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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Oct 18. 2024

#3 부동산이 스타벅스로 변한 경험



평일 4~5일 정도 사무실 근무하고 한 달에 2~3번은 컨설턴트로 일하는 회사 반나절 미팅을 주관하고, 틈틈이 외부 기관 강의나 개인 코칭을 진행하고, 입시가 시작된 아이 식사와 간식 빠짐없이 챙기고 입시 정보를 잘 챙기는 일, 이러한 일상에 [틈, 균열]을 만들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날도 남편은 외부 미팅이 있어 외출했고 사무실에는 나 혼자 있었다. 부동산 사무실은 토요일이 가장 바쁘고 그다음은 금요일, 평일은 대개 비슷하며 대부분 약속한 손님들이 방문한다. 그날은 약속된 손님 방문도 없었고, 오가다 들리는 고객도 거의 없었다. 실내에는 에어컨과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늦여름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지 사실상 고요했다. 


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컨설팅 중인 회사의 소셜미디어 반응도 추이를 살펴보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마치고 기지개를 한번 켜려는데 문득 컴퓨터 화면 속 [한글]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 열어볼까?

생각했다. 업무 할 때는 워드로 하고 글 쓸 때만 한글을 열곤 하는데, 한글 프로그램을 연지 꽤 오래된 것만 같았다. 역시. 사무실에 새 컴퓨터를 세팅하고 한 번도 열지 않았다. 최근 파일이 0이었다.


… 연 김에 몇 자 적어볼까?

생각하면서도 생각인지 변명인지 모를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나 지금 글 쓰려는 거 아니야. 어차피 여기서 무슨 글을 쓸 수 있겠어? 글은 조용한 장소에서 몰입할 때만 써지는 거라고.


그래, 알아. 지금은 그냥 드는 생각을 짧게 메모해 두려는 거야. 메모는 가능하잖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그래서 한글을 연 것뿐이라고.


이렇게 중얼거리며 화면 속 펼쳐진 새하얀 가상의 종이를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벽에는 이 지역 지도, 아파트 타입 구조도, 아파트 시세표 등이 촘촘하게 붙어있는, 세상에서 가장 이해관계 첨예한 거래가 일어나는 이곳에서,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자산 중 가장 고가에 속하는 자산 중 하나인 집, 그중에서도 아파트가 주로 거래되는 이곳에서, 나는 몇 년 전부터 쓰고 싶었지만 부득불 써지지 않았던 에세이 한편을 완성한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초안을 썼다.


아직도 그날의 질감이 생생하다. 무슨 일을 하던 완벽하게, 끝까지 해내는 남편 성향에 고객과 상담하다 보면 끼니를 거를까 봐 탕비실에는 언제나 꺼내 먹기 좋은 반찬과 햇반, 그리고 다양한 간식과 커피를 늘 준비해 두었다.


바쁠 때 굳이 카페에 가서 기다리지 않더라도 향긋한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다양한 캡슐과 디저트들- 다쿠아즈, 커스터드 케이크부터 솔티드 크래커, 그리고 남편이 좋아하는 초코파이까지-을 탕비실에 요목조목 잘 구비해 두었던 거다. 


“그렇게 많이 없어도 돼.”

“아니야 다양하게 갖춰 둬야지. 손님이 찾을 수도 있고.”


넉넉히 비축해 둔 건 어쩌면 이런 시간을 위해서 아니었을까 생각 들었다.


나는 한글 파일을 열기 전 의식이라도 치르듯 스타벅스 디카페인 캡슐을 골라 머신에 장착한 뒤 '따뜻한 커피' 버튼을 눌렀다. 딸깍 꼬륵 꼬륵 꼬르륵... 사무실에는 이내 은은하며 깊은 커피 향이 퍼지더니 어느새 가득 채워졌다. 에스프레소 향은 손님들이 마신 녹차, 둥굴레차, 커피 믹스 향을 지우고 자신의 향으로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말갛고 부드러운 디카페인 아메리카노와 딱 두 세입이면 없어지는 커스터드 케이크를 조금씩 아껴 먹으며, 나는 그렇게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시간을 보냈다. 30분 정도 지나있겠지 싶었는데 시간은 어느새 2시간이 흘러 있었다. 책상에 떨어진 커스터드 케이크 부스러기가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그날 나는 경험했다. 부동산 사무실도 스타벅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제임스 알렌이 ’생각의 연금술‘에서 강조하는 ’모든 것은 당신의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명제가 나에게도 일어난 듯했다.

 

나는 작정했다. 21년 만에 1년. 딱 1년만 사라져 보기로. 어디로 사라지냐고? 몸까지 사라질 수 없으니 현생,  여기 부동산 사무실 책상머리에 존재하되, 마음 만은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서 실컷 딴짓을 해보기로. 그렇게 책상머리에서 떠나는 나만의 안식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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