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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Jan 14. 2022

100개의 영화 단상 3. 중경삼림

<중경삼림> - California Dreaming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21년 극장가에 인기작 재개봉 열풍이 불던 중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重慶森林, 1994) 리마스터링판이 개봉했을 때, <화양연화>의 기억을 안고 꽤나 기대에 차서 극장으로 향한 나는 결론적으로는 조금 의아하고 실망한 채로 집에 돌아왔다. 영화 자체가 별로라는 느낌은 아니었고 영화 전체에 흐르는 한여름 홍콩의 정취와 풍경이 마음에 들기는 했다마는 결정적으로 인물 간의 관계성, 캐릭터, 스토리가 내 취향이 아니었다.

  호불호가 꽤 갈리는 작품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다수가 명작으로 꼽는 유명한 작품을 뒤늦게 보고 "이게... 도대체 왜...?"라고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를 땐 기분이 좀 이상하긴 하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내가 좋아하는 박찬욱 감독이 ‘과대평가된 영화’ 중 하나로 <중경삼림>을 꼽았더라. 그걸 알고 나선 뭐랄까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박 감독님,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니 다행입니다.


   

  나는 이 영화에서 왕페이가 연기한 인물 '페이'의 행동들이 다분히 스토커처럼 여겨지고 양조위네 집에 몰래 들어가서 청소를 하고 집안을 이것저것 바꿔놓는 범죄 행위가 말 그대로 주거침입 범죄 모먼트로만 보였기 때문에 불편했고, 사생활의 영역을 동의 없이 침범하는 일을 영화에서 무슨 귀여운 행동인 것처럼 그린 것에 대해 거부감이 들었다.(물론 왕페이가 귀엽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더 그렇게 보였다는 걸 알고 있지만, 감독도 배우와 연출이 맞물려 어쩔 수 없이 귀여워 보일 거라는 걸 알았을 것 아닌가.) 거기에 더 납득이 안 가서 헛웃음이 나오던 지점은 무려 경찰인 양조위가 자기가 사는 집이 그토록 변할 동안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판타지적인 설정이었다. 아무리 무딘 캐릭터라 한들 너무 말이 안 되는 설정 아닌지.(판타지 장르가 아니면서, 판타지적 요소임을 명료하게 제시하지 않으면서 이런 설정과 개연성을 지닌 작품에 대해 나는 관대하지 못한 편이다.)

  게다가 양조위 캐릭터는 별로 할 일 없어 보이기는 해도 명색이 경찰인데 말이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제복 미남 양조위는 집에서 러닝셔츠를 입은 채 그저 귀엽고 엉뚱한 헛소리(비누가 살이 쪘다는 둥 뭐 그런 말)만 한다. 극이 진행되면서 그런 판타지적인(엉뚱함과 재기발랄함을 의도한 듯한) 요소들이 한여름 홍콩의 현실적인 묘사들과 대비되어 꽤 거슬렸다.

 

  

  그러나 여름 특유의 정취가 영화를 보는 동안 고스란히 피부에 느껴진 점과 영화의 테마 음악은 마음에 들었다. 영화를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름의 공기가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하던 때, 하루 내내 <중경삼림>의 테마곡 *California Dreaming을 틀어놓고 영화 속 왕페이의 광기에 빙의해서 춤을 추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왕페이가 가게에 California Dreaming을 크게 틀어놓고 일하던 장면이나 그 노래를 배경으로 양조위네 집에서 청소를 하며 광기 다분하게 춤을 추던 장면들이 어찌나 생생한지. 이 영화는 그 노래로 내게 남았다.

  어떤 영화들은 이렇게 잘 고른 테마 음악으로, 그 음악을 필두로 한 전반적 분위기와 정취로 진하게 남기도 한다. 노래와 너무 잘 어울리던 왕페이의 자유분방한 춤사위는 속이 답답할 때 너무나 닮고 싶어지는 몸짓이었고, 여름날 California Dreaming을 크게 틀어놓고 청소를 하면 그래도 청소가 조금은 더 즐겁다. 이래서 어떤 작품들은 딱히 내 인생작이야,라고 말할 만큼 마음에 드는 게 아니어도 마음에 선명하게 남나 보다. 어떤 계절의 감각처럼.


  여름이 끝나가는 시절에도 주말에 창을 열고 밀린 청소를 할 때나 평일 사무실에 혼자 남았을 때 가끔씩 California Dreaming을 틀어놓고 왕페이처럼 춤을 춘다. 영화 속 왕페이처럼 자유롭고 조금 엉망진창이어도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어 노래를 따라 부르며 춤을 춘다.(그가 범죄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캐릭터였던 것이 영화를 보는 당시에 거슬리기는 했어도 어쨌든 이런 순간에는 해방감을 주는 요소로 작용하나 보다.)

  아득한 여름날을 지나 새 계절로 향하는 지금, 창을 열고 드라이브를 하며 가끔 이 노래를 크게 튼다. 조금 이상하지만 분명 사랑스러운 데가 있던 왕가위의 영화를 생각하며, 캘리포니아를 꿈꾸며.







*California Dreaming

- The Mamas & The Papas


All the leaves are brown

And the sky is grey

I've been for a walk

On a winter's day

I'd be safe and warm

If I was in L.A.

California dreaming

On such a winter's day


Stopped into a church

I passed along the way

Well, I got down on my knees

And I pretend to pray

You know the preacher like the cold

He knows I'm gonna stay

California dreaming

On such a winter's day


All the leaves are brown

And the sky is grey

I've been for a walk

On a winter's day

If I didn't tell her

I could leave today

California dreaming

On such a winter's day

On such a winter's day

On such a winter's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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