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정신건강과 뇌 정서 과학
안녕하세요? 여러분과 저의 경험을 같이 나누기 위해 용기를 내서 글을 시작한 솔닥의 진료실입니다. 저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서 정신치료(상담)와 뇌 정서 과학에 관심이 많아서 꾸준히 뜻을 같이하는 선후배들과 모임을 만들어 공부와 연구, 진료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분야에서 일을 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언제 부터인지 그 경험을 글로써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졌습니다.
<솔닥의 진료실>에서는 외로운 사람들의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반응이 궁금한데 초보 작가라 자신이 없지만 제가 이 일이 재미있고 하고 싶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도움이 되겠기에 일단 해보겠습니다. 제가 모바일로 보니 연재 글은 최신 글이 앞에 있는 것이 보기 편하실 듯합니다.
<프로이트 억압의 비밀>에서는 정신분석의 뇌 정서 과학적 해석을 탐구하고 연재하고 있으니 같이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례는 사람, 시간, 장소 모두 각색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19. 나를 조절해야 한다 = 확실한 방법
정신의학은 철학까지 공부해야하는 어려운 학문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 인문학과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좋은 분야 같습니다. 내용의 깊이에도 불구하고 철학을 대중이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용어의 선택입니다. 의학용어도 그렇지만 자기들끼리 소통하니 타 학문에서 비판을 하거나 수정이 어려운 상태로 굳어집니다. 예를 들어 선험이라는 용어가 이해가지 않아서 따져보니 저 스스로 <경험 이전의 경험>이라는 문구에 매달려서 그런 것 같아요,
정신의학과 전문의들의 정신 치료는 1) 대상(환자)과 주체(치료자) 사이의 소통을 통해서 그 영향이 2) 대상의 내부와 3) 주체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각각의 변화를 전체로 하기 때문에 특히 치료자는 세련된 의식의 조절이 필요합니다.
진화입장에서 의식은 세상과 자기 내부를 관찰, 감시하는 것이 주 본분입니다. 생존에 필요한 도구로 진화된 것이며, 의식의 발달과 더불어 기억 장치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의식은 주의. 집중의 관문을 넘어 선택할 것을 정하는데, 친구 고르기, 짝짓기, 백화점에서 물건 사기 처럼 의식적, 무의식적 선택에 재미있는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철학은 자연, 신과 같은 대상(플라톤)에서 내부의 대상으로 그리고 주관적 인식(칸트, 쇼펜하우어, 니체)을 강조하는 식으로 발전해왔는데요.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철학, 근세 스피노자와 쇼펜하우어에 이르러서는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 즉, 주관적 의지를 통해 자기를 변화(인식의 변화)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말을 들어 보면 염세주의자가 현대 정신치료 ( 정신분석, 긍정심리학, 인지 치료)의 토대를 제시합니다. 프로이트의 억압은 주의를 조절해서 고통을 피하거나 대치하는 무의식과 의식의 조절 과정을 말한 것이지요. 정신분석은 무의식 억압에 의식의 수정을 보탠 것입니다. 저는 부처의 가르침, 명상도 주의(선택과 해방)를 이용해서 자기 인식의 변화를 유도하는 의식, 무의식을 이용한 치유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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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의 진화를 살펴보면서 생물체는 먹이를 구하고 포식자를 피하는 공통된 습성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먹이와 포식자는 자기 밖의 물체, 자연의 대상이며 그래서 대상을 관찰, 감시하는 기관으로 의식이 진화했고 이것이 의식의 본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인류는 의식이 부여한 대상의 관찰 기능을 통해서 생각의 폭과 깊이를 확장해서 과학을 발전 시켜왔습니다. 철학과 자연과학으로 시작하여 심리학, 정신분석, 정서과학이 가미된 마음의 뇌 과학은 더 발전해서 자연의 대상은 우리의 뇌에도 비슷하게 복사되어 내부의 상호작용이 진행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생물학 기반, 뇌 과학 기반의 인식론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결국 우리의 몸과 뇌는 의식에 의해 복사된 자연, 대상과 함께 하나로 경험된다는 것이 우리의 훌륭한 지혜가 되었습니다.
영화 메트릭스(1999)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 네오는 저항군 대장 모피어스를 만나 자신이 사는 세상이 인공지능이 만든 가상현실임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오래 전부터 세상과 자연 즉 인간 밖의 대상과 인간과의 관계를 의심하며 연구한 분들이 바로 철학자들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 Śākyamuni, 기원전 624년? ~ 기원전 544년)는 세상과 사람은 고정된 것이 없고 늘 변화하는 존재라고 생각했고, 플라톤(B.C .427~B.C. 347)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동굴 안에서 들어온 빛이 사람들의 그림자를 반대편 벽에 만드는 것을 보고 벽에 모사된 그림자는 우리들이 사는 세상 즉, 현상계이며 현상계 너머 사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참된 실재, 그림자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사는 세상을 용감하게 부정하고 그 너머의 본질을 찾고자한 그의 노력은 경외할 만하고 비로소 지식과 지혜, 앎의 역사가 출발하였습니다.
인류 지식의 역사 중에서 폴란드의 과학자 코페르니쿠스 (1473- 1543)의 태양중심설(지동설)처럼 세상에 대한 혁명적인 발전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는 편협한 인간중심의 세계관이 객관적인 세계관으로 발상의 전환을 이룩한 것이지요. 이 후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 (1564-1642)는 자신의 수리 물리학과 천문학 그리고 과학적인 실험방법에 의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증명했습니다. 그의 과학적 계산에 따라서 믿을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을 세상, 자연으로부터 제거(분리)시킬 수 있었습니다. 비로써 과학자, 관찰자는 객관적인 입장으로 세상을 관찰할 수 있는 방법적인 토대가 만들어졌고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들이 인과의 문제에 대해 벌이는 짜증스런 논쟁 같은 것을 반복하지 않아도 과학 기술로 진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종교가 지배하는 중세에 세상과 신, 그리고 인간의 관계를 이념적인 논쟁으로 서로 다투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다가 갈릴레이의 과학적 실험 방법의 영향이 크게 철학자들(데카르트)에 영향을 미치고 비로서 흔히 말하는 르네상스를 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절실한 이유에서 인간의 내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내면에는 세상과 자연을 모사한 대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요, 이 문을 연 사람이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 이 후 부터 철학자는 사실 심리학자와 겸업을 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았는데요. <방법서설>에서 데카르트 자신으로부터, 살과 뼈로 구성되고 죽기를 원치 않는 실제 인간을 제거시켜 버리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순수한 사유자라는 추상적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고 선언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인간의 정념을 통제하는 이성의 능력을 믿었던 17세기 과학 혁명의 위대한 두 번째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생각=의식=이성=마음=정신=영혼(âme)을 동급으로 본 것 같습니다. 인간의 물질 성분인 신체는 오로지 감각기관의 지각을 통해서 그 존재를 인식하고, 정신은 사고하는 것만으로 그 존재를 인식한다고 말씀했다고 합니다. 현재 같은 생물학의 지식이 없었던 그는 혈액이나 신경이 신체와 정신을 교통하는 물질로서 동물 영혼esprits animaux이라고 말했는데, 의사 갈레노스의 혈액 용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는 동물영혼의 운동에 의해 정념(passion)이라는 정신의 감각, 지각, 감정(émotion) 활동이 발생하고 유지되고 강화된다고 했는데, 이 정념은 - 놀람, 사랑, 증오, 욕구(배고픔이나 목마름), 기쁨, 슬픔 등 여섯 가지입니다. 그를 사람들은 근대 철학의 효시라고 부르는데 정신의학, 정서과학을 전공한 저는 그가 마음을 존재의 증거로 탐구 했고, 신과 동등하게 혹은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주체임을 선언한 것으로 지금의 철학 보다는 심리학의 원조로 생각됩니다.
데카르트를 비판하는 여러 목소리가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주장하듯 자기 자신과 실제 인간을 제거시켜 버린 순수한 사유자라는 추상적 존재가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며, 그가 사용하는 언어조차 타인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이러한 비판을 하다보면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뇌 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데카르트의 오류>에서 체화된 뇌의 입장에서 탈 육체화한 마음은 존재할 수 없으며 최근 뇌 과학의 경험은 감정과 느낌이 없다면 이성이 제대로 된 결정과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비판들은 당시의 환경에서 철학적 존재를 마음의 작용으로 설명한 데카르트의 위대함을 감추지는 못합니다.
근대 철학자 중에서 의식과 대상을 더욱 체계적인 논증으로 우리를 안내한 사람은 위대한 철학자 칸트와 그의 계승자인 쇼펜하우어를 들을 수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1724-1804)는 모든 지식은 경험을 통해 얻는 것이라는 영국의 존 로크, 버클리 경, 흄으로 대표되는 경험론(經驗論 empiricism)과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대륙의 합리론 (合理論, rationalism) 을 통합했습니다. 합리론은 인간의 이성은 태어날 때부터 지식(본유 관념innate idea)을 가지고 태어나며 경험의 역할은 지식을 일깨우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입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한 분이 칸트로 그의 철학은 '초월적'(각주)(transzendental), 주관적, 구성적 관념론으로 이름 합니다. 그는 인간은 본래 가지고 있는 본유 인식 능력(형식)의 틀에 경험을 담고 경험을 재료(내용)로 삼아 이성을 성장시켜 보편적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요, 경험론과 합리론을 적절히 정치적 타협을 했다는 비판 이전에 저 같은 뇌 정서과학의 신봉자는 그가 말한 본유 형식에서 타고난 우리 뇌 구조의 원형을 대비시켜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출생 후 경험에 의해서 배우고 지성이 성숙하는 과정에서 가지고 있는 인식의 형식 또는 능력 틀이 경험을 담고 배양하는 기능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어떤 인식도 감성을 통해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칸트는 사람의 몸의 피부, 눈, 귀처럼 감각기관을 당시 용어로 ‘감성’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 개념은 경험 이전에 미리 알고 있거나 가지고 있는(선험적) 감성 형식 또는 직관 형식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판단 능력을 ‘지성’ 이라고 이름 했는데 판단에 필요한 기초적인 개념들의 범주도 역시 가지고 있는 선험적 개념 형식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가지고 있는 형식의 틀은 경험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고 배양하는 틀로서 작용하여 이성을 성숙시킵니다.
당시는 생물학이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과학자 뉴튼의 물리학에 영향 받은 철학자가 주장한 생각을 현대 의학에서 드러난 뇌의 해부학적 실체와 기능으로 보면 그의 생각이 유치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선험이라는 용어는 뇌 과학에서는 분명치 않은 용어입니다. 선험이라는 말은 우리가 거의 사용하는 용어가 아닙니다. 저는 고민을 해보니 <경험을 가능케 하는 본유의 장치>를 말하는 것 같아요. 그는 선험의 예를 시-공간 형식에서 찾는데, 좀 더 분명한 저의 해석은 지각( 그는 감성이라는 말로 감각의 받아들이는 그릇의 의미로 사용)을 도와주는 < 타고난 능력의 감각처리 과정> 인데 이런 과정을 진행하는 뇌의 구조물들은 많이 있지요. 뇌 구조물은 당연히 선천적인 것이며, 예를 들어 시, 공간의 지각은 해마의 기능입니다. 그러고 보니 해당하는 정신의학, 심리학의 용어는 <비서술적 (무)의식의 작용> 인데 뇌 과학을 아는 현대의 칸트라면 시공간 지각에 앞서 더 중요한 전전두엽의 <주의> 기능을 빼 놓지 못 할 것입니다. 중뇌의 감정 핵이라든지, 시상, 편도, 해마, 그리고 뇌 실질의 기능은 칸트의 본유 형식을 뒷받침하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근거가 됩니다.
그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이라는 수식어로 이름 한 혁명적인 인식의 변화는, 인간이 대상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 대상의 관념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진리는 객관적 내용이 아니라 주관의 판단 형식에서 찾아야 하는 무엇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그의 가르침은 외부의 대상이 내부의 대상으로 투사되고 이를 관찰한느 의식이 관념을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사유하는 주체는 투사된 대상, 의존하고 싶은 대상, 현상계의 한계와 불완전성을 깨달으라는 말로 들립니다. 칸트 철학을 뇌 과학 기반의 인식론으로 전환한다면 내부의 관념적 대상의 생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므로 의식의 목적에 맞게, 외부 대상과 내부의 대상을 모니터링 하는 원리에 근접하는 주장임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됩니다.
정신의학자들은 정신질환의 발병 이유를 생물학적 요인, 사회적 요인, 그리고 심리적 요인으로 열거하여 그 비중을 개인에 맞추어 분석하기도 합니다. 사유, 생각, 이성의 발전도 가지고 태어난 본유의 형식(유전, 선천적)과 사회적 경험 그리고 이 모든 요인들이 뇌 내부에서 주체의 심리적 요인과 상호 작용하면서 수정과 변화를 거듭할 것입니다.
아르투어 쇼펜하워 Arthur Schopenhauer (1788년~1860년)는 칸트의 충실한 연구자이며 완성자라는 평가를 받아왔다고 합니다. 그는 칸트 철학을 주체의 적극적 의지를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세계관은 허무주의, 염세주의(Philosophy of Nihilism)로서 인생은 고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방법이 맹목적 의지나 연민, 동정보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내세웠습니다. 그는 이념, 대상은 주관이 관여하는 인식의 조건 하에 다양하게 해석되므로 의지의 조건이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고통스런 대상 보다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내부를 먼저 수정하는 의지의 철학은 오늘 정신의학자가 행하는 정신치료의 방식입니다. 그는 칸트의 주관적 판단을 더욱 발전시켜고 삶의 고통을 치유하는 철학으로 한 단계 높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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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그 동안 글을 쓰고 싶었으나 일이 많아 마음만 잠시 돌아보곤 했지요.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행복이라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네요.
A는 집에 계속 있으니 답답해서 광장에 갔다가 많은 사람들을 보고 불안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많은 사연이 있었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집에 있을 때가 가장 편하고 동네, 지역의 모임에도 않가는 편인데 가끔 지루하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의 상태가 안정되고 참 좋은데 자신을 과거에서 부터 쫒는 사람이 있어 불안합니다. 그 사람이 찾아오면 자신의 위치와 상태가 노출되고 모른 안정이 깨지는 줄로 생각합니다.
- 인간의 모든 감정은 생존의 도구입니다. 본질은 선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 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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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명상을 통해서 마음을 관찰하기를 권고하셨습니다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분명 운이 좋아 마음의 고통이 없이 살아가거나 분명 고통은 있다면, 그것을 이런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이 없는 분들이겠지요.
어쨌거나 전자의 분들은 행복하신 분들 이어서 그렇게 살아가도 아무 불편이 없으니 누구의 도움이 필요 없고요, 후자의 분들은 도움을 준다 해도 거부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면 마음을 편히, 즐겁게 하는 방법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저의 글은 자신이 느끼는 고통을 심리-의학적 방법으로 좀 더 일찍,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줄이려는 분들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저는 불교의 방식인 冥想(명상) 禪(선)은 마음을 관찰하거나 분석하는 방법에 있어서 서양의 정신분석과 공통된 과정이 상당하다고 저는 느끼고 있으며, 명상의 용어와 방식이 한국의 문화권에서 좀 더 대중에게 편하게 다가갈 수 있으므로 언제부터인가 환자들에게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만, 그럼에도 여전히 환자들에게는 큰 차이가 없이 양 쪽 방식이 다 이해와 실천이 어렵습니다. 사실 명상이라는 말보다는 마음을 관찰하자고 합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어 일상에서 실천하도록 합니다. 명상은 요즘은 오히려 영어권에서 많이 연구와 경험을 쌓아서 이들이 지은 쉬운 영문 책이나 이를 번역한 책이 한문을 번역한 어려운 책 보다 편할 때도 많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수련이 어렵다면 그 어려움은 사실 자신의 변화의 동기와 지속성에 있습니다. 뼈저리게 아픈 고통과 경험이 있어야 동기가 발생하고 변화의 의지가 생깁니다만, 정신이 미숙하거나 약하면 동기를 지속하기 어렵고 부정적인 세계관에 빠지기 쉽습니다. 명상이 대중화돼있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쉽게 보지만 결코 그렇지 않고요, 정신 분석 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명상의 기법들이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는 분들의 오로지 한 가지의 직접 치료 도구로는 적당치 않으나 보조 요법으로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스승을 잘 만나야 합니다. 불필요하게 힘들게 여기저기 우물을 파도록 돕거나 내버려두는 분들을 만나면 같이 헤매는 경우가 많지요. 특히 유명한 분들, TV에 나오는 분들은, 인간은 아무리 뛰어나도 유명세와 명예에 본분을 동시에 유지 하기 어렵다는 점과 상업적 인간이 되기 쉽다는 점에서 너무 많은 돈을 지불하지 말고 먼저 스스로 평가해 보기를 바랍니다. 아니면 자신이 마음 주치의에게 소개를 받을 수 도 있습니다.
세 번째, 특히 자신의 정신세계가 불안정하다고 느끼면 먼저 과학으로 검증된 정신 건강의학의 도움과 진단을 받아 보고 더 필요할 때 명상가들에게 내면의 지도를 받기 바랍니다.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명상은 언제나 할 수 있지만 의학적 질환은 시기를 높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명상의 스승들은 교통정리를 잘해주지만 그런 분들은 드물고 의학적 경험은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경험과 분별력이 떨어지는 사이비 분들이 제법 많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됩니다. 고집스럽게 " 과연 우리 것이 좋은 거야"라는 비 과학적 믿음으로 한 없이 물 없는 우물을 파지 않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명상과 선의 궁극적 목표라면 그 깨달음이란 높이 있는 것이 아니고 좀 더 마음을 정화해서 편히 사는 방법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해봐서 도움이 되면 더 전진하는 것이고요, 도움이 안 되면 시간 낭비하지 않는 것이지요. 등산, 음악 감상, 여러 가지 즐거운 취미가 정신 건강에 더 유익할 수 도 있습니다.
여기 오래전 제가 마음의 관찰을 하도록 지도하고 있던 젊은 청년 M을 소개합니다. 그에 대한 기억은 참 좋습니다. 지금은 멀리서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간간이 소식을 전해 옵니다. 잘 지낸다고요.
M이 몇 년 전 저를 처음 찾아올 때는 20대 중반, 건설 현장의 노동자였습니다. 우울증과 무기력증은 주로 인간관계에서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일 터에 가면 사람들과 발생하는 자연스럽고 다소 부담스러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불안해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고 꾸짖는 느낌이 들고 또 자신이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거나 버릇없다고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매우 조심스럽고 민감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어려서 이혼 한 엄마와 살면서 양아버지에게 많이 야단을 맞고 자랐다고 합니다. 이복형제들과도 갈등이 있었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집을 나와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건설 인부들이 술을 좋아하고 같이 일을 하다 보니 어울려 술을 마시게 되었으나 거친 이 사람들의 태도에 항상 자극을 받아 힘들게 지냈습니다.
그는 무기력증이 심해져서 하던 일을 관둘까 고민을 하면서 상담을 해왔고 약물치료와 함께 그의 인관관계의 핵심 감정인 두려움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두려움 같은 기본 감정이 심각한 것은 처음 아주 어려서의 애착, 트라우마의 문제일 수 있어서 이것이 고착되어 변화가 어렵거나 중도에 치료가 중단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는 명석하고 자신을 고치려는 의지가 강해서, 잘 따라와 주었습니다.
마음을 관찰하면 그 작용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고 의문이 생기면 스스로 해석과 분석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주의, 집중이 점 점 확장됩니다. 그래서 우선 초심자가 처음 할 일을 마음을 관찰하여 생각과 감정을 연결시키는 일입니다. 일상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단초는 감정, 느낌을 충실히 관찰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이 단계에서 좋다, 나쁘다 등의 판단은 최대한 하지 않습니다. 이 또한 관찰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환자들은 일반인과 달리 주의력이 부족해서 생각보다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더 수월한 관찰 법 같습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객관적 사실(날 경험*)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M은 원래 사람들을 두려워했는데, 늘 그렇기 때문에 그 감정을 특별한 경험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는 구별되는 경험*으로 느끼기 시작했고, 언제 어디서 어떤 조건에서 두려움을 느끼는지 관찰하고 보고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무의식적으로 습득된, 학습된 감정과 행동은 안다고 해서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관찰을 위해 주의를 하면서 두려운 감정을 반복적으로 느끼고 경험하면 (가슴으로 아는 것), 아는 것이 확실해지고, 요동 치던 감정이 점 점 조절되고, 감정이 순화되므로 행동이 변화하고, 변화는 다시 긍정적인 생각을 만들게 됩니다. 이는 스키너의 도구(보상) 학습의 원리로 잘 알려진 과정이며, 길고 긴 진화의 시간에서, 동물과 원숭이는 우연히 이 기회를 포착하지만 인간은 앎과 의지의 힘으로 바로 시작할 수 있고, 환자는 또한 의과학의 산물인 약의 도움을 받아 극복해갈 수 있습니다.
인지치료 전문가 중 인지, 즉 생각의 모순과 그 스키마를 강조하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일반적으로 생각의 출발점과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인과 방송인들은 순진한 사람들의 감정을 휘둘러(선동) 생각을 조정합니다. 감정을 기초로 한 촛불 정권은 그렇게 태어난 것이며, 국민의 감정을 지배하는 자가 권력을 얻게 된다는 평범한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제가 최근 감명 깊게 본 미국 대법원 판사 Ruth Bader Ginsburg의 일대기를 그린 미국 영화 "On the Basis of Sex"는 한 여성 법조인의 이성이 어떻게 남자들의 주도하는 불합리한 세상을 법의 정신을 실현하면서 갈등과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지 잘 표현했는데요, 화면에 보니 대법원 법정의 전면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크게 적혀 있었습니다. " Reason is the soul of the law "
우리의 마음과 몸도 같습니다. 감정이 주도하는 뇌는 항상 자극에 민감하고 불안정하므로 뇌가 성숙하고 경험이 쌓이면서 이성이 주도권을 받아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비로소 환자가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하면 생각이 변화하고 균형 잡힌 개념이 생기면, 다시 불안정한 감정에도 영향을 적게 받습니다. 이 힘든 싸움은 고지의 능선을 넘어선 것이며, 감정과 생각이 일치되어 균형을 찾고, 이다음은 쉬면서 경치를 천천히 구경하며 내려가도 됩니다.
* 날 경험 ; 필자의 용어로 자주 경험하던 것이 관찰, 주의의 도움으로 보다 새롭게 느껴지는 경험, 경험이 체화된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롭게 느끼는 경험
* 구별되는 경험 ; 대상의 차이에 따라 느낌의 차이가 있다는 것
저는 제 관심 분야가 마음과 정서 과학 인지라 전부터 명상의 뇌과학과 생물학적 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간간이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우리 문화에 TV에 나오는 유명한 스타 스님들 덕분에 명상 冥想, 또는 선 禪이 정신건강에 좋은 수련 법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의사들도 명상 의학회를 조직해서 본격적으로 명상을 임상에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도중에 <명상>과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일부 좀 과도한 기대로 바뀌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명상을 하나요?
여러분들이 명상을 한다면 과연 얼마나 참여하고 공부해야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무엇을 기대하고 바라지 않을 것은 무엇인가요?
저도 수련 경험이 없어서 이런 막연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오래전에 저는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의 <깨달음은 없다>라는 책을 읽고 깨달음에 대한 환상은 접어버렸습니다만, 헤네폴라 구나라타 스님과 샬럿 조코 백의 책은 너무 좋아서 보고 꺼내서 또 보는 책입니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는 깨달음이 없다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합니다(이분은 유명한 지도 크리슈나무르티와 이름이 같습니다). 그는 깨달음의 방법은 사람이 하는 모든 번뇌는 생각의 소산이기에 생각을 멈추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데 생각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알려진 수행들은(명상, 염불, 갖은 고행... 등) 오히려 자아를 강화시키므로 이를 위한 노력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멀어진다고 합니다. 깨달음의 상태가 전지전능의 상태가 아니라 생각이 끊어진 상태일 뿐 돈을 번다던지 세상의 지혜와는 별개라 현실에 도움은 안된다고 합니다.
수행을 해본, 그리고 많은 실패를 경험한 분의 솔직한 자기 고백입니다.
<감정-생각이 녹아내리는 과정을 분명하게 보는 대신 환상에 불과한 그 생각들이 일어나는 것을 억지로 막았다면, 그 감정과 생각은 곧 다시 일어날 것이다,,, 감정-생각은 그릇된 망상의 뿌리, 일방적인 생각에 붙잡힌 끈질긴 집착이자 우리가 조건 지운 인식으로 형상화되었다.>
윗 문장은 제가 요즘 읽은 평상심 선종의 주창자인 샬럿 조코 백이 자신의 책에서 소토종의 학자인 멘잔 젠지 面山瑞方(1683-1769)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제가 한 동안 연구한 프로이트 박사의 억압/억제와 매우 유사한 내용임을 알아 살짝 놀랬습니다. 이 문장을 보면 <명상, 선>의 기본 관찰법은 감정-생각의 인식 과정이 조건 지운 인식을 깨닫는 과정이며 멘잔 젠지는 그런 생각이 사라진 상태가 깨달음, 즉 사토리 그 자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저는 인용된 한 문장만 읽어 보았지만 "조건 지운 인식"이라는 것이 제게 익숙한 *조건 학습-파블로프나 스키너가 연구한-으로 생각됩니다. 저의 추정이 그럴만한 것이 사람의 모든 감정- 생각은 출생 후부터 경험한 조건 학습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조건 학습이란 원인-결과가 분명한 자신의 고유한 감정과 대상을 연결시켜주는 가장 기초적인 학습이며 자동화 과정인데 무의식적인 과정이라서 알아채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유명한 프로이트 박사가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쓴 주제인 "억압/억제"가 바로 실제로 "조건 학습, *도구적 학습"이라는 재미있는 주장을 제가 하고 있습니다. 학습은 생존에 꼭 필요한 기본 기능인데 그것이 신경증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명상과 선의 도사들의 말씀은 예를 들어 고통스러울 때, 화가 날 때 내 탓, 남 탓이라고 판단하지 말고 계속 감정-생각을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화가 가라앉으면 그 엄청난 생각과 감정의 차이를 알게 될 터이고 그 차이는 자신의 인연, 즉 타고날 때부터 영향을 받은 감정과 인지의 학습이 결정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하면 無常(무상)을 알게 되고 인생의 苦(고) 조차도 무상한 것이니 그저 하루하루 수련하며 무아無我를 경험하고 열반을 기다리면 완전히 고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붓다의 세계관은 아주 독특한 것입니다. 보리수 나무 밑에서 오랫동안 생각한 결과 시간의 무한성에 비해서 지금의 존재는 존재라고 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걸 깨달은 거죠. 삶과 죽음의 문제도 깃털보다 가벼운 것인데 인간사의 모든 문제가 문제라고 할 것도 없다, 즉 존재 고통은 대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그 문제를, 생각을 관찰한 결과 의식은 확장되고 고통은 소멸(소거* extinction)되었습니다.
고통이 없어진 것은 행복을 가져다준 것과 같습니다. 그는 이러한 보상(도구적) 학습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확신하고 더 정진하게 됩니다. 이런 자신감과 대중을 도와주는 기쁨은 자비 care, play라는 감정을 확산시키고 행동을 강화시킵니다.
저의 글에서 밝혀 온 바이지만 조건 학습은 무의식적인 것이라 혼자서 터득하기는 참 어려운 과정입니다. 프로이트는 "너 자신을 알라" 하는 슬로건으로 정신분석을 통하여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려 했는데, <억압>의 내용을 알아가는 분석 과정이 조건 학습을 밝히는 것과 같은 과정입니다. 이런 과정들은 경험 없이는 이해가 어렵고 또 얇은 지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알고 있는 것과 몸과 마음이 반응하는 것은 배로 태평양을 건너는 정도로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수련과 경험에 비례하겠지요.
그래서 도사들은 깨달음의 실체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있다고 합니다. 깨달음에 대한 내용은 우리가 이미 경험했거나 알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명상에 의한 변화도 뇌에서 일어나는 일도 단순한 학습 현상입니다. 다만 관찰을 통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정신의학자들은 실험을 통해서 알고 있지만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터득하므로,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타고난 정신력과 인지 능력이 없으면 보통은 고통으로 인하여 우울증이나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깨달음을 통해서 무진장 행복해지거나 인격이 변하거나 몇 마디 말로써 사람들의 존경을 받거나 하는 그런 변화가 아니라는 거죠. 혹독한 인생의 고통에서 대상의 자비가 만들어지니 사람의 마음은 한 없이 신비로운 존재이나 그 변화의 시작은 자기 마음의 관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 경험에서 인식이 공고히 되려면 새로운 학습, 도구적 학습*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것이 명상 수련의 과정이니 정신의 유연성, 주의력, 그리고 타고난 인지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전문 출가승 조차도 어려운데, 가르칠 분이 부족한 일반인에게는 참으로 험난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붓다도 인간입니다.
깨달음도 멀리 있는 게 아니고요.
그는 명상이 가져다 준 우리 뇌 안의 화학적 물질을 잘 사용해서 고통을 기쁨으로 승화시킨 위대한 스승입니다.
어렵지 않지만 쉽지도 않은 깨달음에 집착하지 말고, 그 마음을 관찰하는 습관이라도 익힌다면 여러분의 마음의 품격을 한 단계 높여 줄 것입니다.
* 조건 학습 (classical conditioning) 파블로프의 전통적 학습
* 소거 (extinction) ; 조건(혐오) 학습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부단한 관찰은 '조건 지운 인식' 을 해제하므로 이를 학습 심리학에서는 소거라고 합니다.
* 도구적 학습 ; 스키너의 보상 학습, 여기서는 긍정 학습의 의미
성인의 사회에서도 회사, 단체, 가정에서도 항상 이런 일들- 갈등, 왕따, 감정싸움이 일어나게 마련인데 어떻게 일이 잘 풀리는지는 또한 그 사람의 지혜, 사회 구성원의 문화와 조직의 탄력성에 달려 있습니다. 구성원 간의 갈등과 싸움은 한쪽을 제거하고 승리해야 하는 과거의 전쟁이나 이데올로기 패권 쟁취가 아니므로 대부분 같이 협조하고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서 인간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 이루어질 수 있냐는 것입니다.
또한 상대에 대한 이해는 자신의 감정-생각을 잘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하므로 특히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직장 내에서 분쟁과 심리적 동요는 자신과 상대를 이해하는 두 가지 과정을 항상 복잡하고 어렵게 만듭니다.
K는 직장 내에서 후배이면서 직급은 한 단계 높은 L과 인간관계의 문제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불면증과 감정의 동요가 주된 호소이지만, 병적인 진행이 온 것은 아니고 갈등 수준에서 불안 증상이 발생해서 주원인인 마음의 갈등을 해소하면 좋아질 듯 보여서 치료적 상담을 하였습니다.
K와 L은 10년 이상 같은 직장 내에서 형- 아우 하면서 잘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K가 입사 선배이고 L은 일 년 늦게 입사했지만, 인간관계가 매끄러운 L이 일 년 전 승진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K는 다른 사람과 같이 있으면 인사를 하지 않고 둘이 있는 때만 아는 척이니 눈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K는 직급을 달고 나니 표정이 달라진다, 사람이 저럴 수 있냐고 내심 불쾌해졌고 그런 분위기에서 L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빼놓고 생일 파티를 하는 등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회사 안에서 L과 말다툼이 생기 L이 그에게 욕을 해서 그는 이 것을 문제 삼아 상부에 보고를 했고 L은 K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으나 평사원으로 강등되는 징계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뒤로 K는 회사 내에서 더욱 따돌림을 받게 되어 부장에게도 시정해달라고 하였으나 행동이나 분위기 변화가 없다고 합니다.
<저는 회사 안에서는 인사를 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K 가 직급은 다시 내려와도 그 수준에 결정권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에게 붙고 내가 옳은 말을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저를 모욕한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는데 할 만큼 했는데,,, 제가 잘못인지 선생님이 솔직히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뭘 고쳐야 하는지, 제 잘못이라면 충분히 고칠 마음을 먹고 찾아왔습니다.>
K의 태도로 보아 그는 L과의 관계 개선을 진심으로 바라는 듯했습니다. 본인도 이렇게 회사에서 불편하게 지내는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죠. 그리고 L이 자신과의 분쟁으로 직급이 떨어진 것, 자신의 질투로 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평판의 문제,, 등 복잡한 일들로 자신도 무척 어수선하니 저를 찾아온 것 같았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서로의 사정을 알고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이 행동으로 변하는 것은 한국과 미국 사이에 태평양을 건너는 일과 비슷합니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알려주면 고친다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두고 볼 문제이고 또 제가 여러 번 방문해서 도움을 더 받아야 한다고 해도 병적 증상이 없으니 찾아올 것 같지도 않습니다.
저는 K에게 L의 사과를 받아들였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공식적으로 사과를 받아들였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다시 L과 술 한잔 하면서 서로 마음을 털어놓고 대화를 해보았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가 직급이 올라간 지 둘이서 대화하거나 더구나 술을 마신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관계 개선을 하려면 서로 사과를 받아들이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같이 마주 앉아 대화를 하지 않고 그것이 가능한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직장 내에서 서로 만나면 눈인사를 하는 것이 두 분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결국 내용 없는 명분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는 원장님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다고 합니다. 자기 입장에서만 느끼고 행동해 왔다고 합니다. 그는 말을 나누면서 여러 번 생각하더니 자신이 그를 용서하지 않은 것이 맞다고 말했습니다. 술 한잔 마시자고 하고 자신이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해보려 한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 뒤로 K는 저를 찾아오지 않았지만, 잘 해결되었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즉문 직답은 제가 원하는 고객을 돕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들이 원하거나 명쾌한 답은 실지 도움이 될지 의문이기 때문입니다.
거절 못하는 이유
어떤 분들은 좋은 말로 거절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속담에 “지킬 수 없는 약속보다 지금 거절하는 게 낫다.”라는 말도 있어요. 어떤 분의 글에는 분명하게 "아니요."라고 거절하라고 합니다. 인터넷의 문구를 찾아보니 참 좋은 말들이 있습니다. '거절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거절하는 이유를 근거를 바탕으로 설명한다, 단호하게 거절하기보다는 생각해 본다고 하고 바로 거절하지 않는다, 거절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고 물건이나 약속이기 때문에 이 점을 분명히 표현한다, 해주고 싶지만 이런 이유로 곤란하니 다음에 노력 하마, 등의 긍정의 메시지를 포함한다'는 것들입니다.
참고하면 다 좋은 말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가 드리려고 하는 말씀은 ' 거절하는 것이 자신의 내부의 문제' 때문인 경우입니다. 과거의 상처를 드러내는 두려움 때문에 거절 못하는' 경우입니다. 사실 이런 경우가 많은데 깊은 내면을 보지 못하면 여러 원칙이 잘 듣지 않게 됩니다.
Y는 건설회사의 여직원입니다. 사무직, 평직원이지만 회사의 물품의 출입을 담당하기 때문에 그녀의 역할은 중요하고 영향력 또한 상당합니다. 이 회사의 규칙상 물품의 출고 시간은 매일 12시까지입니다. 전날 고객이 주문한 오더를 12시까지 알려주어야 출고가 가능한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영업 사원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시간을 넘어서 주문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고, 정말 출고가 불가능한 너무 늦은 시간에 시간에 영업 사원이 빌면서 한 번만 해달라고 하면 Y는 창고 직원이 거절하거나 야단을 치므로 본인이 오더를 전달하지 못하고 직접 창고로 가서 물건을 꺼내와서 포장하는 일들이 잦아졌습니다.
Y는 이런 일로 스트레스가 많아져서 바로 위의 대리나 과장에게 의논을 해도 '원칙대로 해라'라는 말만 할 뿐 영업 사원들에 대한 대책을 세워주지 않았습니다. 부장님은 시간이 지나면 전화를 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업무 전화도 있으니 안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거절을 못하는 <착한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마음이 너무 착하지만 거절을 못하는 본인은 행복할까요? 행복하다면 참 다행이지만 대부분 속으로 많은 불편을 가지고 삽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업 사원들은 거절해도 들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좋게 타일러도 안 되니 서로 감정만 격해지고 제가 스트레스 불안이 있어서 어차피 해줄 것 해줍니다. 서로 굳이 자증 낼 필요가 없어 웃으면서 해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규칙을 좋아하고 합니다. 저번에 영업 사원이 저와 일하기 편하다고 하는데 저는 안 좋게 들려요. 마감 시간 넘어서 부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봐요.>
그녀의 성격이 특별한 것은 자신이 거절을 거의 하지 못하며, 거절하면 상대방에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절하거나 내 표현을 하면 상대방이 싫어하거나 스트레스받을 까 봐 내가 불편한 감정을 드려내지
않으려고 해요. 굳이 나 때문에 스트레스받을까 봐. 내가 그렇게 말을 해도 되는 건지 말로 표현을 안 하고 그냥 옷고 넘겨 버려요. 제가 상대의 그 감정을 느껴서 그럴 것 같아요. 누가 짜증내고 거절하면 싫을 듯, 남들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낄 것이니 되도록 좋게 대로 해주고, 고통을 미리 예견해서 들어주게 됩니다. 상대방의 외적인 고통보다 저의 내적인 고통을 선택해요.>
그녀의 스트레스 상황, 불안과 우울감을 달래 주면서 상담을 해보니 어려서부터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그녀의 성격의 중요한 부분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장 환경이 불우했던 그녀는 죄책감이 발달했고 거절이 자신을 향하는 징벌로 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는 사회생활에서 꼭 필요한 인간관계의 줄다리기 게임이 두려움으로 작용하고 있어 견디는 힘이 약한 상태입니다.
그녀의 관계의 원칙은 <둘 중의 하나만 아프게> 였지만 친절한 거절이 둘 중 하나만 아픈 것이 아니라 <둘 다 모두 이익>이 되는 방법이며, 내 이익을 우선하면서 상대방도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경험으로 배워나가야 합니다.
어른들에게 기억과 환상의 구별은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개념의 차이가 마치 성인과 아이를 구별하는 것만큼 뚜렷하다고 느끼시죠?
그런데 저는 여러분에게 기억은 늘 환상을 낳는다고 말하려 합니다. 그래서 기억과 환상은 현실에서 어른들 조차 구별이 어려운 경우가 자주 있다고 말합니다.
기억된 현재 remembered present와 전이 transference 현상
저는 환자들의 호소를 듣고 위로하고 공감을 해주는 직업인이지만 그와 저의 감정 표현과 느낌 사이에는 뭔가 엄청난 인식 차이가 있다는 것이 궁금했었고 오랜 시일이 지난 후에야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호소하는 분과 저는 다른 사람이라는 차이, 소통 방법이나 공감 능력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래전 저를 찾아온 K는 젊은 직장인으로서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공황장애 진단과 치료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처음 발병했을 때 불안 때문에 대중교통, 버스, 지하철 타기도 매우 어려웠고 사람이 많은 광장이나, 영화관 같이 닫힌 공간은 출입하지 못했습니다만, 치료 후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직장을 잘 다니고 있습니다.
당시 그는 같은 직장 내의 동료와 갈등을 상담했습니다.
그의 동료는 그전부터 자신을 힘들게 해 왔다고 합니다. 같이 분담해서 할 일을 미루는 습관이 있어 보다가 자신이 일을 다 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을 거명하고 장난기 섞인 농담으로 놀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주 머리를 쓰다듬거나 어깨를 치고 가는 등 무례한 행동을 해서 자신은 그런 행동이 싫다고 정식으로 말을 하자 그는 자신이 미안하며 싫어하는 줄 몰랐다고 사과했다고 합니다. 그런 사과는 잠시 뿐 K는 여전히 그가 자신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놀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 K는 그가 자신을 얕잡아 보는 것과 자신을 자기보다 서열을 낮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지금까지의 일들이 너무 화가 난다고 합니다. 너무 화가 나고 부글부글 끓어 올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와 이런 문제로 싸우면 유치하다는 생각도 들고 참고 억제하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돼서 일하다 말고 멍 때린다고 합니다. 자신감이 점 점 낮아지고 스스로 한심하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 신경 학자인 알렉산더 루리아 Aleksandr Luria는 동료 인 Lev Vygotsky와 함께한 연구에서 인간의 뇌 성숙 과정에서 지각 perception과 기억 memory의 계층(서열) 배열이 바뀌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1].
아기의 경우, 즉 생각과 느낌은 모두 외부 감각을 느끼는 지각 perception [2]에 좌우됩니다. 그래서 아기들의 인지는 구체적이며, 현재 느껴지는 지각 현실에 의해 좌우됩니다. 그러나 발달 과정에서 학습 경험에서 얻는 추상적 지식(의미 기억)이 점점 정교하게 부호화되어 나중에는 지각 과정에 영향을 주고 통제하게 됩니다. 감각과 지각에 몰입되면 감정의 통제가 어려워 불안해지고 추상적 의미에 몰입되면 꼼꼼하고 각박한 원칙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설명도 어렵고 이해도 어렵지만, 적어도 일반인이 알고 있는 불교의 설법에도 있는 것으로 보아 석가는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불교의 근본 사상인 삼법인三法印에 나오는 無常(무상), 無我(무아)는 두 가지에 이미 몰입되어 있는,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역설적으로 말씀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인의 뇌는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보기 기대하는) 것을 보고, 우리의 기대와 모순되는 경우에 놀라거나 반대로 아예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실험적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대상이 거기에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거기에 없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1].
K는 평소에는 조용하고 예의 바르게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K는 술 좋아하고 야단치는 버릇이 있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가 맞벌이해서 누나와 둘이 집을 지키며 놀았다고 합니다. 거친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엄마는 가출했으며 고등학교 때는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에게 보복하려고 골목에서 기다리다 주먹으로 공격을 하고 집에서 숨어 지낸 일도 있고, 학교 졸업 후 직장인이 되고 나서 회식하면서 술 마시고 필름이 끊겨 다수에게 폭언하고 윗사람을 밀친 적도 있었습니다.
K는 내성적 성격이면서 "투쟁 아니면 도피(억제) fight or flight"하는 포유류의 뇌 피질 아래의 생존-방어 시스템이 어려서부터 발달된 상태라, 자극에 의해 "욱"하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성질이 있지만, 이것을 억제하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는 인간관계가 대화의 연속이라는 것을 아버지와의 경험에서 얻지를 못했습니다. 자신의 의사 표현에 대해 꾸짖거나 야단치는 식으로 나쁘게 되돌려 주는 아버지의 태도 때문에 의사소통하는 것이 두렵고, 사람과 말하는 것이 어떤 종류의 싸움이나 처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대화가 어려운 것입니다.
K는 직장의 동료에게 아버지와의 경험과 기억을 투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장난기 많은 동료를 있는 그대로 보거나 필요한 진지한 대화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세상을 현실과 다르게 인식하는 버릇은 유독 K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아주 특정한 기억이 자극이 되면 특히 부부 싸움 같은 언쟁에서 자주 관찰되지만, K와 같은 불안, 방어 반응이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이를 정신 분석에서는 전이 transference라고 합니다.
제럴드 에델만 (Jeerald Edelman)의 유명한 책 <기억된 현재 The Remembred Present (1989)>는 지각의 성질에 대해 매우 잘 짚어낸 책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뇌 기억(추억)에 부호화(저장)되어 있는 모델로부터 우리가 느끼는 현실을 자동적으로 재구성합니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가 추측하는 것보다 새로운 대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딪히는 평범한 자극에서 그 의미를 해독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뇌의 기능 입장에서 보면 사회의 보수파와 진보파가 구별이 안 되며, 모두 하던 방식에 능숙한 보수주의자들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새로운 경험이 필요한 어린 아기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어쩌면 성인의 뇌는 과거의 재료를 가져다 현재를 인식하는 데 사용하는 보수적이고 게으르며 에너지를 절약하는 짠돌이입니다.
K의 경우가 너무 과장된 사례가 아닙니다. 일반 성인은 우리의 기대 (이 전 경험의 산물)를 항상 세상에 투사합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단순한 의미에서) 우리 주변의 세계를 지각하기보다는 크게 과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일상의 경험 세계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현실 자체"를 두 가지 과정으로 제거한다고 합니다. 첫 째는 지각 장치는 현실 세계의 특징을 추출해서 대표(표상)를 만들려고 개입하고, 또 하나 우리의 기억이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선택된 특징을 조직하고 인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변형, 과장하는 과정입니다.
가장 잘 알려진 예는 우리의 눈에 있는 맹점입니다. 안구의 망막은 시신경이 자리 잡은 자리가 있어 이 부분은 시각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은 다른 기능을 사용해서 맹점에 시력을 채워 넣어 지각의 결함을 은폐합니다.
여러분, 저도 프로이트 선생님이 말하듯 여러분이 일생 생활에서 자신의 인생 경험을 지배하는 내면화된 모델을 인식하고, 현재를 과거와 다른 시각으로 보기를 바랍니다.
K는 정기적인 자기 분석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알게 되었고 적어도 인간관계의 문제가 상대방 탓만은 아니라는 전보다 공정한 시각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관계 회복을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많은 지각에서 정보를 추출하고 과거 경험에 꿰어 맞추는 하향식[3]인지 과정이 우리가 관심을 갖는 전이와 같은 인간관계 현상에도 적용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러한 메커니즘이 복잡한 마음의 현상을 일부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합리적 생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지혜를 마음의 뇌과학에서 얻고 있습니다.
[1] Luria, 1973, 74-75 쪽(마크솜스(2002). 뇌와 내부 세계 155 쪽에서 재 인용). 심리학 용어인 “확증 편향”
을 설명하기 좋은 이론입니다.
[2] 지각 perception; 시각, 청각, 피부 감각 등 감각 기관에 의해서 수용된 자극이 뇌에서 느끼는 과정
[3] 하향식 인지란 큰 뇌의 생각, 개념, 판단 등이 하부 뇌의 생존-방어 시스템, 정서에 영향을 미치고 통제하는 방식이고, 상향식이란 화났을 때처럼 하부 뇌의 영향이 전체 뇌를 지배하는 인지 과정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들이 마음의 행복을 멀리서 찾지 말라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거기에 더하여 행복하려면 마음이 편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선 불편한 마음이 있는지, 있다면 불편을 없애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첫 단계입니다.
결국은 행복을 찾는 분들은 현재가 불행, 불편해서 그런 마음이 든다고 볼 수 있어요.
마음의 불편, 불행의 특징은 잊어버리려고 해도 지우려고 해도 잘 없어지지 않고 있다가 좀 더 큰 불편, 불행이 다가오면 덩달아 같이 뛰는 성가시고 얄미운 존재입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소망(Instinctual Wishes)은 쾌락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는 쾌락-불쾌의 원칙 (pleasure-unpleasure principle)의 줄임 말입니다. 이 사상으로 그가 쾌락주의자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그는 무의식은 직접적이고 즉시 만족을 추구하려는 압력이 작용하고 있고, 본능적 소망은 모든 대가를 치르더라도 불쾌한 긴장을 감소시키고, 쾌락을 구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긴장의 감소로 인해서 마음의 상태는 평정(항상성; homeostasis)을 유지하고 불쾌를 줄이려는 무의식적 노력이 바로 쾌락의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포유류의 생존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프로이트는 우리에게
"너 자신을 알라" 고 강조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도 자신을 알지 못했기에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는 신탁을 따라 하게 됩니다. 코린토스에서 방황하던 외디푸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사원의 비문에 새겨진 훈계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아버지를 죽이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고 그의 가장 큰 욕망은 신탁이 일어나지 않게 방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프로이트, 의사이지 정신분석가이지만 그는 외디푸스 신화의 은유를 자신의 마음과 마음-뇌의 작용을 모르는 신경증 환자와 우리들에게 부단히 자신이 모르는 불편의 이유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도전하여 반복하는 실수를 고치라고 가르친 위대한 스승이기도 합니다.
에리히 프롬은 신프로이트 학파로서 한국에서 그의 저서가 많이 알려진 정신분석가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접한 그의 저서 정신분석과 종교 psychoanalysis and religion에서 '영혼의 의사' 로서 정신분석의 라는 주제를 접하였습니다. 의사가 아닌 철학가로 시작하여 정신분석을 공부한 그의 경력가 배경을 말해 주듯이 의학의 한 분야로 시작하여 역시 주된 관심사와 치료 대상이 '환자' 임에도, 프롬은 정신분석은 그 외연을 넓혀서 신경증적 증상의 치료에서 신경증적 성격에서 연유한 생활에 있어서의 어려움의 치료로 점 점 옮겨갔다고 하였습니다. 프롬은 정신분석 의의 역할이 적응에서 더 발전하여 성격의 교정을 통하여 개인의 잠재성과 개성의 실현을 충분히 발전시키는 것에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이때의 정신분석의는 <적응 상담자 adjustment counselor>가 아니라 플라톤의 표현을 빌어 <영혼의 의사 physician of the soul >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신분석의에게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은 전통적인 의미로 보았을 때는 전혀 아픈 사람이 아니었다. 외적 증후나 정신이상을 일으킨 것도 아니었다. 때때로 그들의 친척이나 친구들도 전현 그들이 병들었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본인들은 정신분석의를 찾아가 도움을 구하게 하는 <생활에 있어서의 어려움 > - 설리반 Harry Stack Sullivan의 정신 분석학적 문제의 정의를 사용하여-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정신분석과 종교 1951).
" 받아들이고 도움을 구하라"
프로이트나 프롬처럼 훈련된 전문가들은 스스로 자신을 문제를 탐색해서 도와주는 방법을 알고 수정할 능력이 있지만, 일반인들은 스스로 알고 고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의 불편의 이유를 모르면 도움을 청하고 그것이 마음과 정신의 문제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치료를 위한 전 단계의 할 일입니다.
구체적 원인은 모르지만 마음과 정신의 문제라는 정도는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도움을 청하면 여러분이 찾아간 정신건강과 의원의 주치의는 기꺼의 "영혼의 의사"가 되어 줄 것입니다.
생각보다 1900초 중반까지의 클래식 영화들은 참 재미있습니다. 저의 느린 취향에도 맞고 더구나 저작권이 풀려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심리/정신적 외상이 사건에 대해 건망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생각은 19 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정신 치료의 고정관념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억 장애를 소재로 한 마음의 행로 Random Harvest (1942)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여자 주인공인 Vintage Greer Garson, 당시 최고 미녀의 부드러운 미소가 아직도 저의 가슴을 두 군 거리게 하네요. Spellbound (1945)에서는 잉그리트 버그만이 매력적인 정신건강 의사로 그레고리 펙과 출연합니다. 그레고리 펙은 기억상실을 겪는 이중인격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 The Snake Pit (1948)에서 귀여운 미녀 Olivia de Havilland가 조현병 환자로 등장합니다. 이와 같은 정신질환과 트라우마를 소재로 흥행을 기록한 영화를 통해 정신분석은 20 세기 중엽, 미국의 대중문화와 상당히 친해졌습니다.
과거 기억 장애의 심리적인 요인에만 의존한 것에 비해 요즘 생물학적 요인, 정신 의학의 질병의 원인 이론에 발전에 의해서 많은 적인 변화가 있습니다만, 외상 후 기억 장애, 해리 장애는 "새로운 히스테리" 로서 여전히 심리치료에 적합하다는 대중의 상식에 의해, 영화의 홍보 전문가들은 이 아름다운 대응 쌍을 비전문가, 일반인들 모두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의학과 정신분석의 이미지 그리고 멋진 배우들의 사랑이야기를 결합해서 흥행에 성공하였습니다.
한 때 대중적인 인기를 가졌고 문화를 지배한 정신분석은 제 생각에는 아마도 감정(감성)보다 이성(논리, 과학)을 중요시한 서구의 사상의 경향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 "너 자신을 알라"는 정신분석의 메시지가 그분들에게 더 파고들었을지도 모릅니다. 한국인들은 너무 감정에 휩쓸리는 경향이 있어 특정 정치 집단의 선동에 이용되는 현 한국의 광장 문화, 다양성이 없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시대 상황에서 너무 부럽기도 합니다.
과거 기억 장애의 심리적인 요인에만 의존한 것에 비해 요즘 생물학적 요인, 정신 의학의 질병의 원인 이론에 발전에 의해서 많은 적인 변화가 있음에도 외상 후 기억 장애, 해리 장애는 "새로운 히스테리" 로서 현대에도 심리치료에 적합하다는 대중의 상식에 의해, 영화의 홍보 전문가들은 이 아름다운 대응 쌍이 비전문가. 일반인들 모두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뇌 과학적 이미지, 정신분석 그리고 멋진 배우들의 사랑이야기를 결합해서 흥행에 성공하였습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답답하고 불안해요, 그러나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해리성 기억장애 (dissociation ) 환자 J의 말입니다.
<J는 출산 후 얼마 안 된 두 아이의 엄마이다. 남편의 여자로 인한 잦은 배신과, 집안일에 무관심으로 고통을 겪다가 급기야 참다못한 어머니가 이혼을 시킨다며, 남편과 따지며, 충돌하였고, J는 동시에 평소의 허리 디스크가 악화되어 어머니 있는 이 도시로 와서 수술 후 입원 치료 중인 상태였다. 남편은 입원기간 동안 문병도 안 오고, 화를 내고, 이혼하자고 하여 J는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 이후의 10여 년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어머니를 알아보나, 자신이 결혼해서 애를 낳고 살고 있는 것은 전혀 모른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사는 필자의 도시에 와서, 더구나 환자 복을 입고 있는 자신을 도대체 영문을 모른다고, 내가 왜 여기 와 있냐고 한다. 다만, 그녀의 마음과 감정은 기억과는 달리 완전 해리 혹은 억압되지 않은 이유인지 답답하고 불안하다고 하였다. >
저는 이 환자를, 특별한 어려움 없이 5일 만에 기억력을 완전히 회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 실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신체가 건강할 경우 경과가 짧은 분들을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고 감정 반응이 없다가 2,3일 지나면서 우울과 반복적인 히스테리가 관찰되었습니다. 그리고는 3일째 되면서 격한 감정과 분노를 표출하고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며 지난 일들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남편이 자신을 찾아와서 사과하고 이혼을 취소하는 소원이 이차적 이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고 남편과 이혼시킨다며 난리 친 어머니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환장애, 히스테리, 해리성 환자들의 신경증상 등은 당장의 고통을 환자 역할, 해리 증상으로 위험에서부터 보호하는 일차적 이득 외에 이차적 이득은 늘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기억이 돌아온 뒤, 환자의 어머니는 큰 병원에 정밀 검사를 받겠다고 하여 진료의뢰서를 요구하여, 진단 결과를 잘 적어 주었지만, 딸의 정신적 충격으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도 찾아오지 않는 사위와 어떻게 잘 사태를 마무리할지, 아직도 저의 마음속에 궁금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정신분석
저는 그동안 인간이 정신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의식과 주의력을 사용해서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최근 뇌과학의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자기 보호 기능은 의도된 것이거나 내부에 설계된 안정장치가 아니라, 뇌 기능의 특수한 기능들이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 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진화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보통 정신분석에서 흔히 말하는 억압/억제, 해리의 기전이 이것입니다. 해리는 억압과 쌍벽을 이루지만, 좀 더 심화돼서 자신의 누구인지, 그 주체성을 잃어버리는 증상까지 있습니다. 프로이트 박사는 억압이 불 완전하면 몸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데, 꿈, 정서적 불안, 신체 증상 등의 나타나는 현상을 <억압의 회귀>라고 했습니다.
심리학 분야에서 선택적 부주의(주의 -분산)는 자기- 통제의 기법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연구되어 있습니다. 자기-통제 방법으로서의 주의 분산은 고통스럽거나 불쾌한 과제에 직면하였을 때, 그 과제에 부주의함 뿐만 아니라, 별개의 긍정적인 생각이나 심상들에 주의를 집중하는 방법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David A Lieberman, 학습 심리학 1996 ). 이것들은 이후의 심리학적 실험에서 입증된 바 있습니다( Kanfer와 Sneidner 1973, Mischel & Mischel, 1977). 그러나 임상에서 보면 환자들의 선택적 부주의의 다음의 집중의 대상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최근의 사건이나 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찾는 것으로 보입니다.
뇌과학적 설명
외상성 스트레스는 때로는 피해자가 "심인성"또는 "기능적"기억 상실을 초래하는 억압 및 해리와 같은 정신적 방어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해리"의 가장 유력한 이유는 심리적 스트레스에 의해 만들어진 콜티솔, 노르 에프네프린 같은 신경 작용물질이 과도하게 활성화되어 기억과 인식의 기능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방어-생존 시스템이 위의 신경물질로 인해 활성화되어 신체 증상- 불안, 빈맥, 불면, 어지러움, 두통, 근육통 등-이 발생합니다.
이 기억 상실증은 외상에 대한 외현적 기억( 알아챌 수 있는 기억)에 악영향을 미쳐 기억할 수 없게 만들지만 암묵적 기억(알아챌 수 없는 기억, 뇌 피질 밑의 방어-생존 시스템)에 남아있으므로 몸의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의 의식은 이유를 모르는데 몸의 증상 만이 불편한 경우 이런 현상을 "몸 기억 body memories " 이 작용한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몸 기억"과 같이, 자신도 이유를 모르는 신체 증상이 있다면 이는 필시 언젠가 외상성 사건이 발생했으며, 외상성 사건의 기억이 저장된 것이며, 지금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 이유는 현재의 스트레스가 자극할 가능성이 많고 또한 언젠가 기억에서 사용 가능하다는 신호입니다. 일상적으로 의식에서 거부당한 이 외상적 기억은 증상을 안정시키는 약물 치료가 가장 효과적이며 자발적으로 또는 유도된 이미지 연상, 정신치료, 최면 같은 기법을 통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설리반의 선택적 부주의
선택적 부주의, 억압, 억제, 그리고 해리는 이러한 자기 보호 기능의 연장선상에 있는 기능들이며, 특히 해리는 설리반에 의하면, 통합하려는 성향 integrated tendency을 갖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설명이 좀 부족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누구나 성장하면서 우리 문화에서 인정할 수 없는 충동들을 가질 수 있는데, 특히 서구 사회는 충동적인 성질은 용인하지 않고, 적응하려는 노력만 인정한다고 합니다. 설리반은 프로이트가 한때 무의식은 거의 원초적이고 유아적이며 미개한 것이라는 단순 오류를 범했기 때문에 영향을 준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어쨌든 보수적인 사회는 정말 조금이라도 충동적인 것들은 사회화된 인간을 만들기 위해 초기 교육에서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아마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거대한 절벽의 암석 틈 사이에서 자라는 나무들처럼, 성장하면서 심한 변형이 있을지라고 생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요한 통합 성향을 가진 인간에게 충동도 필수적이지만, 발달 단계에서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사회화 과정에서 거의 자리를 차지하거나 의식되지 않고, 자기 시스템에서도 없는 것처럼 해리되어, 별도의 조직 과정을 거치나 자신은 그것에 주의를 두지 않은 채 지내다가, 아무도 이 과정을 완벽하게 서술하지 못했지만, 인간은 결국, 어떤 시기에 충동의 존재를 인식하고 자신의 일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종합해 보면 프로이트 박사의 <억압의 회귀; 증상이 나타는 것; 몸의 기억으로 설명> 개념이나, 뇌 과학 입장에서 방어-생존 시스템이 활성화된 것, 그리고 설리반의 통합 경향성의 개념은 모두 "해리" 된 부분이 우리가 잘 인식할 수 없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 증상이므로 안정되고 치료가 되거나, 자신의 일부로 인식, 인정하기를 노력하면 통합된 뇌의 기능(상부-하부)을 회복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입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가끔 "당신은 걱정을 안 하는 것 같아요, 당신이 감정이 적은 것인지 아니면 남자들은 다 그런지 궁금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멀리서 취직해서 일하는 아들이 발목을 다쳤다고 엄마에게 연락이 왔는데 그 말을 들은 아내는 당장 가보지도 못하고 상당히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근 병원에서 깁스를 했다는 말을 들으며 대강 사건을 감 잡은 저는 깁스를 했으니 기다리는 것 밖에 도와줄 방법이 없다 생각하고 아내보다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고, 표정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았으니 그런 말을 하는 아내를 이해할 만합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제가 아들의 부상에 대해 나름 해석을 하고 판단을 했지만, 사실 마음에서 오는 고통이 엄마인 아내의 것보다는 훨씬 적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건을 해석하고 판단해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기능과는 사실 별개의 문제입니다. 제 개인적인 공감 능력은 논외로 하고 (사실 비즈니스를 하는 진료실에서는 많이 향상되겠습니다만 ) 남성들의 공감 능력은 상대적으로 여성에 비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감정은 사람은 물론 동물의 생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래서 진화해 온 소중한 자산입니다. 몇 가지 중요한 부분을 열거한다면, 포식자나 부주의로 일어나는 사건을 예측하고 피할 수 있게 해주는 방어-생존 학습을 만들어 준다는 점입니다. 어려서 강아지에 물리거나 뜨거운 물건에 데어 놀라면 다시는 그 대상에 가까이 가지 않는 혐오 학습이 만들어집니다. 기타 TV, 컴퓨터, 운전 배우기 등 문명화된 도구를 사용하는 도구적 학습에도 이 감정이 필수 조건이 됩니다. 사람과 같이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동물들은 이 감정과 공감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 능력이 없으면 흔히 말하는 "눈치 없는 사람" 이 되고 혹은 " 자기만 아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 업무 능력이 좋아도 인정받거나 승진하기 어렵고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공감 empathy 이란 타인의 감정을 읽고 느끼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려면 자신의 감정도 잘 거울에 비추듯 잘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공감은 모방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인간의 문명과 언어의 발달은 이 공감의 진화와 더불어 진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언제 기회가 되면 설명하겠지만, 말 그대로 거울 뉴런 mirror neuron system은 뇌 안에 있는 인간과 포유류(유인원)의 공감 능력을 담당하는 뇌의 신경 시스템입니다.
공감 능력이 부족하거나 감정 표현의 어려움이 있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어떤 통계에서는 감정표현 불능증 Alexithymia이라는 자기의 감정을 인식하거나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보이는 상태가 인구의 10% 난 된다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젊은 여러분들은 얼마나 공감 능력을 가진 분과 결혼하거나 짝으로 만나는가 그리고 친구가 되는가가 앞으로의 여러분의 인생의 행복을 결정짓는 중요 문제가 될 겁니다.
결혼, 가정 문제로 제 외래에 방문하는 여성 중에 공감 능력이 결여된 남편들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이 상당히 수가 많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배려 없고 무례한 행동, 술 중독, 오락, 게임, 심지어 도박 중독에도 이런 분들이 가진 성향을 조사하면 상당수가 해당될 것입니다.
우울증이 걸리면 너무 자신의 깊은 감정의 변화에 시달려 타인의 감정을 알거나, 배려할 여유가 없습니다. 이런 질환에 의한 성향은 제외하기로 합니다.
어떤 남성 혹은 여성이 공감 능력이 좋은지 알려달라고요?
얼마든지요. 미혼이라면 여러분의 인생이 걸린 문제입니다. 제 글을 잘 읽어 보시고 따라오세요. 궁금하면 질문하시고요. 보면 안다고요? 그렇지요. 단, 너무 감정을 허비하는 사람이나 바람둥이를 만나게 될까도 걱정됩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일정 거리를 두고 사귀어 보세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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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이 의도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루 일과에서 글의 소재와 아이디어를 얻지만 또 하루 일과의 잔상과 영향 때문에 글이 만들어지지 않네요. 분노를 순화하고 좀 더 수용적인 입장에서 찬찬히 저와 주변을 바라볼 때 좋은 글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저는 아직 소식이 없는 젊은 학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금 더 도움이 될 까하는 마음에서, 물론 이런 문제로 저를 찾아온 사람들을 도와준 경험은 적습니다. 젊고 지능이 높으며, 아직은 순수하고 미래가 있기에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이 학생은 저에게 자신은 감정이 없는 것 같다며 좀 조사해 달라고 찾아왔습니다. 이 친구는 사람들과 사귀거나 집단생활이 불편해서 학업을 중단하고 군 입대를 기다리는 청년입니다. 책 읽기를 좋아해서 지식의 양은 많아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기 시작해서 주인에게 발각되었습니다. 경찰 조사도 받고 부모가 찾아가서 사죄를 하고 선처를 구하니 주인이 다시 생각하고 물건 값만 배상을 하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자신이 한 행동이 부끄럽거나 잘못했다는 죄책감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게 감정을 못 느낀다는 것을 전부터 알았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언제나 원하면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어떤 종류의 것인지 나름 분별이 가능하신가요? 선 듯 자신 있게 대답하기 곤란하실 것입니다. 감정은 느끼지만 어떤 종류의 것인지, 분류까지?
우뇌 감정형인 여성 분들은 확실히 남성보다 감정의 수용과 표현 그리고 언어 능력이 발달된 것 같습니다. 좌뇌 사고형의 글 잘 쓰는 남자들도 말을 하라고 하면, 혹은 감정 표현도 서툴러서 당황하기도 합니다.
훈련이 안 돼서 그럴까요?
정서의 문제가 있거나 주의력의 문제가 있으면 자신은 물론 타인의 감정을 읽고 알아차리거나 배려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감정이 메마르거나 없다고 착각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자신과 타인의 감정, 눈치를 모르거나 부족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정서의 문제가 있는 경우 일정기간 그렇지만, 이 분들은 일생동안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 문제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조선의 학자들이 중국 문화권에서는 수입한 사칠론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유학의 수양론(修養論)에서의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이를 둘러싼 논쟁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혹은 줄여서 ‘사칠론(四七論)’이라고 부릅니다. 중국의 주자는 이런 말로서 감정의 정의를 시작했습니다. "사단은 이의 발동이요, 칠정은 기의 발동이다."(四端理之發, 七精氣之發).
조선에서 주자학을 중심으로 퇴계 이황 선생과 율곡 이이 선생은 각 각, 이(理)(원리, 본성)와 기(氣)(물질, 에너지, 행동)를 중요시하는 학파로,,, ( 물론 대응하는 다른 개념들도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조선 학파의 오랜 논쟁을 말하려 꺼낸 것이 아닙니다. 서로 주장하는 것을 가지고 정쟁으로 비화하여 큰 싸움이 나기도 하였지만 가만히 보면 당시의 학자들이 인간의 감정에 대해 세심한 연구와 분류를 했던 것이 놀랍다는 말을 하려고 합니다.
4단은 모르는 한자는 대강 넘기고 그 뜻을 읽어보면 칠정 보다 좀 더 품격이 있고 차원이 한 단계 높은 감정의 느낌입니다.
4단(四端) : 사단이란 네 가지 단서(端緖), 즉 네 가지 인간의 본성(本性)에서 우러나오는 마음情을 말하고,➀측은지심(惻隱之心) :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 ➁수오지심(羞惡之心) : 나쁜 것을 멀리 하려는 마음, ➂사양지심(辭讓之心) : 남을 배려하여 양보하는 마음, ➃시비지심(是非之心) :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마음. 사단은 각각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의 사덕으로 발전한다.
칠정은 우리가 늘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자주 접하는 감정들이기에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제가 영어로 설명을 달은 것은 좀 더 분명히 느낌을 구분하려고 한 것이지만, 또한 미국의 유명한 정서 과학자 야크 판크세프 박사가 추출한 7가지 기본 감정이기도 합니다.
칠정(七情) : 인간의 기본적 일곱 가지 감정은 희, 노, 애, 락, 애, 오, 욕 =
1) 희(喜) : 기쁨, Care 돌보기, 제가 임의로 판크세프의 돌보기 감정을 여기에 배당했습니다.
2) 노(怒): 분노, 화 Rage ;
3) 애 (哀): 슬픔 panic (separation, loss, grief) ; 슬픔은 근원은 양육자-엄마 와의 분리에서 시작합니다.
가장 큰 슬픔은 양육자를 잃는 것이며 공황 상태에 이를 수 도 있습니다.
4) 락 (樂): 즐거움; Play (happy); 동물과 사람은 놀이가 즐거움의 원천이 됩니다.
5) 애(愛): 좋아함, 사랑 Rust,
6) 오(惡) : 싫어함, 두려움(혐오) fear(anxiety),
7) 욕(欲): 찾기(탐색) seeking, 욕망 desire, 의욕(동기 motivation), 기대 expectancy
판크세프 박사는 최근 동물과 사람의 기본 감정을 연구하면서 동물의 뇌의 신경세포에 근거를 두고 기능하는 감정의 핵들을 전기 자극으로 찾아내어 이름 붙인 7가지 감정이 있습니다. 판크세프의 care는 돌보기라는 감정인데, 모성을 말합니다. 칠정 중에서는 상대가 잘되는 것을 좋아하는 감정이 희(喜)라는 의미에서 제가 이 감정에 매칭을 했습니다. 학문은 동서와 고금을 관통하는 일관된 줄기를 찾아낼 때 참 재미가 있습니다. 서양의 많은 철학자, 심리학자, 정서 뇌과학자들도 칠정과 비슷한 감정을 열거한 바 있습니다. 한 편 생각하면, 이 분들도 자신의 아이들을 키우며 관찰했을 터인데 가장 흔하고 인류 공통의 감정들을 찾아냈을 것은 당연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참에 저 감정들을 상식으로 배우시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감정은 느낌과 반응에 따른 의미가 있으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감정이 뇌 안에 본거지가 있다면 그 말은 사람은 감정을 타고난다는 의미입니다. 출생 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감정은 출생 후 여러 환경의 변화와 경험에 자극받아 특정한 감정이 발전하거나 반대로 잠재해서 그 사람의 특성, 성격의 일부가 됩니다. 또한 감정들은 학습을 촉진하는 매개로 사용되며 가장 중요한 진화적 기능입니다만, 일상에서는 우리의 꿈을 만들기도 하고 장기 기억을 촉진하며, 판단의 근거가 되는 가치를 부여합니다. 감정은 생각, 관념과 합쳐져서 4단(四端)과 같은 품격 있는 고차 감정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감정이 없다? 상대방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럴 수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 계속)
60세 초반의 L 여사가 찾아왔습니다. **의료원에 들렸는데 정신건강의학과 가라고 해서 왔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저의 병원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있다고 합니다.
<감기가 와서 그런가 했는데 **내과 감기약 먹고 끊었는데도 일 주간 잠 못 잤어요. 힘들어요. **의료원
에도 갔는데 이유를 모르겠어요. 내과, 신경외과 가면 정신건강과 를 가라고 해요. 정말 잠을 자면 좋겠어요.
어떤 정신과 의사는 제가 말하는 것을 잘 안 들어줍니다. 말을 듣고는 "다음에 오세요, 집에 가서 게셔보세요" " 기다려 보라고 해요. 그래서 한의원도 가보고 한약은 왜 그렇게 비싼지 모르겠어요.>
L 여사는 명랑하게 웃으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쏟아냅니다. 요즘 60대는 인터넷을 잘합니다. 이 분들은 할 일이 적고 쉬는 시간이 많아서 저보다 더 인터넷을 잘 아는 분도 있고 게임을 취미로 하기도 합니다.
<내가 성격이 활달해요. 그런데 밥맛 없고 어지럽고 조그만 것만, 잠시만 생각하면 잠이 안 와요. 다른 것은 없어요. 사람도, 가정도 돈 문제도 없고, 왜 그런지 몰라요. 그 뒤로 그래도 잠이 하나도 않옵니다. 돈이 필요해 다니는 것도 아니고 혼자 있기 뭐해서 알바만 3시간 일해요. 그것도 안 하면 안 돼요, 답답해요.
남편이 밥을 해달라는 것이 제일 짜증 나요.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사실은 출근시켜야 하는데,,,>
제가 경청해서 잘 들어주자 그녀는 더 신이 나서 말을 더 합니다. 중요한 스트레스, 인간관계의 갈등, 어려운 사정은 숨기고 계속 방어를 합니다.
정신건강에 대한 진료는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타과 의사보다 정신적 에너지, 카텍시스가 많이 소모되죠.
환자 혹은 의뢰인들이 내적인 문제를 보려 하지 않고 또 모르거나, 알아도 방어를 계속합니다.
저 강한 방어를 뚫으려면 저도 지치니 감정이 불편합니다. 이것저것 ( 나름 체계를 가지고) 질문으로 마음의 변방과 중심을 가볍게 때려봅니다.
L 여사는 제가 한 참 기다리니,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꿈도 안 좋고 이상해요. 남편하고 사는데 딸, 아들 독립해서 잘 사는데,,
남편은 나랑 안 맞는 것도 없는데, 왠지 짜증 나요. 이상하게 잘해주는데 짜증이 나네요. >
L 여사의 표정에서 명랑하고 웃던 기운이 사라집니다.
<지금은 술도 그렇게 많이 안 먹어요. 4-5년 전에는 술을 많이 먹었어요. 밤에 서너 병식 먹고 들어온다.
그때 나는 괜찮았으나, 나는 성격이 활달해서 사람들과는 잘 지내는데요, 왠지 집에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안 좋아요.>
남편 술 문제로 오래 고생하셨나요?
<상대방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지금은 내게 잘해도 왠지 이상해요. 잘하고 있으니 내가 이해를 잘하나 잘 모르겠어요.>
이 이후부터는 이야기가 잘 풀렸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제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진료를 하면서 터득한 부분도 많고 그 사람 심성의 일정한 패턴을 잘 읽지만 어쨌든 사람의 마음이란 오묘하고 애매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때가 많다고 느낍니다. L 여사는 제게 오기 전에 여러 병, 의원을 거치고 많은 비용을 주고 과학적 임상실험이 안 된 약을 먹기도 했습니다. 일반 의사들의 일반적인 반응은 정신건강과 에 가보라는 말이었습니다. 본인도 어느 정도 알 터인데요. 우리 환자들의 특징은 서운하게도 자신을 잘 도와주고 고쳐 줄 담당과 의사를 바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상하지요?
참 요즘 같은 빠꿈이 환자 혹은 의뢰인 분들이 인터넷에서 미주알고주알 찾고 알아서 병원을 찾는, 날 선 시대에 참 신기하기만 합니다.
어떤 환자들은, 물론 그 사람의 배움과 교양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조건 잠만 재워 달라는 사람들이 의외로 있습니다. 그들이 상점에 간다면 아마도 물건의 비용, 재질, 내구성 등등 요모조모 따져가며 구입할 것이고 마음에 안 들면 환불을 요구할 것입니다. 수박을 사러 갔다면 가운데 구멍을 뚫어 속을 보고 살 것입니다.
그러니 건강의학과를 찾는 환자들은 참 이상하지요? 잠, 수면의 문제는 정신건강의 신호나 표현일 뿐, 본질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더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속이 어떻게 상하고 문드러졌는지 자신이 설명을 하거나 제가 질문하거나 검사를 하자고 하면 "아, 됐어요 일단 약을 먹어 보고요."라고 손사래를 치거나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본다고, 그 저 잠을 못 잘 뿐이라고 화를 내는 환자도 있습니다.
젊어서는 제가 잘 듣고 기다리곤 했는데 이제는 저도 나이 먹어 지칩니다. 요즘은 저도 본인들이 원하는 겉만 다루고 보냅니다. 그러면 이분은 얼마 정도 기간이 지나서 약이 잘 듣지 않는다고 또 불평하실 겁니다. 본인 요구대로 안 되면 또 병원을 바꾸고 약물을 남용하게 됩니다. 환자 본인이 증상의 이유나 본질을 알던 모르던 상관없이 의사의 최적의, 최소의 진료를 위해, 조금 더 자신의 경력을 설명해주고, 일단 믿고 필요한 검사에 협조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설명을 잘해주지 않는다고, 불친절하다고 항의한 환자들의 모습이 떠올라 계면쩍네요.
환자 분들과 씨름하던 프로이트 선생님은 그들의 협조를 구하고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은 마음의 고통을 억압하고 있어요"
" 억압을 풀고 감정을 표현해야 빨리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선생님은 환자들이 불편한 마음을 자기도 모르게 <억압>을 하고 있다고 하시면서, 객관적 관찰의 의미로 <저항>이라는 어려운 용어까지 써 가며 환자들을 이해하려고 했을까요?
확실히 존경하는 이 학자는 저 같은 평범한 의사와 달리 진료의 문제를 의문으로 바꾸어 그것을 연구하는 것으로 생의 낙으로 삼았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문제는 자신이 알기도 어렵지만, 알아도 쉽게 솔직하게 드러내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그 문제가 그렇게 남에게 할 정도로 비중 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래서 판단하라고 전문가가 필요한 것이지요.
자주 느끼지만 프로이트 박사의 <억압>은 참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억압>이라는 말은 환자들의 불편과 불안, 저항을 뚫고 마음속을 부드러우면서도 진지하게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가 알고 있던 모르고 있던, 모른 체하든 간에 그의 마음속의 한恨 을 녹여주고, 이를 섣불리 건드리는 의사에 대해 원망怨望을 투사하지 않고 같은 편이 되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Chinese women are more mother than wife"
"중국 여자들은 아내라기보다는 엄마이다"
중국 여인들의 강한 모성애와 가정에 대한 헌신을 보고, 소설가 펄벅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그녀의 소설 '북경에서 온 편지' a letter from Peking에 한 줄의 문장으로 소개됩니다. 저 역시 대학시절 이 소설을 읽고 나서 계속 기억에 남는 문구입니다. 동 서양의 문화 차이, 그리고 저의 직업적 경험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감정 때문인지, 깊은 여운이 여전히 남습니다.
아내가 오늘 출근할 때 이것저것 챙겨 줍니다. 핸드폰, 열쇠, 오늘 황사 심하니 마스크 있어요? 저는 어머니의 잔소리처럼 들려서 말을 하지 않으니 아내가 화를 냅니다. 왜 말을 안 해? 그래도 말을 않자 화를 내고 목소리가 커집니다. "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해 ",,, "그럼 알아서 한다고 말을 하지??"..
말을 안 하는 것은 무언의 반항, 어려서 밥을 않먹거나, 말을 하지 않거나, 문 닫고 방에 들어가 꼼짝 않는 저항입니다. 늘 챙겨주어서 고맙다가도 아내의 말이 갑자기 잔소리 같다는 느낌이 들면 저도 모르게 마음,, 아니 몸이 반항[1]을 합니다. 제법 인생을 살아온 나이에도 어려서 엄마에게 혼나던 감정이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아내의 잔소리가 엄마의 목소리로 들렸던 겁니다.
부부관계란 살아갈수록 서로 간 관계의 변화가 제법 역동적인 구석이 있습니다. 젊어서는 제가 아내를 "무조건 따라와" 하는 식으로 강한 리더십을 보였다면, 아이들이 생기고, 어렵게 아이들을 키우는 젊은 아내의 '엄마 다움'이 사랑스럽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한, 아내의 여성스러움과 다른 든든한 품성(모성)에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다 커서 도와줄 일이 점 점 줄어가지만, 여전히 저의 식사와 잔 일을 신경 써주는 아내가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의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잘 토라지기도 하는 제가 다시 청소년 아이돌로 돌아간(어려진)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부부가 건강하고 서로 의지할 수 있으면 그것도 큰 행복입니다.
자식, 배신감
60 중반인 K 여사는 요즘 우울하고 잠이 안 온다고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남편과는 40대 초반에 이혼하고, 재혼 않고 아이들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길러왔고, 애들은 좋은 배우자를 구해서 좋은 직장에 다닌다고 합니다. 남편은 결혼 생활을 하면서, 여자 문제, 성격이 포악해서 많이 괴롭히고 때리고 욕하는, 사람 같지 않은 사내여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참고 또 참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책을 좋아해서 철학책을 많이 읽고 문학 시를 좋아하고, 그래서 혼자되었어도 마음을 잘 다스리고 살았다고 하는데 이 번에는 마음이 소침하고 외롭고 분하고 불편한 감정을 너무 못 잡는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날 바보라고 생각하겠죠?
내 친구는 내 사정을 모르고 복에 겨워 저 지랄한다고 합니다.
왜 뒤진다고 하냐? 자식들 다 잘돼서 너무 행복해 보이는데 그 깟 남편이 없다고 기죽을 것이면
벌써 진작 시집가지 다 늙어서 망령이라고 합니다.
제 나이 환갑을 지나 이제는 여자로서는 여자가 아니지요. 세상이 세상이 좋아서 그렇지 지금은 여자가 여자로 행세할 나이는 지났어요. 나름대로 정신적인 품위 유지하고, 문화적인 자만심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었는데 돈 앞에서는 무력하네요. 애들 키우고 급한 것을 해결하고 이제는 돈을 벌어야 살아요.
남은 돈 얼마를 곶감을 빼먹듯 먹고는 불안해서 살지 못해요.
그래서 이제 4명의 아이들에게 한 명 앞에 10만 원만 달라고 하였어요,
작년에 우리 큰에게 말을 하였어요. 애야, 내가 뒷방 늙은이 되면 무슨 돈이 필요하니? 그저 잠 옷 하나면 되지. 그래, 엄마가 다리 성할 때 좀 다니고 싶다고 말을 했어요, 그래도 반응들이 없어요.
아이들 4명이면 40만 원 하고 내가 주식도 좀 하고 해서 그럭저럭 아껴서 살면 되는데 작년에 처음으로 공공근로 갔어요. 내가 어떻게 자식들에게 계속 말을 해서, 돈 달라고 하나요?
아이들은 연봉이 억대이고 호봉도 높은데, 젊어서 부터 진급도 빠르고, 내가 애들에게 몇 십만 원을 받지 않아도, 10만 원 만 받아도 초라하지 않을 것 같아요.
이번에 딸 해산해서 도와주었더니, 갈 때 20만 원 만 줍디다.
게네 집에 월급 명세서를 우연히 보니 꽤나 많이 받았더군요. 공무원이라 택배 선물도 많던데.
그런데, 엄마에게 20만 원 만 주는데, 마치 뒤통수 맞은 기분이더라고요.
그것도 풀타임으로 했는데, 사람 쓰면 인건비도 안 되겠던데.
” 그래, 고,, 마워" 하고 말았지요. 이게 자식인가?
"내가 공부시켜, 결혼시켜, 직장 승진했다고, 차 사주고 다 했는데 이게 뭐야?"
그러고 나서 에미에게 전화 한 통이 없어요. 내가 집에 와서 울었어요. 남편과 이혼하고 위자료 받은 것하고, 남편은 아이들 학비도 잘 안 보내 주어, 할 만큼 다했건만, 에미가 아니라 어디 식모를 써도 그러지 못할 듯한데, 다만 난 에미 도리는 다했다, 저들 잘 살면 되겠지,, 하고 잊으려고 했지요.
전 남편은 폭력적인 사람이었어요.
제가 암에 걸려서 애들도 어린데 내가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는데, 병원에도 안 보내 주고 욕을 한 사람입니다. "저년은 밤낮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하였고 경기가 좋아 돈을 잘 벌었지만, 나는 돈 구경도 못하고 시키는 일만 했고, 내가 보는 앞에서도 여자를 껴안고, 집에도 데리고 오고 사사건건 트집, 욕설, 폭행을 하고, 밥상 뒤 없고 내 옷을 찢고 때리고 인간 대접을 못 받았네요.
내가 더 이상 못 살겠다고 하니, 시어머니가 "네가 참고 살면 5 남내를 곱게 키우잖니?"
그 말을 듣고 미련하게 참고 살다가,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려고 집을 팔고 나가라고 해서 소송해서 위자료를 받고 결국 헤어졌지만 아직도 간간이 협박 전화가 옵니다. >
요즘 뉴스에서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간간이 자살했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노인들의 자살은 그렇게 사회의 시선을 끌지 못하지만, 저와 같은 정신의학과 전문의들은 그분들 자살률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혹은 더 많을 수도 있다고 짐작합니다.
대개 자식 문제,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혹은 배우자가 사망해서 따라가셨다고 합니다.
저도 그랬지만, 자식들을 너무 공부,, 공부,, 하면서 비싼 과외시켜주고, 학원 보내고 또 그것까지 모자라 조금 여유 있으면 유학까지 보내서, 가정이 나뉘고 기러기 부부가 되는 사회 풍조가 이제는 달려졌으면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의 인성은 자신이 배운 것만큼 따라가지 못하고, 부모와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이해심과 좋은 감정이, 남과 경쟁하느라 성장할 틈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많은 교육비로 재산을 투자하고 나후 그 부모들의 노후에 재산이 없으면 K 여사와 같이, 배신감에 괴로운 노후를 보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자식들에게는 적당히, 약간 모자랄 정도로 해주어야 자극을 받아, 스스로 노력하고 또 부모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살 것 같습니다.
[1] 몸의 반응은 비서술적(무의식) 반응으로 뇌 겉질 밑의 생존-방어 시스템의 반응입니다. 출생 기부 터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자기도 모르게 학습하고, 비슷한 자극에 반응합니다. 사건, 삽화 기억은 수도 없이 많지만, 몸 반응 기관은 비교적 단순하고 신속한 시스템으로 운영됩니다.
정호승 시인
나도 그렇지만 너도 돌파구가 있다고 생각하니
어딘가에 마치 여우굴처럼 아니면 성당의 출입문처럼
돌파구가 두 팔을 벌리고 웃으면서 널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도 그렇지만 너도 지금 당장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빌딩의 유리창을 열고 나라도 뛰어내릴 거라고 생각하니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을 잃은 채
낙산사에 가서 동해의 수평선을 바라본다고 해서
명동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한다고 해서
돌파구가 꽃처럼 피어날 수 있을 것 같니
,,,
지하철의 스크린 도어처럼 마음을 열어놓고 기다리면
스스로 열리는 문이라고
나도 그렇지만 너는 왜 생각하지 못하니
3-4년 전 찾아온 K의 하소연을 듣고 저는 한동안 저의 카텍시스(cathexis; 정신적 주의, 집중의 뜻)가 그의 이야기에 빼앗겨 있었습니다. 전에는 남편의 뻔뻔함, 잦은 폭력 또는 외도의 문제로 주부들이 찾아와 하소연하고 우울감, 분노를 호소하면 그의 말을 듣고 공감하며 필요하면 처방도 하면서 안정을 시켜왔는데 이제는 반대로 남편들의 호소도 늘고 있습니다. 아내의 외도 문제이지요.
그렇지만 자세히 듣고 있으면, 아내의 외도가 그저 무료함을 달래거나 성적 욕망에서 혹은 새 인생을 살고자 저지른 외도가 아니라 남편들의 잘못된 결혼생활, 아내에 대한 성실하지 못한 태도 때문인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아제 아내들도 참지 않고 맞바람을 피우는 것이지요.
아내가 바람피운다는 사실을 알고 K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럴 수 있어도 자신의 아내는 지금껏 살아보니 정말 착한 성품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고,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내의 부정을 알고 나니 너무 화가 나서 아내를 때렸습니다. 이혼을 하니 많이 하다가 지금 세 명의 어린아이들을 누가 키우냐는 생각에 없던 일로 하기로 하고 같이 다시 살아보기로 합의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화가 나서 미치겠다는 것입니다. 떠오르는 잡념과 아내에 대해 살의를 품고 있는 자신이 위험하고 며칠 밤을 새우고 운전하다 사고를 낼 것 같아서 도움을 받으러 왔습니다.
보다 못해 중재에 나서서 아내의 말을 전한 여동생은 오빠에게 같은 여자로서 동생이 할 수 있는 충고를 하였습니다. 평소에 여자로 봐주지를 않다가 (잠자리를 하지 않다가) 갑자기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잠자는 자신에게 성행위를 할 때 아내는 강간을 당하는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아내의 생일이나 기념일에 선물한 번 주거나 나가서 외식 한 번 하지 않는 남편이 가끔 술이 취해 말로 그리고 신체적인 폭력을 할 때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합니다.
여동생의 말을 전해 들은 남편은 자신이 그동안 아내에게 관심을 주지 않은 것을 지금이나마 후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화도 참을 수 없어 고통스럽다고 했습니다. 이혼을 여러 번 생각했으나 현실적인 답은 용서하고 (혹은 용서를 빌고) 같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내일은 아내 생일인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갑자기 태도가 달라지면 아내가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몇 년 성실히 근무한 파출부가 생일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인간적으로 어떻게 해주겠냐고,,, K 씨가 10년 간 연락 없던 친구가 오랜만에 선물을 보내왔다면 기분이 어떻겠냐고? 되물었습니다.
K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네요,,, 기분 나쁘지는 않겠지요, 알겠습니다" 합니다.
아내에게 잘해준다면 K가 두려운 것이 무언지도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그냥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의 말을 더 들어 보니 아내의 외도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두려운 존재에 대한 반항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지키고자 관심 없고 구박하는 남편과 이혼하지 않고 참고 살아온 착한 여자였습니다. 또 궁금증이 생깁니다. K는 그동안 아내에게 왜 그렇게 관심 없었고 한 편, 애 키워주는 여자이자 파출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몇 가지 상상할 수는 있지만, 이후 K는 더 저를 찾아오지 않아서 알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지도 않았으면서 또 사랑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으면서 상대가 견디다 못해 돌아서면 배신했다고 분노하고 필요에 의해 다시 붙잡습니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는 상대에 대한 공감[1]과 배려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여성 혐오자"라고 불리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K의 분노는 자신이 아내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게 되면, 심리적 균형감이 생긴다면 아내에 대한 분노는 어느 정도 사그라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래된 습관과 성격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가정의 불균형은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지속됩니다. K가 만약 꾸준히 자신의 문제를 고치려고 노력한다면 모르겠으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태도가 변화 거나, 내면의 문제를 도와줄 사람을 비용을 들여가며 오랫동안 필요로 할지 의문입니다.
아이들은 돈은 부족해도 좋으나 부모가 사이좋은 환경에서 자라야 또한 좋은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1] 공감이 부족한 남성들, 여성 혐오자들이 의외로 많아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생활은 잘할 수도 있지만, 권한이 큰 수직적인 관계에서는 상대를 조종, 이용하거나 가정에서 쉽게 문제가 발생합니다.
모퉁이 뒤에 숨어 멀리 그대 오는 길
한참 바라보다 웃음이나 들킬뻔했죠.
모퉁이 뒤에 숨어 그대 날 찾는 눈빛
너무 행복해서 하마터면 울 뻔했죠.
- 가수 김연우의 연인-
언제이던가? 제 첫사랑인지도 모를 기억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집 앞 골목에서 같은 학년의,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그 여자 아이는 등하교 길에 나와 자주 눈을 맞추게 됩니다. 나는 아직 입가의 수염이 보드랍고 몸도 사춘기 전의 상태인데 그 여학생은 훨씬 저보다 더 성숙하고 여자 다운 몸매였습니다. 눈도 크고 키도 큰 얼짱 미인이었는데 같은 학교이지만 반이 달라서 서먹한 사이였습니다. 토요일 아침마다 집 앞을 청소하는 봉사 활동 같은 행사가 있었는데, 지역 반장이 아침 일찍 행사 마치고 참가자 이름을 적는 것이 마지막 순서였습니다. 마침 같은 동네여서 그 날은 그 녀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마음이 설레고, 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당시에 소심한 나는 만남을 기다린 시간에 비해 간단히 그리고 공식적인 말만 하고 도망치듯 그녀에게 눈인사하고 서둘러 집으로 오곤 하였습니다.
- 그대 그리고 나 -
오래전 애용하던 블로그에 올렸던 글입니다. 그 블로그 운영자가 알려 주어서 다시 보니 새롭고 정겨운 맛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제게 도와달라고 찾아온 Lee는 마르고 창백한 얼굴의 30대 중반의 직장 여성입니다. 그녀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직장에서 남자(주로 관리자)가 다가오면 얼굴이 붉어지고, 그 붉어진 달아오르는 얼굴이 창피한 마음이 들고,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들킨 것 같은 마음이 부끄럽고 불안해서 직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정작 그 사람들에게 연인의 감정은 없다고 하였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었고 불안했고요. 말을 하면서 그녀는 어느새 눈시울에 눈물이 맺혀 몇 방울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란 내성적 성격의 그녀는 성장과정에서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합니다. 남자와 연애 한 번 못하고 지금의 남편이 첫 남자라고 하였으며 학교 졸업 후 20대 초반 처음 생산직에 입사하여 첫 직장에서, 현장 대개 남자인 관리자가 다가오면 얼굴이 붉어지고 달아오르는 현상이 발생하여 3년간 참고 일하다가 그것이 불편하여 회사를 관두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혼 후 평범하게 살면서 수년 전 이 직장에 입사하여 몇 명의 남자가 다가오면 얼굴이 붉어지는 증상으로 힘들어하고 참고 지내다가 치료받을 결심을 하고 내게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소 직장에서 긴장하고 불안 수준이 높다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 주부로서 직장인으로서 큰 어려움이 없는 평범한 환경에 있었지요.
자신은 왜 그런지, 그 관리자들에게 남성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반복해서 자신의 마음의 순수함을 주장하고, 그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할까 봐 창피하고 불편하다고 하였습니다. 괴로워서 회사를 또 관두어야 할까 보다고 하였습니다.
순진하고 착한 마음의 그녀를 도와주어야겠는데 그녀는 처음에 저에게 필요한 정보를 좀처럼 주지 않았습니다. 긴장을 풀고 좀 더 마음의 문을 열고 실마리를 내게 주어야 하는데,,, 말 수가 적고 자기표현을 못해서 저는 몇 회에 걸쳐 편하게 그녀의 경험, 기억을 살펴보고 자유롭게 생각을 말하도록 부탁을 하였습니다.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
<1. 얼굴이 붉어짐에 대해 - 나는 그런 생각이 없으나 그 남자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으로 오해할 것 같은 불안, 창피함. 어려서 내성적인 성격, 자신의 표현을 잘 못함, 아버지 다소 엄한 분위기에서 성장했음.
2. 중학교 시절 3년간 좋아하던 남자 선생님(유부남)에 대한 기억, 지금도 분명히 그분의 이름 얼굴, 모습을 기억하고 연상함, 혼자서 좋아하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분이 이 년간 가리킨 영어 수업이 기다려졌음.
3. 첫 직장에서 40대의 관리자가 지나가면 얼굴이 붉어진 증상 시작, 지금과 같은 증상이 시작되었음. 그 사람도 유부남이고 연정을 품은 것은 아니다고 강조함. 여러 번 조심스럽게 마음의 문을 두드리자, 그녀는 그 사람에게 잘 보여서 좋은 평가를 받고 싶었던 욕구가 있었음을 기억해 내고, 평가를 잘 받았던 같은 동료들이 사무직으로 뽑혀 갔으나 자신은 안 되었고 실망했었다고 함.
4. 현 직장과 과거 직장의 비교-관리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더 이득은 없는 조그만 직장이지만, 좀 더 편한 업무를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에 대한 욕구와 기대가 상당했음.>
수줍다, 부끄럽다, 창피하다, 서먹하다는 것은 어떤 감정일까요?
옛날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 맞선을 나간 숙녀가 상대 남자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다소곳이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옆에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앉아 있습니다.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한 편 엄한 아버지가 꾸중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자녀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정신의학자와 정서 과학자들은 이런 감정들은 <불안> 한 마음이 상황에 의한(맥락) 생각(관념)과 연합해서 만들어진 감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판크세프의 3차 감정[1]). 스키너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처벌>을 두려워하는, 처벌을 받았던 경험에 의해서 만들어진 <불안>입니다.
저 또한 교사이신 아버지의 훈육을 받으며 자라왔습니다. 평소 다정하시고 유머가 있는 분이지만, 형과 제가 싸우면 가벼운 체벌도 하셨고 일상생활에서 책임과 신뢰를 주장하시던 성품이었습니다. 제 성격을 아버지 탓으로 돌리는 것 같지만, 아버지가 준 유전자, 그분의 훈육이 상당한 영향을 주었겠지요.
저는 Lee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남자에게 연애의 감정을 품지도 않았는데 남들이 알까 봐 겁을 내고 불안해합니다. 자신감과 자아(멘틀)가 약한 것이 큰 요인이지만 아버지의 <처벌> 기억은 남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감정마저 검열하고 억누르고 부정합니다. 어떻게 보면 어려서 부당한 처벌이 있었을 경우 "내가 그런 것이 아니야" 하고 부정하고 항변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이 분처럼 이미 지나간 기억이 의뢰인의 몸과 마음을 자신도 모르게 지배할 때, 정신기능, 신경쇠약의 정도에 따라 진단과 치료 방법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
[1] 뇌 정서 과학자인 판크세프는 타고난 7가지 감정을 일차 감정, 일차 감정이 학습에 의해서 자동 행동과 연합이 되는 것을 이차 감정- 주로 본능 행동을 촉진함, 그리고 환경, 맥락에 따라 생각, 인지가 합성된 감정을 3차 감정이라고 했음.
주로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들은 스트레스가 있으면 해소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또 상황이 마음에 안 들면 참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해결하거나, 해결 안 되면 협상하거나 때로 목적을 위한 위협, 투쟁도 불사합니다. 여성들은 정서적으로 공감, 돌보기가 발달했고 다툼보다 감정에 호소하지만 뜻대로 안 되면 기다리거나 참는 분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정확히 정해진 것은 없으니 남녀 관계없이 성격의 특성 때문에 인관관계에서 에너지 소비와 용량이 한계에 달하면 스트레스 질환ㆍ우울증 발현의 촉발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나의 한계가 얼마이고 또 언제까지인지 모르고 하던 습성대로 살아갑니다. 몸과 마음이 고장 나도 고장 난 줄도 모르고 살다가 또 알아도 어떻게 도움을 받을지 몰라서 문제입니다.
제가 자주 진료실에서 느끼는 것은 우울증의 여러 증상 중에 핵심감정은 무력감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축 쳐진,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입니다. 그러한 상태이니 초기에는 짜증이 늘어납니다. 사소한 일에 화가 나고 부모, 애인, 남편, 심지어 자신의 아이들까지도 화풀이의 대상이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짜증과 분노보다는 무력감과 정신적 통증(psychological pain)이 골짜기를 덮는 새벽안개처럼 어느덧 내 앞을 한 치도 못 보게 가리게 됩니다. 몸의 통증과도 같은 이 정신적은 아픔은 매우 진화적으로 오래된 참기 어려운 감정에 속합니다. 이 정신적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에 우리는 이 아픔이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해야 조금 더 도와줄 수 있습니다.
제가 전공의 수련의 기간 동안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불린 동물 우울증 모델의 실험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는 일 없이 운 좋게 전공의 논문상 받음). 이 실험에서는 불쌍한 실험 쥐를 물탱크에 빠뜨립니다. 쥐가 죽지 않으려고 헤엄치며 물탱크 가장자리의 발판에 도달하면 전기 충격을 받게 되어 발을 못 디디고 다시 도망치게 됩니다. 이를 반복하다 보면 쥐의 살겠다는 욕망은 서서히 사라지고 헤엄치는 행동이 느려지게 됩니다. 결국 포기하는 단계에 도달합니다. 몇 가지의 항우울제를 먹은 쥐가 수영 행동을 더 오래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오래전 치료로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녀의 처지가 불쌍해서 기억하고 있는 A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한 어린아이의 엄마이며 결혼 7년 차입니다. 첫 방문에는 심한 불안, 초조, 불면증, 그리고 숨이 답답하고 쉬기 어려운 공황 증상까지 관찰되었으며, 밖에 외출하면 증상이 더 심해지기 때문에 하던 일을 멈추고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우연히 동네 분들의 소개를 받아 저를 찾아온 이 분은 증상이 심해서 약물치료를 하자 일주일 만에 "잠을 자니 이젠 살겠어요" 하면서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 몰랐는데 치료가 무서워서 오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오지 않았고 저도 진료에 바빠서 다른 병원에 갔거니 하고 잊었다가 다시 3개월이 지나 찾아왔습니다. 사정이 있어 오지 못했는데 무력감, 우울감이 심하고 어지러워 밖에 나갈 수 없어 다시 치료받고 싶다고 했고 그 뒤로 그녀의 집안 사정(병력)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 분에게 이야기하는 그녀의 사정은 간단히 요약한 것입니다. 그녀는 나이 5세 정도에 부모가 이혼했고, 간 혹 연락하는 어머니는 아직도 아버지를 이기적인 나쁜 인간이라고 욕하고 있다고 합니다. 부모 이혼 후 아버지와 할머니와 세 식구가 살게 된 A는 어머니는 보기 힘들었고 할머니가 밥을 해주어 주어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친구 소개로 만난 지금의 남편과 너무 일찍 결혼을 했다 합니다. 어려서 시집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남편의 폭력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집 식구들은 너무 편파적이었습니다. 남편은 욱하는 성격이 있고 한 번 분노가 폭발하면 그녀를 밀치거나 손으로 때리기도 하였고 늘 남을 비방하고 자신을 무시하며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고 트집 잡으며 갑자기 돌변한다고 합니다. 남편에게 폭행당하는 것을 보는 시어머니는 "게가 건들지만 않으면 되는데 네가 건드려 화를 나게 해서 그래" 하면서 말리거나 남편을 혼내기는커녕 자신을 비난하는 시모의 태도가 어이없었다고 합니다. 폭력을 견디다 못해 경찰서에 신고한 적도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자기 아들 범죄자 만드려 하냐고 화를 냈습니다.
이런 남편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그런데 이 남편은 그러고 나면 다음부터 평소보다 잘해준다고 합니다. 친정에도 참 잘한다고 하네요. 술을 많이 먹지도 않고 직장이 끝나면 제 때 집에 와서 식사를 하며 하나 있는 아이는 매우 좋아하고 잘 챙긴다고 합니다.
남편이 폭력적인 사람인데 평소에 잘해준다? 표현이 앞 뒤가 맞지 않아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시간이 좀 필요했습니다. 남편의 나쁜 행동을 힘들게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면 남편을 꾸짖기는커녕 " 네가 알아서 잘 지내라 "는 정도의 말만 해 왔다고 합니다. 친엄마와는 불편해서 그리고 불편을 주기 싫어서 말을 못 하고 오로지 자신을 이해해주고 감싸주는 사람은 할머니였다고 합니다. "가여운 것,, 할머니가 그런 놈하고 살지 말고 나와서 할머니랑 살자" 고 하셨다고 합니다. 집에서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한 사람은 오로지 할머니뿐입니다.
남편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작은 공장에서 일을 한다고 합니다. 이 부분이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까다로운 아버지가 화를 내거나 이것저것 일을 많이 시켜도 화내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자신이 할 일이 아니어도 늦게까지 남아 식사도 못하고 일을 마무리하고 오기도 하는 성실한 태도에 아버지의 큰 신임을 받고 대우도 잘 받고 있다고 합니다.
남편은 말로 심한 모욕을 주거나 나쁜 행동을 하고 나서 다음 날이면 싹싹하게 잘 보이려고 하고 기분 좋으면 선물을 사다 주고 화를 풀게도 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다툼의 원인이 남편에 있지만 서로 냉랭한 것을 자신이 참지 못해 먼저 남편에게 잘해주고 화를 풀게 합니다. 그럼 태도가 달라질까 기대를 하다가 실망하는 일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숨을 못 쉬는 증상이 심하면 응급실에 다녀오기도 하고 외출이 두려워졌고 본인은 이유를 몰랐다고 하고 원인을 알기 위해 종합 검진을 받았지만 특별한 문제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A가 처한 상황이 이해가 되시나요?
아버지와 남편은 가족이지만 사업, 일, 이익을 서로 주고받습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보호를 해주어야 하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남편은 아버지에게 신임을 받고 아버지는 그의 잘못을 눈 감아 주고 있습니다. 이해할 만한 부분도 있지만, 두 사람 모두 A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배려와 공감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남편은 영리하고 성실하게 아버지의 신임을 받고 있으나, 자기 방어와 거짓말에 능숙하며 타인의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임을 그녀의 말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도 물탱크의 실험 쥐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그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고 뇌와 마음에 병적인 변화가 오게 됩니다. 일을 계획하고 진행하며 충동을 억제하는 상부 뇌는 감정과 욕구 행동의 원천인 하부 방어-생존 시스템(변연계)이 과열되면 이를 조절하지 못하여 몸과 마음을 운영하는 자동화 기계가 고장 나고, 다양한 증상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제가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나서 여러 분들의 좋은 격려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말합니다. 진료-일 하고 바쁠 텐데 쉬지 않고 또 일하니 대단하다고 합니다. 저의 약점인 글이 어렵다고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이 말은 아마도 제 브런치의 다른 주제인 <억압의 비밀>을 읽고 그리 말한 것 같습니다. 저를 아는 진료실 주변의 지인들은 제 글이 활자화되어 나오니 신기한가 봅니다. 아내는 프로필 사진을 다른 것으로 바꾸라고 하고 장애인 요양기관을 운영하는 수녀님들이 구독, 라이킷을 꾹 눌러주셨다고 하네요.
이런 반응들이 관심을 받아서 좋기도 하고 그러면서 저 스스로 물어봅니다.
나는 왜 지금 글을 쓰는가?
지금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글 쓰는 것을 자랑하려고 그러는지? 네. 한 때는 더욱더 , 그리고 지금도 글 쓰는 작가가 멋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정받는다고 생각하면 어깨가 으쓱해지며 기분이 좋아집니다. 한 편 제 생각은 직업과 일상에서 스트레스와 외로움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 종일 진료실에서 있다 보니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잠깐 쉬거나 하지만, 직원 외에 타인과 접촉이 없고 일상적인 대화가 거의 없습니다. 제 일의 성격 상 타인의 고통을 들어주고 감정을 달래주고를 반복하고 진료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한 동안 정신이 멍해지기도 합니다. 아내와 식사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만, 일과 관련해서 말을 하면 직장에 있는 것 같아 거의 이 쪽 일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직업의 스트레스가 상당하네요. 그리고 규칙적으로 주말에는 동료들과 운동도 합니다만,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감정의 불편을 토로할 마땅한 상대가 없습니다. 이렇게 제가 글로 써보니 저의 의문이 저절도 풀어지거 있습니다. 저는 저의 말을 들어줄 상대가 필요하네요. 제 말은 조금 생각했다가 하는 버릇도 있고 말을 재미있게 못 해서 누가 듣더라도 귀로 듣기에는 불편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누구는 이렇게 아파서 마음이 불편해서 왔더라,, 내 생각은 이렇더라,, 힘들다, 화가 난다, 죽고 싶다, 이런 말들은 자주 들으면 불편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긴 글로 쓰는 것이 제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인가 봐요.
어제 몇 개월 치료하던 환자와 상담하면서 정말 멋있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녀가 좋아지는 것을, 감정이 밝아진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어린아이를 둔 애기 엄마입니다. 어려서 부모에게 받은 많은 상처로 아직도 영향을 받고 있고 물론 현실도 환경도 썩 좋은 편이 아닙니다.
< 저는 아이를 돌보면서 과거의 슬픈 기억을 털어내는 것 같아요,, 아이가 즐겁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서, 아기를 어린 시절의 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잘 돌봐주고 사랑하는 엄마인 저는, 저를 돌봐주지 못한 과거의 엄마를 좋은 엄마로 대치시킨 엄마입니다. 아이하고 놀면서 저의 어둔 시절의 슬픔을 행복한 기억으로 바꾸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속이 후련하고 따뜻해집니다. 몸에서 기분이 좋아지는 이상한 짜릿함이 있답니다. 그리고 막 뛰어다니고 싶어 진답니다.>
사람은 누구를 돌봐주면서 에너지를 쏟고 힘들지만 그것이 적당하다면 그 일에서 좋은 긍정적 피드백을 받습니다. 이 애기 엄마도 순간 이런 행복을 느끼므로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지만, 서로 불편할 때도, 양육이 너무 힘들 때도 있겠지요. 아이와 엄마와의 의식적 비 의식적 감정의 교감은 공감(empathy)이라고 하는 정신적 에너지 변환의 바탕이 됩니다. 공감에 관여하는 거울 신경 체계는 놀이를 통해서 다져지기도 하고 언어 모방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틀이 된다고 합니다. 애착이라고 하는 사회생활의 기본이 되는 엄마와 아기의 관계에는 오피오이드, 옥시토신, 프로락틴 등의 강력한 호르몬이 작용하는데 이런 화학적 작용이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저도 글을 쓰면서 감정을 표현하고 자신이 한 일을 확인하고 칭찬해주면서 행복을 느끼니 계속 글을 써야 합니다.
1. 나쁜 꿈- 설날, 그 분주함의 뒤 끝
꿈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우리의 삶의 절반은 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저도 꿈이 많은 편이라 새벽에 깨는 경우 꿈을 기억하는 편입니다. 사람은 밤에만 꿈을 꾸는 것은 아니고 낮에도 꿈과 같은 환상에 젖어 있기도 합니다. 경험이 기억에 저장되는 3-4세부터 꿈은 일생을 통하여 여러분과 같이 생활하고 만들어지고 반대로 작고 큰 영향을 주는 친구와 같은 존재입니다.
어떤 유명인들은 꿈을 통하여 좋은 아이디어를 얻고, 큰 재산을 벌거나 잃기도 하고 사랑하고 헤어지며 심지어는 전쟁터에서 목숨도 구했다고 합니다. 부모들은 꿈을 통해 멀리 있는 아이들의 소식을 전해 듣기도 합니다. 심지어 태몽이라고 해서 아기를 가질 때도 당사자는 물론 시부모 친정 부모까지 꿈을 꾸게 되니 정말로 꿈은 커다란 역할을 하네요. 더구나 꿈은 정말 우리 일상에서 꿈 이상의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선진국 미국도 심령술사가 활동을 다양하게 하니 일반인의 생각하는 방식은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요즘은 미국 수사 드라마에서 "psychic"이라 불리는 심령술사(무당)들도 등장해서 초능력으로 범죄 수사를 돕는데 주로 꿈과 연관된 장면에서 범죄의 단서를 찾는 것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우리는 청운의 꿈을 꾸고 일을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여러 가지 행동과 말을 보고 들으면 항상 꿈은 미래를 점치며, '운명'과 같이 다니는 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꿈은 어려서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무서운 꿈으로, 그리고 힘들고 어려울 때 악몽으로 찾아오니, 두렵고 중요한 존재로 각인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꿈을 다룬다는(해몽) 전문가들은 대개 인생과 운수를 점치거나 나뿐 운수를 액땜해주는 전문가들과 같은 업종이거나 그 일을 하는 분이 해몽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그런대요, 100년 전에 프로이트라는 의사이며 정신분석가가 혜성 같이 등장해서 종래의 꿈 해몽과 심령술 시장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꿈이라는 것은 미래를 알려주는 계시가 아니라 마음과 뇌에서 만들어 내는 생리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쉽게 강의했고요, 과학을 바탕으로 설명을 그럴 싸하게 해 주어, 그때부터 사람들은 꿈이 주는 미신과 두려움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저의 경험에는 아직도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꿈은 정체 모를 존재입니다. 젊은 사람이나 노인이나, 성과 학력과도 큰 차이 없이 여전히 꿈은 운명이고 두려운 존재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몰랐던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꿈이 노이로제(신경증)와 유사한 감정 반응을 유도하기 때문이며, 둘 째는 생각하는 이성이 작용을 못하기 때문인데요, 차 차 설명드릴게요.
명절 지나면 다음 날부터 며칠간 의원의 원장은 바쁘고 환자들은 여기저기 아픔을 호소하고 특히 주부들이 많이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나쁜 꿈도 명절 후 찾아오는 후유증의 하나인데요 오늘 찾아오신 40살 전 나이의 두 아이를 키우는 주부의 꿈 이야기를 해볼게요:
이 애기 엄마는 두 가지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환자가 꿈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그에게는 의미 있고 비중 있는 경험이라 저는 가볍게 듣지 않습니다. 그녀는 마음이 급하고 불안한지 말이 빠르고 더듬기도 하면서 얼굴은 붉게 상기되고 작은 땀이 송골송골 맺혔습니다.
"선생님, 꿈에서 귀여운 4살 정도의 어린아이를 돌보다가 갑자기 아이가 없어졌어요. 주위를 보니 아이가 횡단보도를 혼자 건너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가슴이 철렁해서 쫒아 잡으려고 달려갔어요. 얼마나 놀랬는지,,,
그녀는 지금도 가슴이 뛴다며 심 호흡을 하다가 또 다른 꿈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 번에는 항상 다정하고 잘해주는 남편과 너무 심하게 다툰 꿈을 이어 말하시네요. 꿈속에서 서로 이혼 서류까지 준비하고 대판 싸우다 깨었다고 합니다. "정말 이상하다 남편은 평소에 너무 좋은 사람인데요, 제가 이해가 가지 않아요. 명절에도 잘 지냈어요."
2. 인연因緣, 연기緣起, 결정주의 determinacy
여러분 인연이라는 말을 아시죠?
불교 용어로써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연기도 비슷한 말인데요, 모든 현상, 일에는 많은 직접, 간접적 원인과 조건이 상호 작용한다는 철학적인 세계관을 뜻하는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뇌과학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과학의 세계에서 사용하는 이 용어는 철학의 세계관이 아닌 좁은 일상의 현상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미세한 세계 또는 정신, 행동의 현상을 말합니다만, 결정주의, 결정론이라고 합니다. 현대 생물과학, 정신분석, 행동과학의 대표적인 다윈, 파블로프, 프로이트, 스키너 같은 쟁쟁한 학자들이 다 결정론자들이었습니다.
이 주부는 어려서 변덕스럽고 화를 잘내며 자기주장, 고집이 세서 주변 사람들을 좌지 우지 하는 엄마가 키웠고 엄마에게서 받은 고통스럽고 힘든 작은 사건들이, 감정이 그녀의 일상생활에 지금도 영향을- 자기도 모르게-받고 있습니다. 어려서의 사건 기억과 감정은, 충격적이거나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있었으면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성장해서 다 잊은 듯하지만, 인연, 연기가 작용합니다. 특히 감정 반응은 뇌의 하부 기관(변연계, 방어-생존 시스템)에 기억되어 있다가 비슷한 자극에 다시 반응하여 부활하는데 엉뚱하게 꿈의 형성에 관여한다든지, 불쾌한 감정에 휘말리거나 심하면 신체 불안 증상까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뇌의 상부 체계인 뇌 겉질과 해마 등의 생김새와 기능은 어려서의 사건 기억이 저장된 곳이지만, 꿈에서는 전두엽의 해석 기능이 없으며, 하부 감정 자극과 그 반응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아서 당사자는 불쾌한 증상의 이유를, 그러한 과거 사건 경험이 스트레스 반응으로 작용하는 지를 잘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3. 꿈보다 해몽
여러분, 꿈은 해몽이 중요하다고 합니다만, 그런 식으로 꿈과 고객에 맞추어 해몽을 한다면 당사자는 기분이 좋겠지만, 꿈마다 사람마다 해석이 달라진다는 말이 아니겠는가요? 전문지식과 과학을 기반으로 진료를 하는 의사들은 해몽은 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증거위주의 진단과 치료를 해야겠습니다만, 너무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아야 하고 먼저 불편한 분의 감정을 달래주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실상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요인, 환자들이 비협조 혹은 지나친 요구로 원칙을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렵기는 합니다.
꿈에 대한 저의 좀 더 과학적 개념을 말씀드리면, 제일 중요한 부분이며 나쁜 꿈을 꾼 분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부분인데요 꿈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한 꿈을 꾸는 사람은 미래에 이 꿈과 같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드는데, 그 이유는 그의 마음이 미래를 예측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어렵지요? 꿈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닌데 마음은 미래를 예측한다고요?
제가 앞서 인연, 연기, 결정론을 말씀드린 것은 나쁜 꿈은, 꿈이 형성되기 전에 어떠한 자극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자극으로 꿈이 만들어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뇌의 하부 기관인 변연계, 생존-반응 시스템이 일부 활성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분은 뇌가 흥분된 상태이며 마음은 불안하게 됩니다. 자세히 보면 불안 증상이 더 있을 수 있지요. 가슴이 뛴다든지 답답하거나 자주 흥분하거나 짜증, 집중력 저하 같은 증상인데요, 이들을 보통 에둘러 신경증, 노이로제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이야기가 복잡해지네요. 자신의 몸과 마음이 불안한 상태이므로 꿈이 의미하는 것은 앞일의 예측이 아니지만, 마음은 꿈의 예지력에 압도당하게 됩니다.
4. 셜록 홈스와 프로이트
홈즈와 같은 유명한 탐정과 저와 같은 분석 전문의가 같은 점은 증거위주의 사건(치료) 해결을 진행한다는 점입니다. 크게 다른 점은 저와 같은 사람은 인본주의자이며, 사람에 대한 애정과 치료로 직접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바탕이 되어있다는 점이겠지요.
저는 이 분의 진단에, 꿈을 만든 원인에 대해 시원한 증거가 나오지 않아서 말씀을 더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렇더니 이런 말을 하더군요. 연휴에 친정 엄마를 뵈러 갔다가 무슨 이유로 엄마를 못 만나고 왔는데, 이후 엄마가 계속 전화를 해서 말을 하다가 다투었다고 합니다. 엄마와의 언쟁은 이 분의 감정을 휘저어 놓았고요, 평소에도, 엄마와의 대화는, 엄마의 고집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감정 반응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제가 말씀드렸죠? 명절 연휴가 후유증이 많다는 것을요? 최근의 자극과 과거 경험이 바로 나쁜 꿈을 만든 것입니다.
이 꿈에서의 의문점은 평소 착하고 선한 남편이 꿈에서는 악한으로 나오고 심지어 이혼까지 하자면서 싸웠다고 합니다. 다시 애기 엄마의 표현을 들어보니 남편은 정말 자상한 사람이라는 것이 확실하네요.
상징의 내용이 바뀌는 것은 꿈속에서는 종 종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왜 그런 것 있잖아요? 가장 아끼는 물건이 망가질까 봐 걱정하는 것,, 걱정, 우려, 신경증적 예측은 남편이 엄마처럼 변하는 것입니다. 애틋한 남편에 대한 신뢰, 의존과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불행(예측)은 과거에 격은 엄마와의 생활이 있었기에 마음속에서, 꿈속에서는 가능한 것입니다. 이 주부의 경험에서 가장 악질적인 경험을 준 사람이 누군가요? ,,, 슬프게도 엄마입니다. 운 좋게도 착한 남편을 만났는데, 불안한 나머지 남편은 자신에게 가장 악했던 엄마의 모습으로 꿈에 나타납니다.
5. 자신을 아는 것
자신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설명해주어도 명료한 의식으로 들어오지 않는 경험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아침에 일찍 깨어 일어나 생생한 악몽이 있었다면 매우 불안합니다. 하루 종일 생각이 날 수도 있고 불안 반응으로 흥분되어 곧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행동이 매우 움츠려 듭니다. 이런 상식을 가지고 우리가 이런 꿈을 꿀 때 어찌 대처해야 하는지, 불안한 마음을 공감하며 여러분이 이 주부라면 어떤 말을 스스로 해줄지 생각해 볼까요?
첫 째 저라면 안심을 시키겠습니다. 꿈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고,,, 자신의 불쾌한 느낌은 꿈의 내용과 자극된 불안 반응이 합쳐진 것이라고,,, 이 주부는 이 말을 듣고(중간 설명이 필요했지만) 안심하면서 "원장님,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큰소리로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럼 아이가 나오는 꿈은요? 엄마는 가장 걱정하는 것이 아이의 안전입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놀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대충 짐작이 가지요? 그러나 이것저것 이야기하면 주부가 힘드니 가장 의미 있는 꿈만 선택해서 토론합니다.
이상 연휴 첫날 진료 이야기, 악몽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나쁜 꿈을 꾸는 분들에게 전해주세요.
죽은 사람 만나는 꿈은 왜 그럴까요? 이것은 여러분의 숙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