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문예지 등단 및 발표 에세이(2023년 7월호 수록)
"선물로 드린다니까요!"
"아니야~ 애써서 그린 작품인데 내가 살게."
"선물로 드릴 수 있는 건데요…."
그녀와는 오랜 인연이었다. 어림잡아 6~7년 되었을까? 처음 온라인으로 만나서 오프라인 인연으로 이어진 사이다. 한동안 연락이 뜸한 때도 있었지만 드문드문이라도 우리의 관계는 용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다.
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직조 공방을 차려서 운영해오고 있다. 그런 그녀가 최근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녀의 블로그를 통해서였다. 한 영상에서 한 마리의 귀여운 푸들이 캔버스에 그려지는 걸 보고 정말 귀엽다고 생각하여 댓글을 남겼을 뿐인데, 우리 시댁 강아지인 '수수'를 기억했다가 '수수'도 그려주마고 그녀가 답글을 달았던 것이다.
살다 보면 '그러고 마'하고 잊어버리는 일이 한두 번인가? 나조차도 상대방에게 '그러고 마' 하고 잊어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일 터인데 공방 운영에 어린아이 육아에 작품 전시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녀가 그걸 기억했다가 그려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거다.
그런데 며칠이 지났을까? 우리집 강아지 '수수'로 짐작되는 강아지가 베이지색 캔버스에 그려지는 영상이 그녀의 블로그에 올라왔다. 바탕 컬러인 베이지는 평소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었다.
"그러니까 은영아, 이날, 이날 보자. 내가 너 제품 사진을 촬영해주고, 너는…."
"그럴까요? 근데 언니 나 그날 안될 수도 있는데…."
"그래? 안되면 하는 수 없지만, 시간 맞으면 거기서 보자고!"
30대 중반 무렵 내 사업을 해보겠다고 퇴사를 했다. 다행히 처음 해보는 사업치고는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그때는 한창 블로그가 붐이었는데 그래서 온라인상에서 마음이 가는, 그러면서도 재능도 갖춘 멋진 인연들을 다양하게 만날 기회가 많이 생겼다.
그때는 지금보다 디자인 마켓이나 백화점 팝업스토어 등이 희소했다. 그럼에도 브랜드를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팝업 스토어에 참여할 기회가 종종 주어졌는데, 대개는 소개를 통해 이루어졌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도모할 때 나는 주변에 그 일을 해줄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떠올리곤 했다. 동시에 나는 그 사람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도 함께 생각했다. 대개는 이렇게 저렇게 해보지 않겠느냐고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둘 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떤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나는 참 즐거웠다. 상대방은 대체로 내 제안을 수락하는 편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일 겸 친목 겸 만나 서로에게 필요한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그렇게 함께 시간을 쌓아나가곤 했다.
전문 포토그래퍼나 디자이너에게 의뢰하면 주절주절 배경 설명 없이 일적으로 깔끔하게 처리할 수도 있는 그런 일이기도 했지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나와 내 브랜드에 대해 잘 아는 사람과 회의를 하다 보면, 깊은 차원의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경험을 종종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대방과 내가 둘 다 만족하려면 많은 회의가 필요했다. 그 역시 대부분은 내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편이었다.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좋은 취지로 했던 협업인데 혹시 나는 상대방의 재능을 비용 없이 활용하려고 한 적은 없었나?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면서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내가 더 노력한다면서 상대방에게 더 준다고 생각했는데, 이걸 상대방도 똑같이 느꼈다면 어쩌지? 혹시 반대는 아니려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아찔했다.
그 후로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혹은 재능 대 재능으로 교환이 가능한 경우일지라도 먼저 비용부터 물었다. 상대방이 두어 차례 "에이, 아니에요. 그냥 해드릴게요"라며 손사래를 쳐도 그게 아니라며 재차 물었다. 비용을 알려주지 않으면 찾아보곤 했다. 그건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그게 서로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또 상대방의 재능과 내 재능을 가늠해서 일대일로 교환하기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일의 효율성 측면에서도 제값의 비용을 지불하고 그 사람의 재능을 구하는 게 맞았다. 어쩌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림 잘 왔네, 뜯어볼 생각 하니까 너무 떨린다."
"고마워요, 언니. 요청하신 것도 곧 완성해 드릴게요."
"응, 나도 고마워. 또 필요한 작업이 있으면 요청할게요, 작가님!"
제값을 치른다는 것은 거리를 둔다는 말이 아니다. 제값을 치른다는 것은 그 사람과 선 긋는다는 것이 아니다. 제값을 치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존중한다는 의미다. 그 사람이 들인 노력과 정성을 알아주고 오래도록 그 사람의 재능과 성품을 함께하고 싶다는 의미라는 것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제값을 다 주고도 잘사는 법을 마흔이 넘어 알게 되었다. 잘 사는(Buy) 방법을 넘어서서 잘 사는(Live) 방법을.
이 그림은 앞으로 내가 여러 차례 이사를 다닌다고 해도 오래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물건으로 남을 것이다. 단순한 강아지 그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치며 한 이야기를 떠올려준 마음, 바쁜 일상을 쪼개어 정성스레 그려준 마음이 만들어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포장을 얼른 뜯고 싶으면서도 섣불리 뜯고 싶지 않은 이중적 마음이 드는 건 조금씩 아껴가며 보고 싶기 때문이리라. 만지면 톡톡 소리를 내는 크라프트 포장지를 만져본다. 포장지를 뜯고 나면 수수를 꼭 닮은 귀여운 푸들이 뛰쳐나올 것만 같다. 이 그림을 거실 한편에 두고 오래오래 볼 생각에 벌써부터 미소가 지어진다. -끝-
문예지 등단 작품부터 발표 신작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결말을 알수 없는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는 캄캄한 길이 인생이라면 무수한 일들 중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을 주는 일들만을 모아 글로 쓰겠습니다. 캄캄한 밤하늘에 별로 수놓듯 한편씩 써내려가 그 밤을 밝힐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 별을 보고 누군가는 따듯함을, 누군가는 의욕을, 누군가는 희망을 얻는다면 그 또한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쓰겠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묵묵히 쓰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가혜숙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