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슈가 Feb 11. 2023

이국장이 파티션 너머로 가르쳐준 비밀

찬란한 을로 사는 기쁨 3화

찬란한 을로 사는 기쁨-프롤로그

찬란한 을로 사는 기쁨- 1화

찬란한 을로 사는 기쁨- 2화


당시 광고대행사 기획본부는 3개로 나눠져 있었고 각 본부마다 국장이 있었다. 국장들의 개성이 어찌나 제각각이었는지 지금 돌이켜봐도 생생할 정도다. 일부러 그렇게 뽑기도 어렵겠다 싶을 만큼 말이다.


사원 대리급은 해마다 이국장, 김국장, 박국장 아래로 랜덤 배치되어 일했기에 세 국장을 골고루 경험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짧게 일한 건 이국장 밑에서였는데 기간이 짧음에도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래서? 지금 나더러 그 자식한테 그렇게 안을 팔고 오라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들 하고 있어 정말…"


"국장님 그래도 상무님 지시라…(진땀)"


"야, 됐다 그래, 뭐 얼마나 대단한 회사라고, 나 낼부터 안 나온다고 전해"


칸막이 너머로 이국장과 박차장의 대화를 들을 때마다 내 심장은 두근거렸다. 모르긴 몰라도 대화를 나누는 당사자보다 내가 더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화도 매일 들으니 인이 박혔다. 한 명은 쩔쩔 매고 한 명은 시니컬한 대화는 매일이다시피 이어졌다. 대화의 끝은 늘 ‘나 내일부터 안 나온다고 전해 “였다. 어린아이 투정도 아니고 4~5명으로 구성된 국을 이끄는 국장의 맺음말로는 썩 어울린다고 할 수는 없었다. 박 차장은 사람 좋은 얼굴로 쩔쩔매는 척을 하면서 '담배나 피우러 가시죠'라며 이국장을 달래며 나가는 것으로 맺음을 했다. 매번 내일부터는 안 나올 것처럼 굴던 이국장은 누구보다도 오래 회사를 다녔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이국장은 차상무가 아끼는 브레인 중 브레인이었다. 아침마다 운동을 하고 출근을 하는 건지 아니면 중간에 사라져 운동을 하고 오는 건지 그의 다부진 체격은 양복 입은 태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작은 키였지만 탄탄한 근육 덕에 키는 실제보다 커 보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당당함이 풍겼다.


직속 부하 직원뿐 아니라 상사에게도 거침없이 말하곤 했는데, 자신이 너무 했다 싶으면 얇은 금테 너머로 씩 웃어버리곤 했다. 이국장하면 딱 떠오르는 건 얼룩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새하얀 와이셔츠였다. 그가 걸친 옷도 소품도 죄다 명품으로 보였다. 이목구비 또렷한 인상에 어딘가 모르게 시크한 매력도 풍겨서 광고주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와 언변에 상대방은 곧잘 설득당하는 편이었다.


이국장이 이끄는 3국에 처음 합류했을 때였다. 부서 이동하고서도 한참 뒤에야 이국장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전형적으로 낯을 가리는 듯했다. 담당 광고주가 바뀌는게 다반사인 대행사 기획직이 낯가림이라니? 나는 또 특유의 오지랖을 발동시키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벚꽃이 만개한 시즌이어선지 아니면 한창 광고주들이 광고대행사를 손바꿈 하는 시즌이어서인지 그날따라 사무실이 한산했다. 말단 사원 자리인 내 자리와 그런 내 컴퓨터 화면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안쪽 자리가 이국장 자리였는데 그는 마침 자리에 있었다. 텅 빈 사무실에 상사와 나뿐이라고 생각하니 울렁증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때는 그랬다. 죄가 없어도 ’네가 죄인이잖아‘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던 사원 2~3년 차였다.


"혜숙, 기획서 준비 잘돼가? 권대리가 잘 가르쳐줘?"


드라마에서처럼, 다가와 파티션에 기대어 자상하게 뭘 가르쳐주려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국장은 자신의 자리에서 시선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눈치 없이 못 알아듣고 딴짓을 하거나 하면 바로 공격적인 말이 날아올 기세였다. 나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뭐라고 답을 해야 하나 뇌세포를 풀가동했다. 이 상황에서 뭐라고 답해야 멍청하지 않고 선을 넘지도 않으며 촌스럽지 않은 사원이 될 것이냔 말이다. 사원 나부랭이 애송이였던 나는 답을 알리 없었다. 그런 걸 애초에 가르쳐 준 사람도 주위에 없었다.


"네.. 국장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번 제품은 경쟁사 분석이 중요한데 아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오늘까지 끝내겠습니다!"


"정말 경쟁사 분석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큭큭."


"네?? 아니 사실은 그걸 말씀드리려던 게 아니라..."


"예쁜 여자를 누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네??(얼굴 땀범벅)"


"회사 다녀 보잖아? 특히 대행사. 예쁘고 멋있으면 많은 걸 얻을 수 있어. 그런데 예쁜 직원보다 센 게 있어. 그게 뭔 줄 알아?"


"잘.. 모르겠어요(동공 지진)"


"예쁜 데다 똑똑하기까지 한 거야. 예쁜데 똑똑하기까지 해? 예쁜데 똑똑하게 말까지 잘해 보라고. 못 이겨, 그걸 어떻게 이겨? 내 말 잘 생각해 보라고. 난 광고주 들렀다 바로 퇴근하니까 박 차장한테 그렇게 전해. 수고~"


이국장은 얇은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홀연히 사무실을 떠났다. 뭘 어쩌란 말인지… 스물다섯 살의 내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이기려면 예뻐야 한다는 건지, 예쁘기만 한건 부족하다는 건지, 너는 그렇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잘하고 있다는 건지, 영 잘못짚고 있다는 것인지 무미 무취한 말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의사 결정권을 쥐고 있는 상대, 클라이언트를 온갖 데이터와 논리, 화술로 설득해 '광고주 수주'라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광고 기획직(Account Executive, AE) 일을 하는 해가 거듭될수록 나는 그날 이국장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어림 짐작할 수 있었다.


또렷한 이목구비, 호감가는 인상을 가졌다는 것. 이걸 내세우거나 일에 활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썩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내 외모를 일에 활용하는 건 뭔가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일종의 자존심같은 것이었다.

그런 나에게 이국장의 말은, '성과를 내고 남을 이기는데 가용할 수 있는 걸 다 가용해야 한다'는 전략쯤으로 해석되었다. 예쁜 건 현상이지만, 예쁜데 일까지 잘한다면 그건 경쟁력이라는 걸, 시골에서 올라와 뭐든 잘해보려고 애쓰는 한 직원에게 네가 가진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강점으로 만들라는 말을 돌려 말한 것 같다. 그것도 능력이라고 힌트라면 힌트를 준 것 아닐까.


그날 이국장의 한마디는 나를 변화시켰다. 그전까지는 일만 잘하면 되지 매력이나 에티튜드를 키우는 건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때부터 나에게 부족했던 세련됨이나 우아한 에티튜드를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안목과 취향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레쓰비 캔커피만 마시던 내가 횟수를 줄여 커피빈 커피를 마시고 새나가던 돈을 아껴 좋은 숙소와 그에 걸맞은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는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서포트를 받고 잘 자란 친구들의 몸에 밴 예절이나 태도 같은 걸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업무 능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을 병행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예쁘고 멋진데 일까지 잘하는 사원이 되도록 나를 단련시켰다. 당장은 아니었지만 노력은 서서히 빛을 발했다. 당시 내 고과는 나쁘다고 볼 수 없었다.  


항상 직설적이고 말투에 비아냥이 들어있어 말할 때마다 상대방을 작아지게 만들던 이국장. 그날 파티션 너머로 그가 알려준 건 을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강렬하고 은밀한 성공 비밀이었다.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