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선택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un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2019)에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가 영화의 서사를 관통하는 주요한 맥락으로 등장한다.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와 소피에게 책을 읽어주던 밤, 이야기에 몰입하던 소피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저승의 신의 당부에도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봐서 아내를 다시 저승으로 떨어지게 만든 오르페우스에게 격분한다. 마리안느는 그것도 그의 선택이었을 수 있다고 말하며, 연인으로서가 아닌 시인으로서의 선택을 한 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엘로이즈는, 뒤따라가던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에게 '뒤돌아 봐' 하고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이야기에 대한 소피의 반응은 매우 일반적인 것이지만,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새로운 접근은 매우 참신하고 생소했다. 문제의 연인에 대한 각자의 해석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작별의 순간에 그대로 재현된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뒤쫓아가서 '뒤돌아 봐’하고 말한다. 마리안느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엘로이즈의 외침에 결국 고개를 돌려 눈부시게 흰 신부 드레스를 입은 엘로이즈를 본다. 그리고 그는 문을 닫고 떠난다. 그것이 그들이 서로를 마주한 마지막 순간이었다. 뒤돌아보라고 말을 건넨 것도, 뒤를 돌아본 것도 모두 그들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엘로이즈는 강요받은 결혼의 세계에 영영 남게 되고, 흰 옷을 입은 엘로이즈의 환영을 마주하던 마리안느는 결국 엘로이즈를 원치 않는 세계에 영원히 남겨둔 채 떠나게 된다. 어떤 사랑은 그런 선택을 하게 한다. 뒤돌아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순간이 영영 마지막이 되도록 스스로 선택하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서로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뒤돌아봐서 나를 너의 세상에 없게 남겨두어도 좋으니 마지막으로 나를 봐, 하고 떠나가는 사람의 등 뒤에서 외칠 수밖에 없는 선택과, 뒤를 돌아보면 너는 나의 세상에 없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으로 뒤돌아 볼 수밖에 없는 선택) 상황은 모두 그들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제약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각자 나름의 선택을 했고 결과를 받아들였지만 이별 자체는 그들이 선택한 상황이 아니었다. 강요된 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엘로이즈와 그를 떠나보내야 할 것을 알기에 예술가의 선택을 한 마리안느. 영화를 떠올리며 그들의 선택에 대해 생각한다. 그게 최선이었을까 생각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남을 수밖에 없는 순간들, 그렇게 주어진 상황들과 선택을 생각한다. 선택 아닌 선택들, 여지가 없는 선택들과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이 바뀌고 뒤틀리고 찬란해지고 서러워지고 슬퍼지고 고요해지는지에 대해.
자신이 그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바라보며
이제는 슬프지 않다는
마리안느의 말을 생각한다.
마리안느가 열어준 하나의 세상, 음악을 마주하고 가슴 벅차 눈물 흘리는
엘로이즈를 생각한다.
그런 엘로이즈를 멀리서 바라보던
마리안느를 생각한다.
손에 쥔 책의 28쪽을 언제나 기억할,
영원히 추억 속의 사랑으로 남기를 선택한
엘로이즈를 생각한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에 관한 신화.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아 지하세계로 가서 저승의 신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마음을 움직여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지상세계로 나갈 수 있다는 허락을 받는다. 저승의 신들이 당부한 조건은 지상세계로 나갈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 뒤를 돌아보면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 지상세계에 거의 다다랐을 때 뒤따라오던 에우리디케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 불안했던 오르페우스는 결국 뒤를 돌아보고, 에우리디케는 다시 지하세계로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