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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Oct 07. 2023

을이라는 세계

종합문예지 등단 및 발표 에세이(2023년 3월호 수록)

오후 1시다. 1시까지 연락을 주겠다던 O사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다. 책상에 앉은 채 프리젠터를 만지작 거리고 있다. 이번 제안을 준비하면서 새로 산 프리젠터다. 프리젠터는 페이지 넘김, 레이저 포인터의 기능이 있어 공식 발표를 할 때 유용하게 쓰이는 도구다. 


창업 11년차인 나는 프리젠터 부자다. 그동안 이걸로 수많은 제안 발표를 해왔다. 그 결과 예상대로 수주한 것도 있었지만 성과 없이 끝난 것도 부지기수다. 그 시간만큼 사무실에는 다양한 프리젠터가 쌓여갔다. 새하얀 새 프리젠터를 보고 있자니 문득 15년 전의 한 회의장이 눈앞에 스쳐갔다. 그날 나는 발표자가 사용한 프리젠터를 전용 케이스에 넣고 있었다. 뒷정리는 언제나 말단 사원 몫이었기 때문이다. 


“네? 우리는 퇴근하지 말라고요?”

“우린 야근 각이다! 그러니 저녁 메뉴나 고민해봐!”

“대리님, 우리가 왜…? 경쟁PT도 잘 끝났고 오늘은 부장님께서 칼퇴하라고 하신 금요일인데요?”

훤칠하고 인상 좋은 권대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양 다가와 소곤거렸다.

“그건, 새 광고주가 새로운 숙제를 줘서야. 우리는 그 숙제를 오늘 밤까지 해야 한다고!”     


신규 광고주 수주를 위한 발표 준비로 몇 주간 밤을 새운 것도 모자라 경쟁 PT가 끝난 날에 야근을 하라니. 입사한지 얼마 안 된 사원이었던 나는 이 상황이 매우 얼떨떨했다. 대학교 때 수많은 공모전을 준비 했어도 적어도 결과 발표날은 쉬었기 때문에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그날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발을 들인 곳이 어떤 곳인지를 말이다. 그 곳은 바로 ‘을이라는 세계’였다. 어쩌면 이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공모전 수상을 하고 졸업 전 입도선매 (立稻先賣) 로 제의를 받아 입사한 이곳은 내게 반짝 빛나는 곳이어야 했다. 갑이니, 을이니 이런 구분보다 중요한 건 내 능력이라고 애써 최면을 걸었다. 


입사 n년차인 나는 그 최면에서 슬슬 깨어나고 있었다. 광고주가 준 일을 완료하기 전까지는 업무를 종료하지 말 것, 광고주 퇴근 전에는 퇴근하지 말 것, 광고주의 개인사를 내 일처럼 챙길 것, 이런 기본 법칙들 말고도 최면에서 깰 사건은 많았다.      


당시 광고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권위 있는 세계적 광고제에 우리 팀에서 만든,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제작된 광고가 출품되었다. 그런데 한껏 부푼 기대감과는 달리 출품작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단지 해당 광고를 집행한 회사명만 아주 큼직하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내가 다니던 대행사 이름은 구석에, 그것도 아주 보일 듯 말 듯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행사. 남의 일을 대신 해주는 회사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앞으로 이 일을 지속할 경우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분석하고 숙고한 기획안을 바탕으로 광고를 제작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광고주의 취향을 따라 제작하기 바쁠 것이 눈에 훤했다. 갑자기 떨어진 숙제에 퇴근 못하는 날들이 카펫 먼지처럼 쌓여갈 게 뻔했다. 그리고 성과에서도 내 이름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렇게 내 열정은 가습기에서 나오자마자 공중에 흩어지는 습기처럼 휘발될 것이었다. 이러다가는 더 발전되는 것도 없이, 남는 것도 없이, 내 청춘의 프리젠터가 여기 종로 삼일빌딩에서 고장난 고물로 남겠구나 싶었다. 


내가 발을 들인 을이라는 세계는 그냥 을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일을 대신해주는 대행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대행 아닌 내 일을 하겠다고. 성과가 좋든 나쁘든 내 이름 석 자를 건 내 일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해도 지금보다는  더 성장하지 않을까 기대했고, 그 후 몇 년 뒤 나는 호기롭게 사업자 등록을 하고 창업을 했다. 


“대표님, 방금 O사에서 연락 왔는데 계약서 쓰자고 하십니다. 우선 1년으로 하고 연장하자고 하시네요.”

“아, 그래요? 좋은 소식이네요”

“이렇게 되면 올해는 더 이상 공격적인 영업은 안 해도 될듯 합니다!”

“그래요, 최차장도 수고했어.”


최차장의 상기된 얼굴을 보자니 나 또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흥분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무심한 척 했다. 손은 여전히 프리젠터를 만지고 있었다. 같은 버튼을 연속으로 누를 때마다 프리젠터는 연신 딸깍딸깍 소리를 내고 있었다. 프리젠터에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할 때마다 지난 10여년의 시간이 무성영화 장면처럼 스쳐갔다. 


창업 11년차. 창업 초기엔 무수히 많은 제안을 했지만 대부분 거절당했었다. 그때 나는 한계를 느꼈다. 그러나 마음을 고쳐먹고 한 해만 더 해보자 다독이며 시간을 쌓아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딱 10년차가 되자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승률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회사에 일을 맡긴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말했다. ‘가대표여야 한다’고. 그들은 내 실력을 전해 들었고 업계의 평판을 듣고 최종 결정했노라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그동안 뿌려둔 씨앗이 일제히 싹을 틔우는 것처럼 눈코 뜰 새 없이 일이 몰려왔으니 말이다. 

 

‘나를 선택해야 할 이유’ 이 문장은 내가 대행사를 다닐 때 노트 첫 페이지에 적어 두었던 문장이었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한 사람이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며 나를 단련했다. 그 방법을 찾느라 늦도록 잠 못 드는 날도 많았다. 그 때의 기억이 다 좋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확실한 건 그 시간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 시간이 축적되었기에 무방비로 정글에 나왔어도 용케 살아남았고, 또 앞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확신을 10여년이 지난 후에야 깨달은 것이다. 

     

이번 O사의 오케이도 그 영향일까? 내 뜻을 펼치지 못한 채 그저 을로만 일하는 것이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경험들은 신기하게도 창업 후 업력을 높이면 높일수록, 새로운 도전을 하면 할수록 생생하게 되살아나 막다른 길에 몰릴 때마다 나를 구해주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칠 때였다. 최차장이 먼저 퇴근했다. 핸드폰을 보니 남편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왔으니 걱정 말고 퇴근하라는 메시지였다. 시계를 보니 집에 갈 시간이 한참 지나있다. 남편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서둘러 일어났다.


“엄마 그거는 무슨 장난감이야?”

“응, 이건 말이야. 장난감은 아니고 엄마가 일할 때 쓰는 건데…”

종종 늦게 오는 엄마는 아이가 좋아할 장난감이나 과자를 사서 가방에 넣어 퇴근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아이가 꺼낸 건 프리젠터였다. 버튼을 누르면 얇은 레이저 광선이 나오니 장난감 같기도 하니 손이 먼저 가는 건 당연지사다. 


“린아, 휘둘리지 않고 일하는 법 알아? 을이든 갑이든 중요하지 않은 그런 방법 말야?”

“을? 갑? 그게 뭐야? 난 장난감 가지고 놀래.”     

프리젠터를 가지고 자기 방으로 또르르 가버리는 아이를 보니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세상이 '나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 이걸 나는 을로 살았던 시간에 배웠던 것이다. 사회라는 정글에 비무장으로 나왔어도 휘둘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 그건 내가 을로서 혹독하게 트레이닝 받지 않았더라면 여태 알지 못했을 비밀이었다.  

  

을로 사는 시간. 겪지 않을 수 있다면 겪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살 떨릴 만큼 치욕스럽고 분할 때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한다면,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찐하게 버티라고 말해주고 싶다. 돌이켜 보았을 때 당신이 을로 보낸 시간은 당신의 약점이 아니라 당신을 보석으로 만들어줄 찬란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이것이 십오 년이 지난 후 비로소 알게 된 ‘을이라는 세계’가 가르쳐준 진짜 비밀이었다. 


딸깍딸깍. 아이 손에 들려진 프리젠터에서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한다. 가만 보니 그 불빛은 손을 대기만 한다고 해서 켜지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다 우리 아이처럼 힘을 내서 버튼을 누를 때 진정으로 어둠 속에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는 걸 볼 수 있었다. -끝-

문예지 등단 작품부터 발표 신작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결말을 알수 없는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는 캄캄한 길이 인생이라면 무수한 일들 중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을 주는 일들만을 모아 글로 쓰겠습니다. 캄캄한 밤하늘에 별로 수를 놓듯 한편씩 써내려가 그 밤을 밝힐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 별을 보고 누군가는 따듯함을, 누군가는 의욕을, 누군가는 희망을 얻는다면 그 또한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쓰겠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묵묵히 쓰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가혜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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