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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Oct 20. 2023

세 잔의 믹스 커피

종합문예지 등단 및 발표 에세이(2023년 5월호 수록)

‘어디 갔지? 분명히 여기 둔 것 같은데….'

몇 년 전이었다.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강해 싱크대에 받아놓은 물이라도 데울 것 같은 아침이었다. 유난히 잠이 깨지 않았던 그 날, 나는 주방 싱크대 서랍을 열고 안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꺼낸 채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어린 아기는 거실 중앙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아기가 깨기 전에 찾으면 딱 좋으련만, 언제나 그렇듯 딱 좋은 타이밍은 잘 오지 않는다. 그날도 그랬다. 신혼여행지에서 선물용으로 사 온 다양한 모양의 열쇠고리들, 이젠 약효가 사라졌을 먹다 만 약봉지들, 이미 없어졌는지 모를 호프집 병따개는 발견했어도 꼭 찾고 싶었던 커피믹스는 단 한 봉지도 찾지 못했다.     


거기서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아기가 잠에서 깨서 기분 좋게 엄마를 바라볼 때였다. 나는 아기 띠를 매고 근처 편의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육아맘에게 한낮 커피 한잔은 얼마나 달콤한지. 가끔 이 믹스 커피가 미치도록 먹고 싶을 때가 있었다.      


"4천 원입니다, 손님"

"네? 4천 원이나 한다고요? 여...여기요."     


20개들이 커피믹스 한 통 가격을 여태껏 몰랐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종이컵에 타 놓았다가 잊어버리기도 하고, 식으면 버리고, 가끔 기획서 위에 엎질러서 난감하기도 했던 무수히 많은 믹스 커피가 떠올랐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던 나는 커피믹스 한 통을 얼른 사 들고 횡단보도를 휙휙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왔다.     


"탁!"

커피포트에 물이 끓어 자동으로 스위치가 올라오는 소리만큼 생동감있는 소리가 또 있을까? 이 소리를 들으면 내 머릿속에도 스위치도 ’탁‘하고 켜지는 기분이다. 이 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도 훗날 다른 주방용품은 다 처분할지라도 커피포트만큼은 처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커피잔에 내용물을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뒤 티스푼으로 휘휘 저은 다음 한 모금 꼴깍 마실 때의 기분이란! 육아와 집안일, 그리고 언제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나는 이대로 괜찮은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와 같은 심오한 걱정 따위는 어느새 사라지곤 했다. 그날은 난생처음 내 돈을 주고 커피믹스를 사 마신 날이었다. 두어 모금 마셨을까? 찻잔 속에 또 다른 커피 한잔이 어렸다.  

   


대학생 때였다. 밤에 불을 끄고 누우면 쉬 잠이 오지 않았다. 걱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내일은 또 어떤 재미있는 일이 생길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때 나에게 세상은 내가 노력한 만큼 보상을 주는 듯했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느꼈다. 대체로 즐거웠지만 대체로 넉넉하지 않았던 때다. 


출석부 순서상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나에게 아침 등굣길은 언제나 빡빡했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뛰어가고 있을 때였다. 다다다다다 땅을 파는 소리를 내며 공사하고 있던 자리에서 개업식을 하고 있었다. 뭔가 달콤하고 강렬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금 멈추면 지각인 줄 알면서도 나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은행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들어간 은행에는 종이컵에 깔끔하게 타 놓은 커피믹스가 도도한 입김을 뿜으며 일렬로 넉넉하게 비치되어 있었다. ’역시 나는 오늘도 운이 좋아‘라는 자아도취에 취해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은행 문을 나옴과 동시 종이컵을 손으로 구겨 길가 쓰레기통에 탁 버린 후 헐레벌떡 인문관으로 뛰어갔다. 지각과 맞바꾼 그 날의 공짜 커피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정식으로 커피믹스가 제공되던 날도 있었다. 광택이 좋은 촘촘한 고탄력 스타킹, 까인 흔적 없는 고급 구두, 한눈에 보아도 좋은 가죽으로 잘 만들어진 가방. 총총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버스는 정류장을 유유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얼른 회사에 도착해서 커피 한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들어간 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출근 후 마시는 커피였다. 어디 커피믹스 주는 곳 없나 기웃거렸던 대학 시절을 지나 직장인이 되고 나니 노란 커피믹스쯤은 탕비실에 언제나 빼곡히 비치되어 있었다. 매일 출근해 탕비실로 가면 매일의 커피믹스가 화수분처럼 생겨나 있곤 했다. 광고주와의 식사로 찾은 고급 한정식집에서나 부서 회식으로 가던 파주 외곽 장어구이 집에서도 어디에나 넉넉한 양의 커피믹스가 날 반겨주었다.     


그러나 10여 년의 회사 생활에 자발적 종지부를 찍고 내 일을 해보겠다며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였다. 내 일상 어디에도 공짜로 제공되는 커피믹스는 없었다. 은행이나 관공서에도 언제부터인가 비치된 커피믹스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믹스 커피를 안 마시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내 돈 주고 커피믹스를 처음으로 사 마신 날 나는 알게 되었다. 커피믹스를 제값 주고 사고 나서야 비로소 독립했음을. 매일 출근 해야만 하는 매여있는 삶으로부터, 월급을 포함해 제공되는 그 모든 달콤한 편의들로부터 말이다.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판로, 비정기적인 수입, 불투명한 미래 등 내 선택으로 인해 생겨난 자유도 책임도 불편마저도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한편, 좋은 직업, 좋은 회사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나니 비로소 얻게 된 것들이 있었다. 호텔 최고층 한강이 보이는 자리에서 식사보다 혼자 호호 불며 먹는 뜨끈한 국밥이 더 맛있다는 것에서부터 쉬는 날에는 영화관으로, 핫플레이스로 겉도는 것보다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쉬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까지. 진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 회사 다닐 때 걸쳐야 했던 답답하고 불편한 수트와 굽 높은 구두를 벗어 던지자 편한 바지와 스니커즈를 신어도 되는 자유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대체로 느슨한 버뮤다 셔츠나 아주 헐렁한 티셔츠, 또는 넉넉한 스포츠 셔츠에 늘어진 양말과 늘어진 샌들을 주로 신는다. 그런 차림은 어떤 경우에도 나를 얽매지 않으며 손과 팔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더없이 편하다. – 제임스 미치너의 말, 책 <작가의 책상> 중에서    


계약 수주 후 패기 넘치는 킥오프 미팅을 마친 후 돌아오는 길, 거래처 대표가 예약해두었다는 프렌치 레스토랑을 정중히 사양하고 길을 나섰다. 사무실 근처 빵집에서 먹고 싶은 샌드위치를 샀다. 유독 햇살이 좋은 날이라 바로 들어가지 않고 근처 공원으로 간다. 공원에 도착해 가방 속에서 티슈를 두어 장 톡톡 뽑는다. 한 장은 벤치 위를 닦고 나머지 한 장은 벤치 위에 깔고 그 위에 앉는다. 잠깐 빼놓았던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으니 이내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가 시작된다.     

금방 만들었는지 바삭한 샌드위치를 천천히 먹다가 마지막 한입을 남기고 가방 안을 살핀다. 지금이다. 노란색 커피믹스 한 봉지를 꺼내 보온병에 탈탈 털어 넣고 흔든다. 뚜껑을 열고 컵에 부은 뒤 천천히 마신다. 그렇게 오롯이 내 선택으로 채운 시간에 마신 오늘의 믹스커피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달콤 쌉쌀했다. -끝-

문예지 등단 작품부터 발표 신작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결말을 알수 없는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는 캄캄한 길이 인생이라면 무수한 일들 중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을 주는 일들만을 모아 글로 쓰겠습니다. 캄캄한 밤하늘에 별로 수를 놓듯 한편씩 써내려가 그 밤을 밝힐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 별을 보고 누군가는 따듯함을, 누군가는 의욕을, 누군가는 희망을 얻는다면 그 또한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쓰겠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묵묵히 쓰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가혜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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