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예천에 이런 멋진 정자가 있는 줄은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마치 알고 찾아간 것처럼 도로 옆 개울가에 세워져 있는 건물을 발견하곤 무작정 차를 세웠다. 원래는 예천 용문사란 곳을 가던 길이었다. 어떻게 그 작은 정자가 빠르게 달리던 차에서 눈에 띄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 만나게 될 인연이었으니 그리된 것이겠지.
작은 개울가의 가파른 암벽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초간정의 모습은 독특했다. 그래서 이목을 사로잡았나 보다. 아래로 좀 더 내려가 초간정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지만 개울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없었다. 주변도 그다지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은 아니라서 아쉬웠다.
보통은 그저 멀리서 한번 보고 사진 몇 장 찍고서는 발걸음을 돌리게 마련인데 이상하게 초간정은 그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에 있는 작은 다리를 건너 정자 앞에 다다랐지만 출입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아쉽지만 문이 잠겨있어 어쩔 도리가 없다 싶어 발걸음을 되돌리려는데 초간정 옆의 민박집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말을 해보면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뭔가에 이끌리듯 집 안으로 들어가 아주머니를 찾았다. 무슨 일이냐 길래 초간정 안엘 들어가 볼 수 있는지 여쭤봤다. 아주머니는 대답을 않은 채 열쇠를 가지고 나와 문을 열어주신다. 좀 귀찮기도 하셨겠지만 경상도 식의 친절을 베풀어주신 셈이다.
덕분에 초간정 구석구석을 잘 돌아보고 나올 수 있었다. 누각에 잠시 앉아 있으니 바로 옆을 흐르는 개울의 물소리가 시원스럽게 느껴진다. 조선시대 양반이라도 된 양 시라도 한 수 읊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우리 조상들은 어찌 이리도 경치 좋은 곳마다 이런 정자들을 세웠는지 신기한 일이다.
개울가를 따라 솟아있는 바위 위에 주위의 자연석을 쌓아올린 모습은 볼 때마다 감동을 안겨준다. 우리네 조상들도 보는 눈은 똑같아서 풍광이 뛰어난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와 누각들을 세웠지만 지금처럼 다 깎아내고 베어내는 무자비함은 항시 경계했던 것 같다. 또한 잠시 머물러 쉬어갈 뿐, 그 누구도 이 경치를 온전히 내 것으로 소유하고자 했던 이도 없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각집 형태인데 정면 3칸 중 앞면의 좌측 2칸에는 온돌을 배치하였고, 나머지 칸에는 마루를 설치했는데 이 마루에서 앞의 개울을 볼 수 있게 배치해 놓았다. 실제로 이곳 온돌방에 불을 지펴 하룻밤 잠을 청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난 이 정자에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고 있었을지, 아니면 온돌에 불을 지피고 있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초간정은 조선 중기의 학자 초간 권문해가 선조 15년 때에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이후 광해군 때 다시 중건했지만 이마저도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7년(1870)에 그의 후손들이 다시 세운 것이라 한다. 이마저도 140년이 지난 세월을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몇 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지만 지금의 건물도 벌써 백 년이 넘는 나이를 먹었다. 모든 목조 건물이 그렇듯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집은 이내 허물어지고 쇠락해 버리고 만다. 문화재 보호도 중요하겠지만 자물쇠로 꼭꼭 잠가두는 것보다는 애정을 지닌 사람들이 기거하면서 먼지도 털어내고 식어버린 방에는 불도 지펴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갑자기 차가워진 날씨 탓인지 이날따라 이 비어있는 공간이 더욱 쓸쓸하게 느껴졌다. 마룻바닥을 걸을 때면 발이 시려 옮을 느낀다. 삐걱거리는 소리는 계곡을 쉼 없이 흐르는 물소리에 이내 묻혀 버리고, 잠시 누각에 서서 생각에 잠겨 본다. 하나하나 쌓아올린 반듯한 돌담에서는 역시 사람 냄새가 나서 좋다. 모진 풍파를 견디고 지금껏 건재해 주었듯 초간정이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 떠나간 인걸(人傑)을 추억할 수 있게 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