다를 게 없어. 수영을 못해도 물속을 걸을 수 있다니, 기적이다. 숨도 쉬고 말도 할 수 있네. 기적이야." 남자친구는 장단을 맞추며 웃는다. 이런 헛소리라도 마음껏 하며 보내야 여름이 잘 지나간다. 그래도 이 싫은 계절에, 이 계절이 싫은 사람들끼리 함께하면서 견딜 수 있음이 감사하다고, 생각을 한다. 한여름의 연애는 가을의 선선함을 기다린다. 트렌치코트 입고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을 맞으며 손을 잡고 산책하고 싶다는 소망으로 오늘을 버틴다. 지나가라, 여름. 무사히 무난하게 잘 지나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