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자우너, 『H마트에서 울다』
‘푸 파이터스, 에버롱... 벨벳 언더그라운드, 애프터 아워... 카펜더스, 레이니 데이즈 앤 먼데이즈... 김정미.. 햇님? 어? 신중현 커피 한 잔도 있네.'
이 한눈에 봐도 어색한 조합의 플레이리스트는 신간 마크 작업을 하다 발견한 책갈피에 수록되어 있었다. 에버롱과 애프터 아워, 커피 한 잔. 도대체 이 조합은 뭘까 싶어 책 표지를 다시 확인했다. 미셸 자우너, H마트에서 울다. H마트가 내가 알고 있는 그 H마트일까? 교포 이야기일까, 아니면 한국 음식을 끝내주게 좋아하는 외국인일까. 다시 책 날개를 보니 내가 알고 있는 "재패니즈 브렉퍼스트" 보컬이 아닌가! 덕분에 밴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프론트맨, 그녀의 이름이 "미셸 자우너"라는 걸 알게 됐다. 또한 밴드명 때문에 일본계라고 믿었던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도. 게다가 이길보라 감독의 추천사라니. 이건 읽어야 한다.
『H마트에서 울다』 이야기는 번역서가 출간되기 전에 뉴욕 타임즈 칼럼지에 먼저 실렸다. 한국에서 태어나 독일과 일본을 전전하다 미국 오리건주 유진이라는 곳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미국이 국적인 “미셸 자우너”가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상실감과 허전함을 실은 이야기다.
미셸 자우너는 엄마와 함께 이 년에 한 번씩 서울에서 엄마의 가족, 그러니까 할머니, 이모들, 그리고 사촌 오빠와 함께 여름을 보냈다. 어른들은 나와 다른 외모인 조카이지만 한식을 잘 먹는 미셸을 보고 유대감을 느끼며 가족의 끈끈함을 다져갔다. 그는 한국말을 잘 구사할 수 없지만 음식으로 애정을 준 엄마 덕에 한국의 맛에 대한 감각은 분명했다. 이처럼 음식으로 각별하게 엮인 그는 항암치료로 엄마의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져도 감정의 동요 없이 이야기할 수 있지만 한인마트에서 꼬마가 뻥튀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엄마와의 추억에 그만 주저앉고 만다. 이후 미셸은 엄마가 남긴 유산을 기억하며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녀의 첫 정규 앨범 "Psychopomp" 커버에 젊은 시절 엄마의 모습을 싣는다. 그리고 생전 엄마의 목소리도 트랙에 담았다. 괜찮아, 괜찮아. It's okay sweetheart. Don't cry, I love you. (괜찮아, 괜찮아. 아가, 울지마, 사랑해.)
미셸의 엄마는 미국에서 오래 지냈지만 전형적인 한국 엄마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의 엄마와 닮은 지점에서 괴롭기도 했다. 미셸 못지않게 나는 엄마와 자주 투쟁했다. 엄마는 본인이 통제하지 못한 나를 천덕꾸러기로 만들었다가 다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로 만들기도 했다. 그런 엄마는 나와 싸우면 음식으로 화해의 손을 먼저 내밀었다. 엄마와 싸우고 눈물 콧물로 뒤덮혀 침대에 엎으려 울고 있으면 내가 좋아하는 수정과를 만들어 잣 세 알을 띄워 내 방 책상 위에 놓아두고 갔다. 난 침대에서 빠져나와 누가 볼세라 자존심이 상해서 주위를 살피며 몰래 그걸 마셨다. 어떤 날은 엄마와 싸우고 마음이 심란해 죽을 지경인데 문을 빼꼼히 열고 얼굴을 내밀며 치킨을 먹자고 회유했고, 난 언제 그랬냐는 듯 치킨이 목 아아래로 넘어가고 정신을 차려보면 엄마와 함께 티비를 보며 히히덕 거리고 있었다.
엄마는 내 생일엔 손이 많이 가서 평소엔 잘 해주지 않는 새우 연근튀김을 만든다. 흰살 새우를 식감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만 다져서 연근 사이에 샌드한 이 튀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여름마다 매실을 수확하고 손질해서 엄마가 만든 매실 장아찌는 비빔면과 먹으면 환상의 궁합이고,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 나를 위해서 케첩과 콘옥수수를 넣어서 만든 떡볶이, 내 입에 매움 강도가 정확하게 맞춰진 엄마가 만든 떡볶이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일요일 아침에는 언제나 새벽 번개시장에서 사온 따뜻한 손두부와 봄동무침을 먹는 게 우리 가족 루틴 중 하나다.
내가 어릴 때, 그러니까 내 나이보다 더 어렸을 적 엄마는 지금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음식을 많이 만들어 주셨다. 밀가루를 밀어 밥공기를 뒤집어 동그랗게 찍어 만든 도넛을 튀길 때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기름과 고소한 향기, (그래서 이 맛과 가장 유사한 올드패션드 도넛을 가장 좋아한다) 프라이팬 위에 햄과 모짜렐라 치즈가 잔뜩 올라간 피자, 당시 내겐 너무나도 이국적인 음식이었던 토마토 소스 카베츠롤, 색색의 채소를 넣어 말아서 구운 소고기 말이. 여름엔 복숭아와 설탕을 조려서 냉장고에 넣어 얼음과 함께 꿀떡꿀떡 먹게 했는데 그걸 먹으면 온몸이 찌르르 해질만큼 달고 시원했다. 계란 노른자를 체에 내려서 고운 가루가 올라 간 네모 반듯한 감자 샐러드 역시 내가 좋아하는 엄마표 음식 중 하나다. 이처럼 음식은 중요한 기억의 원천이고, 먹는 걸로 인해 우리가 구성된다는 것을 강렬하게 일깨워준다.
오전에 엄마와 문자로 대차게 싸우고 나 역시 미숙한 태도를 벌충하는 마음으로 퇴근 후 엄마를 위해 고등어 솥밥을 만들었다. 쌀을 불리고, 고등어 가시를 제거하고, 고등어에 입힐 소스를 만들고, 솥밥에 올라갈 쪽파를 썰다 문득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이 뭘까 생각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너무나 명확하게 잘 알고 있는데, 엄마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말했다. 내게 너무도 익숙한 한국말. 내가 평생 들어온 그 다정한 속삭임. 어떤 아픔도 결국은 다 지나갈 거라고 내게 장담하는 말.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나를 위로했다. 엄마의 모성이, 엄마가 느꼈을 테지만 능숙하게 숨겼을 무진장한 공포를 제압해버린 것이다. 엄마는 무슨 일이든 어찌어찌 잘 풀릴 거라고 내게 말해줄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난파선이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담담히 지켜보고 있는 태풍의 눈과도 같았다."
"그날 밤 엄마 옆에 누워 있으려니 어렸을 때 차가운 발을 녹이려고 엄마 넓적다리 사이에 슬며시 발을 끼워넣던 일이 떠올랐다. 엄마는 부르르 떨면서 속삭였다. 널 편안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엄마는 어떤 고통도 감수할 거라고, 그게 바로 상대가 너를 진짜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라고. 그 부츠가 떠올랐다. 내가 발이 까지지 않고 편안하게 신을 수 있도록 엄마가 미리 신어 길들여놓은 부츠가. 나는 이제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바랐다. 부디 내가 대신 고통받을 방법이 있기를, 내가 얼마나 엄마를 사랑하는지 엄마에게 증명할 수 있기를."
ㅡ 미셸 자우너, 『H마트에서 울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