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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Jun 15. 2024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 결혼

지역 미술관에서 이건희 컬렉션 한국 근현대미술 특별전을 하고 있다. 전시장의 첫 그림은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이었다. 그림 크기에 한번 놀라고, 다른 명화와 달리 두툼하고 손이 많이 탄 듯한 액자의 정겨움에 눈이 가다 갑자기 차가운 음료수를 겁 없이 벌컥 들이마신 후 찾아오는 듯한 어지러움이 찾아왔다. 아이를 등에 업은 채 절구질을 하는 여인은 아기 때문에 무게 중심이 뒤로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해 발을 벌리고 왼손으로는 절구통을 잡고 힘들게 절구 한다. 독특한 질감의 캔버스와 세월을 그대로 맞은 듯한 화려하지 않은 색이 여인의 절박한 삶을 드러냈다. 느닷없이 지독한 내 안구건조증을 비웃듯 두 눈에 눈물이 겁도 없이 차올랐다. '아이를 등에 업고 절구동이를 들고 절구질을 하는 저 여인은 분명 나보다 훨씬 어렸을 텐데...'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이 여인이 절구질을 하며 느꼈을 버거움이 감히 상상이 됐다. 가장 역할과 아이를 키우는 일까지 빈틈없이 하루를 채우며 살아갔을 여인의 삶. 두껍게 칠해진 질감 때문인지 세월을 간직한 액자의 프레임 때문지 희미한 그 형상이 꽤나 슬퍼 보였다. 이 시대의 여인들은 어떻게 삶의 버거움을 풀었을까?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팀장님께 점심 후 데이트 신청을 했다. "팀장님 저랑 차 한잔 하실래요?" 단순한 이유였다. 예상치 못한 인사발령으로 팀장을 하게 된 팀장님은 한 달 내내 초과근무를 소화해 내며 열일을 하고 계셨다. 나와 차를 마시지 않는다면 팀장님 성격상 40분이나 남은 점심시간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계속 일할 분이다. 단 한 번도 내게 힘들다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책임감에 버거워 보였고 새롭게 들어온 사람들을 품는 일이 쉽지 않아 보였다. 그저 지친 팀장님이 후배가 사주는 따뜻한 차 한잔 마시고 잠시라도 쉬었으면 했다.

차를 주문하고 마주 앉았는데 팀장님은 오히려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둘이서 차를 마시자고 한 줄 아셨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건 아니고?"

"팀장님 힘드신데 도와드리지 못해서요." 사실 이혼하고 아이를 홀로 키우다 보니 초과근무가 쉽지 않다고. 팀장님이 늦은 시간에 홀로 계시는 것 아는데 함께 하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래서 출근하면 잠시도 쉬지 않고 일만 했구나." 몰입해서 일하는 거 안다면서 개인적인 일로 힘든 일이 더 있는 건 아닌지 되물으셨다.

도라에몽의 비밀 도구 인 자백모자라도 쓴 것처럼 무장해제되어 내가 살아가게 된, 살아가는 한부모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야 말았다. 내일이 아닌 남의 일인 양, 어제 본 드라마의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슬프지만 유쾌하게. 올라오는 눈물을 꾸역 삼키고, 결국에는 미소를 띠며 뱉어냈는데 팀장님 눈에도 내 눈에도 눈물이 찼다.

"팀장님 힘드신 것 같아 그냥 차 사드리려고 한 건데 제가 무슨 상담을 받는 느낌인데요."

"많이 힘들 텐데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어? 너도 풀어야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책 읽고 가끔 글 써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워서 하지 않는 말까지도 말했다. 팀장님이 아닌 언니로 건네는 말들이 위로가 되어준 시간이었다.


박수근의 그림을 보며 어쩌면 나는 그림 속 여인의 모습이 나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가장으로, 엄마로 하루를 촘촘히 살아가야만 하는 삶. 절구질하는 여인에게도 한 명쯤은 마음을 기대어 힘들다고 말할 누군가가 있었기를 소망해 본다. 내가 가지지 못한 많은 것들을 잘 알고 있지만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아무리 힘들어도 하루를 부지런히 살아갈 뿐이다. 그게 엄마다.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 한 장면 속 대사가 떠오르는 오늘이다.

"내가 비록 이혼은 했지만,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은 결혼한 거예요. 어디 가서 이런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나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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