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카(Gattaca, 1997)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차갑고 우아한 영화로 각인된 <가타카>(Gattaca, 1997)는 세 주연배우 주드 로, 에단 호크, 우마 서먼의 젊은 시절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한 영화다.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스토리 전개, 덤덤하게 이어지는 주인공의 내러티브에 더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또한 강렬하다. 거기에 익숙한 배우들의 리즈 시절 연기를 보는 재미까지 더해지니 인상 깊을 수밖에 없다.
우마 서먼의 깊고 커다란 눈과 아름다움에 굴복하는 기분으로 우아한 연기톤에 감탄하고, 불구가 된 유망했던 수영선수를 연기하는(주눅 들고 불행해 보이는) 주드 로를 보며 역시 잘생긴 데다 캐릭터 소화도 잘하는구나 감탄하고, *비포 시리즈로 먼저 접했던 에단 호크의 절박하고 순수해 보이는 연기와 그의 리즈 시절 외모에 매 순간 감탄하면서, SF 영화가 이토록 잔잔하고 우아하며 차가우면서 희망적일 수 있구나, 하고 또 감탄한다.
SF 영화의 고전이자 정수로 꼽히는 <가타카>는 지독하게 끔찍하지만 우아하게 정제된 '멋진 신세계'를 가장하고 있는 디스토피아를 굉장히 전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희망적으로 그린다. 어떻게 비전형적이고 희망적이냐 하면, 주인공 빈센트(에단 호크)는 세상이 규정한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는 인물(그는 돌아갈 힘을 남겨두지 않기 때문에 멀리까지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인 동시에 체제에 전면적으로 저항하고 혁명하는 인물이 아닌 체제 안에서 어떻게든 스스로를 숨기고 스스로를 체제에 끼워 맞추는 인물이다. 여느 SF물의 주인공과 다르게 전혀 영웅적이지 않고 혁명가도 아닌 주인공 빈센트는 언제나 불안하고, 스스로를 숨기기 위해 매일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으며 살아간다.
너무나 견고한 끔찍한 세계관을 전면으로 깨부수는 것은, 현실에서 그렇듯, 불가능하다. 주인공은 당연히 체제를 부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으며 영화의 서사는 영화 내에 재현된 체제가 전복될 수 있을 거라는 전제조차 두지 않는다. 세상은 아주 당연하고 우아하게 흘러가며, 전형적인 SF 영화에서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체제를 뒤집는' 혁명은 이 영화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주인공 빈센트의 삶 안에서의 혁명이 있을 뿐이다.
빈센트는 체제를 부수는 영웅이 아닌 어떻게든 자기 삶을 지키기에 바쁜 '꿈꾸는 사람'이다. 빈센트에게는 명확한 목표가 있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구차하고 아슬아슬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한다. 빈센트는 세상이 규정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함으로써 체제 안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한다. 그래서 깨부술 수 없는 영화 속 끔찍한 세계관이, 효율성의 논리와 과학 기술에 의해 합리화된 카스트 시스템이 공고히 자리 잡은 그 세계가 영화가 끝나는 시점에도 유효함에도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에 마음이 씁쓸하지 않다. 결국 빈센트는 우주로 나가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그의 내레이션을 생각하면, 결국 우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가 생을 다해 원하는 것이었고 그는 삶의 혁명을 이루어낸다.
영화가 보여주는 정제된 세계는 아기가 모태에서 나오기 전부터 모든 불완전한 유전 요소를 제거하고 그리하여 그 어떤 불안 요소도 결함도 없는 인간들로 구성된 '완벽한' 세계를 구축하고 유지하고자 한다. 자연적으로 잉태되어 유전적 결함을 그대로 지닌 채 태어나는 '보통의' 인간들은 사회의 최하위 계층에 속해서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모든 기회가 박탈된 채로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빈센트는 자신의 욕망을 제거하지 않는다. 다소 번거롭고 치졸하더라도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신분을 위장하고 자신이 원초적으로 원해온 것('우주로 나가는 것')을 이루고자 한다. 스스로의 정당한 욕망을 환경과 체제에 의해 순순히 제거하고 체념하여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슬프고 무력한가. 우리는 원하는 삶을 위해 투쟁하고 좌절하고 또다시 분투하면서 삶의 희로애락 속에서 매일을 영위한다. 원하던 별을 밤하늘에서 발견한 사람은 다시 눈을 떼지 못하는 법이다. 도저히 이 망해버린 세계에서는 안될 것 같은 일도 분명히 방법은 있다는 희망과 집념, 그리고 실천 아래 고군분투하는 빈센트의 모습은 아슬아슬하고 처절한 동시에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영웅적이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결함이 있고, 인위적으로 결함 요소를 제거한다고 해도 오히려 그 완벽성이 한 인간으로서의 결함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유전적이고 심리적인 결함을 제거한 채 태어난다고 해도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언제나 완벽한 상황과 조건만이 아니라는 것,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관건은 결함의 제거를 통한 완벽성의 유지가 아니라 스스로의 결함과 찾아오는 불행을 극복할 수 있는지의 여부라는 것을 영화는 다양한 인물을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가끔, 주드 로가 연기한 유진(Eugene, 자연 잉태로 태어난 빈센트에게 우성 유전자 증명을 빌려주는 Jerome 본체의 애칭)에 대해 생각한다. 젊고 유망한 수영선수였다가 불구가 되어 빈센트에게 자신의 신분을 빌려주는 일에 몰두하기로 한 그의 슬픔과 좌절에 대해. 스스로를 가두기로 한 그의 생과 최후에 대해. 지난 시절의 영광을 상징하는 은메달을 가슴에 품은 채 완전히 소멸되고자 했던 그 마음에 대해 골몰히 생각한다. 소멸을 좇음으로써 비로소 평안했을 마음과, 우아하고 완벽한 세계에서 완벽한 우성 인자를 가지고 성공하도록 설계되어 태어난 그가 자동차 앞에 뛰어들고자 하게 되었던 경위에 대해, 결함의 제거와 인위적인 완벽이 결코 가져다줄 수 없는 삶의 어떤 요소들에 대해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저마다의 결함을 갖고 태어나 그 결함을 극복하거나 개선하거나 혹은 인정하고 그럼에도 끌어안고 잘 살아보려 애를 쓰고 좌절하고 서로의 결함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고 혹은 보완하기도 하면서, 그 모든 결함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타인의 결함을 그를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이유의 일부로 마주하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김창완 선생님(이렇게 언급하면 마치 아는 사이 같지만 김창완 선생님은 당연히 나의 존재를 모르시며 내가 존경하는 유명인이기에 선생님이라고 친근하게 칭해본다)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해본다. 넘쳐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해 견해를 밝히신 내용인데,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을 그의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있는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매우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난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왜 그리 기를 쓰고 그런 프로그램을 만드는지... 그냥 매일매일 만들어지는 졸작들, 만들고 좌절하는 음악, 실망스러운 문학작품, 그림들... 그게 다 그 자체로 예쁜 거거든요. 그걸 되지도 않는 잣대로, 박수소리 하나만 갖고 잣대를 매겨서 누굴 상 주고 떨어뜨리고. 그런 걸 즐기는 사람들의 잔인한 속성을 부추겨서 장사를 해 먹는 건 나는 반대입니다. 잘하는 애 칭찬하지 말라는 것에도 배치될 뿐 아니라 진짜 음악・예술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즐거움을 상품화하는 거니까요.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그린 그림을 봐봐요. 어마어마하게 이쁩니다. 우리 어렸을 때 되는 대로 엄마, 아빠 얼굴 그려놓고 여기 초록색을 칠해도 될지 불안해하다가 칠하고 나서 좋아하고 이런 기억들 있잖아요. 왜 그런 건 다 잊어버리고 점점 바보가 되는 건지, 사랑도 하고 배려도 하면서 자랄수록 아름다워져야 하는데 바보 같은 어른들 때문에 청춘들이 너무 불쌍합니다."
(중략)
"새로 산 자동차나 휴대전화, 처음에는 흠집 안 가도록 애지중지하죠. 근데 이게 딱 흠집이 나잖아요? 그럼 느낌이 달라져요. 상처 난 내 휴대전화가 굉장히 애착이 가게 되죠. 흠집 하나 없는 휴대전화에 더 애착이 갈 것 같은 건 착각이에요. 모든 게 그렇죠. 너와 나의 사이도 그렇고, 상처 난 내가 더 멋있고 소중한 것이에요. 내가 아무 상처 없이 순결하다, 그거는 별로예요. 기업들이 가상 애인을 출시한다고 해봐요. 처음에는 매력 있는 사람만 만들다가 궁극에는 질투, 불안감, 자학 이런 몹쓸 것들을 불러일으키는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될 거예요. 결국에는 현실에 있는 웬수 같은 애인이 최상품으로 등장하겠죠."
*에단 호크, 줄리 델피 주연의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시리즈. 인기 있는 로맨스 영화 시리즈로, 필자는 여행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비포 선라이즈>를 보곤 한다.
**트위터에 돌던 김창완 선생님 인터뷰 캡처본을 저장해서 가지고 있었는데 원 출처를 찾아보니 한겨레 2011년 9월 8일 자 기사 '넘쳐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청춘을 망치죠'('청춘상담앱' 연재 기사) 인터뷰에서 발췌한 내용이었다. 전체 인터뷰 내용도 매우 좋기 때문에 일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