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날이다. 지하철 1호선의 에어컨은 가끔 고장이 난다. 유난히 더운 날, 퇴근 시간에 맞추어 에어컨은 거의 송풍 수준이다. 4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지하철을 탔고, 나는 앉아 있던 자리를 양보했다.
아이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고, 의자에 앉아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즐거운 표정으로 놀았다. 아이의 반바지라 짧기 마련이었고 당연히 허벅지가 보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나의 옆, 아이의 대각선에 서 있던 여성이 아이의 바지를 내리며 허벅지가 보이지 않도록 옷을 정돈해 주었다. (허벅지를 토닥이기도 했다.)
그러자 아이 옆에 앉은 어머니가 그 여성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아이에게 “바지 올라가면 안 되지.”하고는 그새 다시 올라간 바지를 내리더니 급기야 가방에서 (어떻게, 왜 하필 있는 거야!!) 파란색 담요를 꺼내 허벅지에 덮어주었다. (보풀이 올라온 겨울 담요였다.) 송풍이 나오는 이 상황에서 난데없이 하반신에 담요를 덮은 아이는 다리를 버둥거렸고 어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담요를 다시 걷었다.
나는 그 여성이 더 이상 아이와 어머니에게 말을 걸지 않기를 바랐으나 급기야 아이 옆에 자리가 생겼고, 그 여성이 그 자리에 앉아 아이에게 말 거는 것을 보고 지하철을 내렸다. 내가 쏜 레이저를 그 여성이 부디 알아채길 바라며 무거운 마음으로 내렸다.
허벅지 살이 보이지 않게 몸을 단정히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받은 이날을 아이는 기억할까?(나는 그 여성이 남자아이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라 생각한다.)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함부로 옷과 몸을 만졌는데도 엄마가 그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이날을 아이는 기억할까?
내 아이에게 말을 걸고, 다정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거절이나 불편함을 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사람에게는 분명 ‘호의’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막상 그 상황이 되어도 어떠한 말을 할 수 있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면 뭐라고 할 것 같냐는 나의 물음에 남편은 “감사하지만, 아이를 만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겠다고 했다. 내가 무엇에 화가 났는지 알 것 같았다. 아주 가끔 아이들에게 말한다. 어른이 때리거나 함부로 몸을 만지면 말해야 한다고 하지만 어려우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어떠한 상황이라도 피하기만 하면 된다고, 도망가라고 말한다.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그러니 보호자가 말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내 아이는 말하는 부모를 보고 ‘말해도 된다’는 것을 경험할 테다. 불편한 상황에 대해 ‘말하기 좋고, 적당한 때’는 없는 것 같다. 그러니,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