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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Jan 22. 2023

연말 파티 주인공의 은밀한 비밀?

찬란한 을로 살아가는 기쁨

본 연재는 필자의 직/간접 경험에 각색이 더해진 엽편 소설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실제 상황, 인물, 사건과 차이가 있음을 밝혀 둡니다. 재미있게 읽어 주세요 :) (*엽편 소설- 나뭇잎 정도의 크기에 담아내는 소설이라는 뜻으로 단편 소설보다 짧은 소설을 뜻함)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A와는 아이를 등교시키고 본격 하루를 시작하기 전인 여덟 시 반에서 아홉 시 반 사이 종종 커피를 마시는 사이다. 그날도 그랬다.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볍게 전화를 걸었다. 내차는 그녀의 집 주차장에 세워두고 우리는 커피 맛이 좋은 널찍한 카페로 향했다.


"언니, 그 스타벅스가 연상되는 녹색 마스크는 뭐예요?"

"응 남편 회사. 연말 파티를 하는데 드레스코드가 크리스마스잖아. 그래서 샀어. 산 김에 나도 한번 써본거야"


회사 연말파티라. 요즘에도 그런 걸 하나? 향수인지 추억인지 모를 감정이 코끝을 스쳤다. 카페에 도착해 늘 먹던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내 머릿 속은 이미 20여 년 전. 종로 삼삼빌딩에 가 있었다. 그날 내가 커피 값을 계산할 순서였는데 어쩌면 A가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제작 1팀은 무슨 콘셉트로 할 거냐고?"

"우린 뭐 별거 없어요~ 팀장님이 하라는 데로^^;"

"에이 이번에도 센 거 나오겠구먼!"

"기획 1 본부는? 혜숙~ 말해봐"

"별거 있겠어요~ 저희는 내용에 힘주라는 지시가..."


20여 년 전 종로 삼삼빌딩은 의미 있는 빌딩이었다. 서울 최초 고층 빌딩. 그 층의 3개 층을 우리 회사가 썼다. 외국계 광고대행사. 광고대행사는 당시 인기 많은 직종이었다. 문과생들에게라는 단서가 붙고, 지금은 3D업종이라는 꼬리표가 붙었지만.


당시 외국계회사들은 연말이 되면 연말 파티라는 걸 했다. 레스토랑을 빌려 성과 포상하고 비전 발표하는 무난한 행사도 했지만, 어떤 해는 팀별로 경쟁피티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오기도 한다. 이쯤되면 그냥 경쟁 피티가 아니다. 최소 어벤저스 같은 콘셉트를 정하고 의사 결정권자를 사로잡아야 하는 미션이 주어진다.


사원 3년 차. 내년이면 확실히 대리를 달 예정이었던 나는 비밀리에 혼자서 들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들뜸이었다. 그 들뜸이 무엇이냐고? 바로 내년이면 ‘확실히’ 대리를 달 것이라는 확신과 연말 파티 때 나는 기획 1본부 대표로 프리젠터로 설 것이며 1등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황당하지 않은가? 내로라하는 이들이 잔뜩 모여있는 광고대행사에서- 그것도 영어 능통한 인제가 수두룩빽빽한 외국계- 뿐인가? 당시에는 2세들의 취업이 많았던 직종이었다. 사원급끼리, 대리급끼리 팀장 없는 점심을 먹으러 삼삼오오 9,900원 아웃백 런치 같은 것을 먹는 날이면 한 명 건너 한 명이 '자제분'이었던 것이다. 그걸 모르는 내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게 어째서? 생각 들었다. 실력으로 보여주면 된다. 실력은? 노력하면 된다. 노력하는 사람에게 기회 주어진다고 아주 밝게 믿었다. 운칠기삼. 그 운마저도 노력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나 좋을대로 생각했으니까.


실제로 그런 일들은 종종 일어났다. 기획 1본부. 뭐든 1자 들어간 곳이 대표급인데 부서 배치도 1본부였다. 작은 광고주 프레젠테이션에 프리젠터로 서기도 했다. 회사의 실적에 영향 미치는 경쟁 피티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은 일은 아니었다. 광고 공모전 수상 경력을 바탕으로 졸업 전 취업된 나는 회사에서 주목받는 사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D-1

'아니야. 이 웃은 너무 평범하다고! 난 어쩌면 내일 스포트라이트를 받을지도 몰라. 근데 화이트셔츠에 검은 슬랙스라니? 노노. 너무 평범하다고. 그냥 직원 같잖아! 한겨울이지만 짧은 퍼프소매에 플레어 주름 스커트. 그리고 포인트로 스카프를 할 거야. 니트는 골드에, 플레어스커트는 블랙, 스카프는 민트색으로 포인트를 주자! 그래 이거야!'


나만 그렇게 생각할까? 정작 발표할 내용과 PPT장표를 최종 다듬기 전에 의상을 확정해야 뭔가 준비가 마무리되는 느낌이 든다. 스물네 살쯤의 나도 그랬다. 평상시 기획 1 본부 사원이 입는 옷 보다는 과감한 의상을 선택했다. 새 옷이면 좋았겠지만 이 대목에서는 현실을 돌아봤다. 한벌 사면 보세는 15-20만 원, 백화점 브랜드 의상은 최소 40만 원 이상. 연말 파티가 끝나면 지구가 종말 하면 그렇게 해도 된다. 그게 아니라면 옷장을 뒤져서 최대한 새 옷 같은 아이템으로 고른다. (구질구질한 건 사양한다!)


D-day

"연말 파티 프레젠테이션 맡은 루키는 1시까지 회의실 집합 바람"

홍이사의 호출이다. 왜 안부르나 했다. 1시면 본부별로 누가 발표를 하는지 한눈에 알아보겠군. 그때 나는 그들의 강점과 약점을 살펴 나만의 전략을 짜야겠다 생각했다. 누가 이런 생각까지 할까? 이건 그냥 게임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마냥 해맑았다.


"너네들이 각 본부 에이스야? 훗"

홍이사는 늘 저렇게 음흉한 웃음소리를 냈다. 오늘따라 동그란 까만 뿔테가 유난히 두껍게 느껴진다. 고가의 수입 안경테일 것이다. 턱가의 수염도 개성과 지저분함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 딱 그 길이다.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한 명씩 간단히 인터뷰를 할 예정이다. 한 명씩만 남고 밖에서 기다리도록"

역시나 특이한 사람이다. 연말 파티 전 개인 면담이라니. 그렇지만 늘 그렇듯 크리에이티브한 홍이사의 질문이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 차례는 7명 중 뒤에서 두 번째 정도. 쌓인 일이 적지 않아서 살짝 야근이 걱정되려고 할 때 내 차례가 왔다.


"음 그래. 요즘 일은 어떻고? 올 한 해 퍼포먼스, 스스로 몇 점 주고 싶어?"

이런 일반적인 질문이 한 두 개 오갔던 것 같다. 나도 드라이하게 답을 했다. 광고대행사는 기획 파트와 제작 파트가 따로 또 같이 일해야 하는 곳이다. 기획과 제작 각자 안을 준비해서 회의실에서 만날 때는 철저히 독립적이어야 하지만, 광고주에게 좋은 시안을 제시할 대는 또 열렬하게 한편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평소 뜨겁게 일해야 했다. 평상시 기획이 제작에 대한, 제작이 기획에 대한 이해는 필수 다.


홍이사= 금수저 출신. 지금도 엄청 부자. 옷이나 소품 모두 명품. 꼭 회사 다니지 않아도 되는 사람. 나는 제작 파트 수장으로서 홍이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고향이 어디야? 아버지 어머니 무슨 일 하셔? 집안이 대대로 서울 살았니? 서울이면 어디? 사대문 앞? 밖?"


본격 그의 질문이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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