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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Oct 18. 2024

#2 빨간색 경고등이 배달된 날

상담하느라 바쁜 남편을 대신해 부동산 사무실에 필요한 집기들을 정리하고, 손님에게 안내를 하거나 일정을 조율을 하는 등 분주한 날들이 이어졌다. 대면 업무가 많아 긴장할 때가 많았다. 긴장을 했다가도 잘 이완시키면 문제가 없을 텐데 한번 팽팽하게 올라간 긴장 상태가 밤까지 지속되는 날들이 많았다. 컨설팅 중인 회사의 중요 성과 보고까지 겹치는 시기가 오면 긴장감이 두배로 증가했다. 회사와 계약해서 하는 일은 꽤 큰 금액이 일정하게 들어오는 일이기에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 무렵 나는 컨설팅 용역을 제공할 회사를 한 곳 더 늘렸다. 부동산 개업하고 첫달에 계약이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3개월 뒤에나 중개 보수가 들어올 것이라고 괜찮겠냐고 묻는 남편의 말에 정신이 들기도 했고, 매월 들어오던 급여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두려웠다. 무리해서 계약한 클라이언트의 업무는 풀기 어려워서 배점이 높은 수학문제 같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살이 왜 그렇게 빠졌냐고,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입맛이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알아볼 정도가 된 것이다.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나아기지는커녕 심해지고 있었다. 자려고 누우면 심장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요동쳤다. 마치 전력질주 하다 멈췄는데 심장은 그대로 뛰고 있는 상태가 지속되는 통에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입맛 없는 건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예약해 놓은 유명 학원 입시 설명회에 가는 길이었다. 먹은 게 없어서인지 좀 어지러웠지만 현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머리를 감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시간이 빠듯해 지하철을 타기까지 좀 뛰었던 것 같다. 문제는 9호선 고속터미널 환승역에서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에서 한 층 더 내려가는데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까마득한 기분이 들었다. 가까스로 가까운 벤치에 주저 앉았는데 함께 가기로 한 언니가 어디쯤이냐고 전화가 왔다. 언니에게 사정을 말하자 거기로 가겠다고, 눈앞에 보이는 걸 설명하라고 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지하철 직원들이 왔고 그 뒤에 언니가 서 있었다.


그렇게 지하철에서 2번, 집에 누워있다가 3번, 한 달 동안 5번의 응급실을 다녀왔다. 거실 한쪽 테이블에는 가슴 두근거림(빈맥), 사지 무기력, 호흡 곤란 증상을 동반한 원인 불명의 불안 증세라고 적혀있는 진료내역서가 쌓여가고 있었다.


“엄마… 혹시 암 같은 거 걸린 건 아니지?”

참다 참다 말한 듯한 작은 목소리, 한창 예민할 나이인 고등학교 딸아이의 눈에 눈물이 차는 게 보였다. 이런 약한 말 하는 아이가 아닌데…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었다. 이겨내야 했다. 무쇠를 씹어먹어서라도 털고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닌가. 엄마라면, 적어도 내가 엄마라면.





나는 누워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매번 같은 약만 처방해 주는 병원을 바꿔보는 일이었다. 친절한 의사 선생님에겐 좀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낫는 게 우선이었다.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심정으로 병원을 검색했고, 체계적으로 상담을 해줄 것 같은 한 병원을 찾아냈다.


예약 당일이었다. 의사 선생님과 첫 상담은 기대보다 짧게 끝났지만 그때부터 나는 다른 기점에 놓이게 되었다. 그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이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쿵쾅거렸던 심장은 차츰 잠잠해졌고 심장이 뛸 때마다 힘이 빠지고 저려왔던 팔다리는 이전으로 돌아왔다. 차츰 식욕도 돌아왔다. 까끌까끌한 모래알 같았던 음식들에서 다시 맛이 느껴졌다.


그렇게 가장 역동적으로 일해야 할 시기에 가장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던 한 달을 보낸 나는, 그 시간 모든 짐을 홀로 지며 고군분투했을 남편에게 말했다.


“내일부터 출근할게. 나 뭐부터 하면 돼?”



나는 나는 달라지기로 했다. 누워서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는 일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때, 어렸을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통과해온 중요 장면들이 무성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더니 물음표가 하나가 남았다.


‘그렇다면 진짜 중요한 게 뭘까?”

나는 달라지기로 했다. 자신보다 남들의 시선을 더 신경 쓰는 삶에서, 나를 필요로 하면 내 상태나 기분을 제쳐두고 달려가던 삶에서, 그래야 겨우 인정받는다고 느꼈던 그 감정들에서, 내가 뭘 할 때 흡족한지 어디로 향해가는지 모른 채 그저 열심히만 살아가던 시간들로부터, 나는 탈출하기로 했다.


마흔넷. 나에게 배달된 빨간 경고등을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이대로 살다 간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고유한 것들이 공중에서 산산 조각나버릴 것 같아서, 나는 용기 내기로 했다.


남들 눈을 의식해서 ‘그래도 이 정도는 해야지’ 생각하며 해왔던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내가 생각하는 소중한 것들로만 시간을 채워나가기로 결심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내가 그때 찾고 싶었던 건 [삶의 정수, 에센셜] 같은 것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걸 찾으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늘 하던 일, 보던 것, 듣던 것, 생각하는 상태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살던 대로 살지 않기 위해 일상에 [틈, 균열]을 내보기로 한 것이다.


항상 자기계발 상태여야 했고 더 많은 더 높은 보수의 일을 해내는 대신, 내 자리에서 나를 돌아보며 내가 가치를 둘 진짜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찾아가는 시간. 내가 감히 이런 시간을 가져도 될까?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빨간 경고등이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무시한다면 더 크게 넘어질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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