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을로 사는 기쁨] 프롤로그
아주 잊고 살거나 가슴 한쪽에 머금고 살 수도 있었다. 살 떨릴 만큼 치욕스럽고 분할 때도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1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나는 알게 되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때의 경험은 다양한 일을 지속하면서 업력을 높이면 높일수록, 전혀 다른 일에 도전을 거듭하면 할수록 되살아나 막다른 길에 몰린 나를 구해주었다. 마치 섬유유연제 광고 속 물속에서 확 퍼지는 섬유유연제처럼 선명하게, 연한 핑크빛으로 우아하게.
그때의 기억이 다 좋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비중으로 치면 아프고 쓰린 일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그 시간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더니 이윽고 성장시켰다는 것이다.
을로 살아가는 경험. 안 하고 살 수 있다면 안 하고 사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왕 을로 사는 경험을 했기에 나는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보기로 했다. 김연수 소설가는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삶을 다시 살 수는 없지만 글을 쓰며 그 의미를 찾을 수는 있다. 의미를 찾는 동안 우리는 그 시간을 다시 살 수 있다"
스물네 살부터 스물아홉 살까지, 아무런 수저도 없었던, 하지만 당당하게 을로 살았던 그 시간을 기록하기로 했다. 멋있었던 갑은 누구였는지, 왜 그는 진정한 갑이었는지, 반대로 치졸하기 이를 데 없었던 갑은 누구였는지, 어땠는지, 철저히 내 관점에서 해석해 볼 것이다. 을로 살았던 나와 내 동료들은 어땠는지, 어떨 때 비굴했고 어떨 때 당당했는지 기록해 볼 요량이다.
이 기록이 어느 정도 갈무리 되어가는 시점에 나는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까지 밤늦도록 스스로를 달달 볶으며 잠 못 들었던 수많은 밤을 보내지 않아도 괜찮았을 거라고.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다음 날 세상이 어찌 되지 않더라고. 작은 손에 쥐고 있었던 많지 않은 것들이 한 순간에 날아가는 일은 생각처럼 쉽게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지금 그런 날들을 보내는 '을'로 사는 이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스물몇 살의 나는 몰랐지만 한참을 지난 지금에 알게 된 것들. 을로 사는 건 약점이 아니라고. 을로 사는 경험이 당신을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을로 살았던 경험? 훗날 훈장이 될 것이라고. 단, 지금 이 시간을 지금의 나를 사랑하며 살라고. 그러다 보면 찬란한 시간이었다는 걸 알게 될 거라고. 한 가지 더, 가능하다면 그때의 작은 나를 찾아가 축 처진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싶다.
이 연재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